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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9/19 성령강림후 17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9. 15. 15:59

    성서일과

    •  1독서 – 예레 11:18-20 혹은 잠언 31:10 ~ 31
    •   시편 – 54 혹은 1
    • 2독서 – 야고보 3:13-4:3,7-8상
    • 복음서 – 마가복음 9:30-37

     

    설교음원

    http://naver.me/5X9rajL0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Cd2N-sH4XN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Jesus mafa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예수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때 제 인생의 처음 ‘지적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주셨던 한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배 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존 스튜어트 밀의문장입니다. 그닥 넉넉치 않았던 형편이었던 탓에 ‘배고픔’이 낫다는 말은 어린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몰랐기도 했지만, ‘역시 배부르게 사는 것이 낫다’싶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들의 한가한 소리일 뿐이라 여기면서도, ‘왜? 저렇게 말했을까?’라는 의문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사춘기 시절을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도 이 문제앞에 서 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가 된 제가 이 말을 전해야하는 입장입니다. 오늘 시대의 지혜는 온통 부자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유혹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이 복이라 말하고, 그런 것을 복으로 찾으며 살아갑니다. 배고픔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배부르고 싶다는 욕망의 연장선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돼지를 저울질 하면서 고민하던 제 어린 시절에 비해 세상은 더 나아진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 보다 나은 것일까?’라는 이 물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일체의 종교나 경전들이 그러하듯 성경안에는 참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 좋은 말씀만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눈쌀을 찌푸려야할 만큼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도 있고, 부패하고, 타락한 이전투구의 각박한 모습도 보게 됩니다. 성경만이 전할 수 있는 말씀, 다시 말해 우리 눈에 거슬리는 ‘마땅한 무엇’이 그곳에 담겨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녔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성경은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답을 전해 줍니다. 그 ‘복’이란 것은,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머리를 하늘에 두고,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 마음처럼 맑고 투명하게 영글어가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그리 되기 위한 실천적 삶의 길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제 목사가 되고 난 이후, 저에게는 또 한가지 의문이 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복’되게 살아가는 ‘지혜’가 있을까?” 이 물음은, 아무리 보아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려는 어른들이 보이지 않아 혼돈스러웠던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을 암송하고 노래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복’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모습이 드물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예수님 당시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저 만치 주님과 떨어져 걷고 있던 제자들이 다투었던가 봅니다. 여정을 마치고 쉬게 되었을 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좀전에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마가의 기록은 마치 그들이 ‘서로 누가 큰 자인지’ 쟁론, 다시 말해 다투었다고 사정을 고자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어 두번째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직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진리에 관해 토론을 할 만큼 무르익은 제자들 모습을 기대하셨을 주님의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겠지요. 주님과 똑같은 땅에 발을 딛고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과 전혀 다른 곳만 보고 있습니다. 스승은 죽으러 간다고 하는데, 누가 ‘더 큰 사람’ 그러니까 유력자가 될 수 있는 재목인지를 다투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솔직히 세상적으로 본다면 제자들은 오히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이 로마를 무너트리고 새 나라를 세우실 텐데, 하루라도 빨리 서열을 정리하고 인정받는 자리를 선점하는 것은, 개발이 일어나고 집값이 높아지기 전에 먼저 땅을 사려는 현대의 지혜와 닿아 있습니다.

    주님은 ‘첫째가 되려고 하면 끝이 될테니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지향을 수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머리에서는 ‘아멘’으로 동의가 되는데, 우리의 속안에서는 영 그 말씀에 ‘아멘’이 되질 않습니다. ’부동의’(不同意)입니다. ‘그리 되고 싶지 않다’는 본성의 함성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닿고 하나님께 잇대어 살고 싶은 것은 진심인데, ‘먹고 사는 문제, 현실’이라는 땅의 힘이 하늘로 향하던 우리를 속절없이 땅바닥으로 끌어내립다. 주님은 하늘에서 큰 자가 되라하시는데, 자꾸만 땅에서 큰 자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보다 크신 주님을 곁에서 보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여전히 우리는 눈 뜬 장님들일 뿐입니다.

    어찌해야할지, 어떻게 땅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절망하는 우리들에게 ‘낮아져라’, ‘섬기는 자가 되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해결책은 도무지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닿아보겠다고 자꾸만 헛발질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늘에 닿으려면 높아지는 법을 가르쳐주셔야 속이 시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들어야 합니다. 낮아짐으로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사람은 ‘뭇 사람’ 그러니까 ‘모든 사람’, ‘누구든지’라고 정해주셨습니다. 결국 주님 말씀대로 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제 품에 품을 수 있을 만큼 큰 사람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제 자신만 움켜쥐고, 딱 제 눈에 들고, 제 욕심에 차는 사람 만큼만 품을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릇인데, 터무니 없을 만큼 큰 사람되라는 말씀이었으니 그렇게 어려울 수 밖에 없던 겁니다. 

    하늘에서 ‘큰 사람’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낮아지고, 섬기라고 하면 손해보고, 바보 되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예수를 믿는 것까지는 좋지만, 제자가 되고, 제자답게 살라고 하는 것은 무거운 짐만 같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사로잡혀 버립니다. ‘무엇이 없어서’, ‘무엇을 가져야 해서’, 또는 ‘무엇을 못해서’라는 이유로 우리는 기쁨을 모두 빼앗긴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노예처럼 굽신 거리며 비굴해지는 삶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는 '죽음'을 통과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땅에서 '낮아지는 것'은 모든 억압과 유혹, 욕심과, 자존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을 부인함으로 이런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나 보다 작은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때 우리는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께 이어진 사람이야 말로 세상보다 큰 사람입니다.  ‘큰 사람 되라’하시는 말씀은, 그 만큼 구원받은 사람답게 모든 것에 자유하게 살라는 ‘구원’에의 초대인 셈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시는 주님과 이어져있을 때 비로서 땅이 끌어당기는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왜? 내가 먼저!’ 라는 마음을 털어내고, 나를 향하려는 ‘욕심’을 비워내야만 합니다.

    바울은 ‘욕심’을 비워냄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닿는 겁니다. (약 4:8)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때, 땅이 끌어당기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참된 평화가 보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자연스레 세상이 이토록 불화한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지식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지혜로 제 품을 넓히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이 내세우는 욕심으로 가득채워져 있으니, 평화는 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땅의 인력을 제거하는 이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것 만큼은 우리의 몫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을 경외하고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안에 담겨있는 감동과 영혼을 맑게 깨우치게 해주고, 두려움을 몰아내는 풍성함을 발견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억지로, 그럴 듯한 모습으로, 척하는 것이 아닌 즐거움을 발견한 자 답게 의지적으로 주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땅에서 제자들에게 낮아지는 자가 되라 말씀하시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앞에서 안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 막 9:37a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는 ‘데코마이’ (δέχομαι)는 영접하고, 환영하고,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친절히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가 나보다 나은 존재임을 인정하듯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본성은 나보다 못하다 여겨지면, 내 자신이 그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 어린 아이보다 낮아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뜻은 ‘주님을 대하듯하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어린 아이와 동일시 하셧다는 사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 아이를 내 수준으로 보는 것도 어려운데, 주님처럼 대하는 일은 더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또 다시 실패하게 될 겁니다. 작은 이들 앞에 설 때면, 언제나 가장 연약한 이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셨던 주님을 기억해내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죄인이었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으니, 하늘보다 높으신 주님과 이어져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우리가 섬겨야 할 만큼 큰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혜가 닿아있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날 것 그대로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겠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고난’의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여전히 하늘에 잇대어 영글지 못했다는 증거도, 그들이 무너졌던 곳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언제라도, 또 누구라도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또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은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고 속절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이 찾아왔을 때만 우리는 비로서 영혼의 껍질을 깨고 자기 밖의 초월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비상이 이 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고보면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익은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찾아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리해야만 하느냐? 고난 없이 주님 믿으며 살 수는 없느냐?’는 물음은 왜, 무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에만 추수를 해야하느냐?는 질문 만큼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워졌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도리어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우리야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라 믿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당시에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예레미야였다면 그런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요?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의 이유를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의’를 위해 받은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바로 ‘말씀’이고, ‘간증’이 됩니다.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사도들이 그러했으며, 믿음의 선배들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길이야 말로 그리스도로서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고난’을 통해서만 완성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이 사실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으레 남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이나, 남들처럼 그럴듯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마 5:10

     

    도리어 공의와 정의, 바름과 진실, 모든 연약한 자들을 향해 자신을 동일시 하시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그래야 ‘복’이 됩니다. 하지만 거창하게 생각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당연하다 여기는 것들을 거절하면서 부딪히는 모든 경험들이 ‘고난’입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가진 것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냉대받는 것이 불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방식을 거절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가장 낮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 힘겨울 때, 그것도 고난이 됩니다. 세상의 차별을 가로막고 그런 이들을 귀하게 보아주는 것도, 혹은 그런 처지에 떨어진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도 고난입니다. 

     

     ‘고난’이 하나님께 이어지는 길임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큰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사람으로 세워지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이 지혜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땅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뒤집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깨닫게 해주시려의도적으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나 따르라고 하셨지만, 아무나는 아닙니다. 세상보다 크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 이 말씀의 초대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서시겠다면, 머리로 아멘된 말씀을 30cm아래 가슴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뜻을 다해 믿음을 선택하십시오. 주님의 제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을 통해 낮아짐의 끝에서 하늘에 닿는 길을 발견하신 여러분들에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자녀로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이 동일시하는 이들의 곁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낮음의 자리로 향하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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