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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2 사순절 넷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3. 20. 20:56
성서일과
제 1 독서 : 사무엘상 16:1~13
제 2 독서 : 에베소서 5:8~14
제 3 독서 : 요한복음 9:1~41
응 송 : 시편 2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_D2oEIUiU417pQmjSBcJ2V80mwJTPVch = '클릭' 하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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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본 사람들
1
인생의 길위에 선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삶이라는 것이 최선을 다한다고 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나 운이 좋지 못했던 탓이 아주 없다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결과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와 같은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어떤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며 살고, 인생의 목표를 무엇으로 삼을지와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한편은 포기하고, 다른 한편은 선택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입니다.
조금 더 넓게 보고, 조금 더 깊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조급함에 내몰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낭패를 겪거나, 다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야 후회하는 아쉬움도 더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하지만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고 절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인생이란 본래부터 선택이 강요된 고되고 지난한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돌맹이 하나를 쥐어주곤, 마을에 다니면서 그 가치가 얼마 정도나 하는지 확인해 보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건은 돌맹이를 진짜로 팔아서는 않되는 것 뿐입니다. 제자가 시장에 나갔다가 야채를 파는 장사꾼에게 ‘이 돌맹이를 얼마나 사시겠소?’ 물으니, 그는 ‘배추 두 포기 드리리다’라고 말합니다. 또 한참을 가다가 소를 파는 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는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리다’ 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귀금속을 파는 곳에 들어가 물었더니, ‘대단한 보석이군요 이 가게에 있는 어떤 보석보다 더 값비싼 것입니다 전재산을 다 드릴테니 파세요’ 라고 했답니다. 이 돌맹이의 가치는 대체 얼마일까요 ? 돌맹이는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가치는 전혀 달라져 갔습니다. 시장에 나갈 때만 해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던 돌맹이인데, 돌아올 때는 혹시 깨어질까 잃어버릴까 싶어 가슴에 품고 돌아갑니다. 가치를 알게 되니 이런 것을 가지고 계신 스승님 마져 달리 보이고, 혹여 내게 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가 넘쳐납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무엇을 얼마나 가지느냐가 아닌,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될때야 비로서 경험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눈은 어찌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 지식을 쌓고,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 아쉽게도 으레 사람은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보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제 노력만으로는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중요한 것이 아닌, 자신이 보려고 했던 것만 고집할테니 말입니다. 오히려 노력하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을 자신의 틀안에 고정시키려는 마음은 강화되고 반대로 정말 가치있는 것은 간과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진정한 가치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성서일과 3독서 요한복음 9장에 이처럼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날 때 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눈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앞을 보게 된 이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인 데다가, 눈을 뜨게 된 이후에 도리어 난처한 상황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먼저 예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보지 못함은 이 사람의 죄입니까 ?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
허기사 우리도 이 질문을 끌어안고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볼수록 자꾸만 어떤 사람은 잘 되기만 하는 것 같고, 나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힘겨운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물음속에는 이미 이런 인생은 불행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부정적인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잔인한 질문을 예수의 제자들이 심드렁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인과율’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오랜 신앙의 습성이, 이렇게 밖에는 보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 셈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 서면, 그가 나 자신이든 타자이든 관계 없이 결국 죄인이라는 정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정죄는 독처럼 퍼져나가 결국은 삶을 차갑고 냉소적으로 보게 만들고 맙니다.
못보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이 사건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해주신 날이 문제였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에 그들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합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므로, 아무런 노동도 해서는 않된다’는 오랜 신앙의 전통 탓입니다. 결국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의견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으로 나뉘어지고, 다툼까지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눈을 뜬 연유를 묻는 질문에, 예수가 병에서 그를 구원한 자라고 고백하면 출교를 당할까 무서워서 아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눈을 감아 버린 비정한 부모의 모습도 보입니다. 제 목숨 때문에 사실에 눈감고, 해코지 당할 아들에게도 눈을 감은 셈이니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모두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고, 붙잡고 있고, 보려고 하는 것 말고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지금 본문에 등장한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고 싶던 것만 보던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쳤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보려는 메시아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빛을 잃어버리면 어둠만 남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어둠속을 헤매게 될 뿐입니다. 어둠안에 있으면 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어스름한 어둠으로 보일 뿐입니다. 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두려움이나 공포에 압도당하게 되면 허상에 사로잡히고 말게 됩니다. 마땅히 봐야할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시야가 가리워지는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가리워진 눈을 밝혀주실 그리스도께서 저들 앞에 서 계신 것 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3
오늘 이 시대가 정의가 깨어진 아픈 모습으로 발견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돈이나 물건과 같은 ‘어떤 것’으로 여김으로, 정작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탐욕에 사로잡혀 생명을 포착하는 영적인 눈이 무뎌지고 마는 이런 세상에서는 누구나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눈이 가리워져 상대의 마음을 볼 수 없다는 불안함에, 제 마음도 속시원히 보여주지 못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되고 치장된 겉모양만 보여주고, 또 그런 모습만 보는 거리감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속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또 아쉽고, 섭섭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주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대신하여 차기 왕으로 세울 자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사무엘을 이새의 집에 보내십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견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앞을 지나가는 다윗의 형들의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인지 다윗이 앞에 섰을 때 직접 말씀해 주시기 이전까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 사무엘상 16:7b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우리와 다르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도, 나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는 비로서 저마다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는 모두가 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만 송이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_ 이오덕/권정생,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4
우리는 요한의 복음서에서 다시금 반가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요9:39
요한은 못보던 이가 보게 되었다는 기적 사건에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보지 못하는 눈이 볼 수 있도록 하시고, 보는 이들은 보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가 누구이십니까 ?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빛’입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사실은 모두 빛이 굴절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시력이 뛰어나도 빛이 없으면 한치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극장에 들어갔을 때 곧장 좌석을 찾으려고 하면 낭패를 보기 쉽지요 ? 애를 쓰면 쓸 수록 발부리가 채이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둠이 짙을 때는 차분하게 작은 한줌이라도 빛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은 ‘빛’이 찾아와 어둠을 내몰아 주는 것 뿐입니다.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은, 전적으로 ‘빛’이 내게 들어왔다는 말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첫 머리를 열때에도 ‘빛’에 관한 말을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 1:4 ~ 5
어둠을 밝히는 빛,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빛이 우리를 찾아왔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어둠안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이 임하면 사라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빛을 직면하게 되는 어둠의 운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요 9:39
더 나아가 요한은 빛 되시는 예수께서 오신 것이야 말로 ‘심판’이라고 합니다. 보지 못하는 이가 보는 척하며 살아왔음이 하나님 앞에 드러났으니 심판이고, 보지 못하는 이들이 보게 되었으니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둠과 빛, 생명과 죽음, 하나님의 의로움의 기준을 ‘예수’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예수는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기준’ 이십니다. ‘심판’과 ‘구원’의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5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비추어졌으며, 예수와 함께 하는 자가 하나님 백성이고, 예수와 반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대적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의 선행이나 인류애, 섬김과 헌신도 재해석됩니다. 참으로 귀한 가치이며, 교회는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가 ? 얼마나 시민의식이 뛰어난가 ?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내용이 성도나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로나 자격 같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큰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엡 5:8
책망받는 일을 하지 말고, 주께서 기뻐하실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말이 가득하지만 바울은 ‘저렇게 살지 마라’거나 혹은 ‘이렇게 살아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빛’에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 엡 5:13 ~ 14
잠자는 자를 깨우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는 것은 ‘빛’이라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성령의 열매보다는 육체의 열매, 거룩한 삶보다는 죄에 퇴패하고 마는 우리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니 그렇습니다. 그 희망은 어디에서 비롯합니까 ? 빛의 열매를 얼마나 이루며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둠속에서 벗어나 드디어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비로서 보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침내 무엇이 길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빛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을 비추시니, 다시는 어둠에 사로잡힐 염려가 없습니다. 어둠은 여전히 우리에게 부딪혀 오겠지만, 그 빛이 우리를 지켜낼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눈에 이겨 바르신 이후에 앞 못보던 이를 보내셨던 곳이 있습니다. ‘실로암’이라는 그 연못의 이름 뜻은 ‘보냄을 받았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품이 되지 않는다고 내몰거나 책망하거나 타박하시지 않으십니다. 빛을 통해 길을 보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기꺼이 구원의 빛을 볼 수 없던 우리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빛이 어느새 우리를 어둠을 밝히는 또 다른 빛으로 물들여 가고 있습니다. 그 은총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음을, 그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어둠이 가득합니다. 소망은 모두 사라진 것만 같은 회색빛 절망이 숨 조차 쉬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직면하게 된 암담한 매일이, 예배할 수 없는 주일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이 야박함이 마음마져 어둡게 할 까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빛이 있어야 할 곳은 어둠의 자리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꺼져버린 소망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것도 빛이 해야할 몫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어둠이 빛을 모르고, 미워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빛이 밝지 않다고 낙망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이 그를 미워해도 온 땅을 밝히는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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