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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3 성령강림후 1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9. 29. 14:56
성서일과
- 1독서 | 욥기 1:1, 2:1~10 혹은 창세기 2:18 ~ 24
- 응송 | 시편 26 혹은 8
- 2독서 | 히브리서 1:1~4, 2:5~12
- 3독서 | 마가복음 10:2~1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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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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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몸' 뿐입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주님의 태어남,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의 핵심은 주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 눅 18:27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투명하게 보여주셨고, 비로서 우리는 주님을 대하듯,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대의 무능에서 하나님의 유능을 만나고, 버려짐에서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깨어진 불가능에서 이루시는 창조주의 손길을 보게 된 겁니다. 놀라운 세계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인해 ‘복음’이 전해주는 가슴벅찬 메시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왜곡된 시선에 갇혀 있도록 만드는 세력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어둠’ 혹은 ‘마귀’, ‘사탄’입니다. 오늘 1독서 본문 욥기에서 우리는 ‘사탄’이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소 (讒訴) 란 ‘남을 해치려고 헐뜯고 거짓말로 없는 죄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러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신앙은 종종 하나님 앞에서 사탄에 의해 참소당하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종교적 열심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염려해야될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무죄한 ‘욥’을 참소한 본질적 이유는 하나님과 욥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함이었지만, 욥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결코 상처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꿰뚫어 보실 뿐만 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거짓에 의해 눈이 가리워지거나 휘둘리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오히려 사탄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헐뜯고 거짓으로 참소할 때야 말로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또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만큼 너무 연약해서, 사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 할 때마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불신하고 오해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기준 삼아 ‘하나님의 뜻’을 들먹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책임에 눈을 감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탓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율법임에도, 우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율법을 오해하고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보다, 율법을 더 우선시 하려는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긴장 관계는 늘 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오늘도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오늘도 주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이번에 그들이 주님께 던진 의문은 표면적인 물음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는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율법 조문의 해석을 이유로 예수님을 넘어트리려는 사특하고 불온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들이 근거로 내세우려는 말씀은 모세의 신명기 24장 말씀이었습니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 신명 24:1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고 여자를 보내줄 수 있다고 했으니, 예수께서 ‘이혼시킬 수 없다’라고 하시면 율법에 반하는 것이고, ‘이혼시킬 수 있다’라고 하시면 불의한 이라고 몰아갈 참이었던 겁니다.
정말 어찌해야할까요? 상황에 따라 이혼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절대적으로 그리할 수 없는 일입니까? 양자택일의 답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조바심와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결혼’의 본래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창세기에는 1장과 2장 두번에 걸쳐 창조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순차적인 것이라거나 모순된 내용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측면에서 전하는 창조 이야기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성서일과는 두번째 창조이야기가 있는 부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평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정반대의 평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 창 2:19
이유는 ‘아담이 홀로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아담은 결코 에덴에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뭇 피조물들이 함께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곁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가 홀로 있는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비어있는 곁을 채우시려고 그의 짝을 빚으셨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아담이 자는 동안 그의 갈빗대를 가지고 ‘돕는 베필’로 하와를 지으셨다고 하지만, 새번역성경은 하와를 ‘알맞은 짝’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에 더 가까운 해석은 후자입니다. 사실 ‘돕는 베필’이라고 하면 무언가 하와가 아담보다 신분적으로 열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알맞은’이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제르’의 의미는 ‘거드는’, ‘알맞은’, ‘딱 맞는’, ‘완성시키는’입니다. 이대로 번역하면 하와야 말로 아담에게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할 짝, 꼭 맞는 짝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 시편 121:1~2
시편기자의 찬양중에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씌인 단어도 ‘에제르’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돕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일과 같다는 말이 됩니다. 껍데기만 그럴싸한 아담을 아담답게 만드는 것, 아담 창조의 완성이야 말로 하와의 몫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성경대로라면 남편들은 아내앞에서 되도 않는 큰소리를 치고 힘자랑할 것이 아니라, 늘 ‘당신 때문에 내가 비로서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마워해야합니다.
4
두번째 창조의 이야기는 결혼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본래 ‘붉은 흙으로부터 왔다’(‘아다마’)는 의미이므로 ‘하와’는 흙덩이였던 아담이 참으로 사람(‘아다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여자가 있어야 남자일 수 있고, 더 나아가 본래 사람이란 홀로가 아닌, ‘더불어’서만 온전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고독’과 ‘외로움’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다른 것을 배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만을 대면하도록 초대받는 시간이 ‘고독’입니다. 고독앞에 서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다릅니다. ‘외로움’은 ‘혼자 있기에 경험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이나 고통은 모두 예외없이 ‘외로움’입니다.
창세기에서 만나는 두번째 창조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은 누구라도 남겨진 고통 가운데 홀로 버려지고 방치되어서는 않되는 존재이며, 또한 누구도 그렇게 인간을 대해서는 않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인간선언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만 집중하다 결국은 하나님도 자기 밖으로 밀쳐내는 우리에게 자기 밖의 사람이 잘 보일리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진 마음, 삐뚫어진 본성은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사란히 드러날 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고대 시기에는 여성의 인권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를 내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해석이나 아내를 내쫓는 것 모두 일방적으로 남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게다가 고향에서 받아주지 않는한 혼인 관계에서 배제된 여인이 홀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남편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를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고는 아내를 함부로 내칠 수 없다고 규정한 겁니다. 이혼을 허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결혼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셈입니다.
5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준과 해석은 더 가관입니다. 그들의 물음안에는 여전히 ‘내가’ 또는 ‘우리가’ 어디까지 하면 이혼이 허용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가 하나님이 용납해주시는 한계인지에 대한 관심만 가득합니다. 율법은 그저 자신들을 위한 명분과 면죄부일 뿐, 그들은 살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간음을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밥을 태워 남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 것’도 이혼하려는 이의 명분인 여인의 수치스러운 일로 해석되었다고 합니다. 싫증이 나고, 귀찮아진 것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회적 강자였던 그들은 이런 더럽고 비열한 일을 저지르고도 ‘수치스러운 짓’을 했다고 모든 책임을 여인에게 덮어씌우고는 이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참으로 독선적이고 악독합니다. 모든 악의 근원안에 자기 숭배가 도사리고 있음이 이보다 분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그런 폭력에 대한 주님의 판결은 ‘너희가 간음하였다’는 것, 돌로 쳐 죽여야할 죄라는 겁니다.
뒤이어 주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끌어안고 힘을 다해 축복해주십니다. 가장 연약하고 깨끗한 존재인 아이들을 통해 강자로 정의되는 이들이 저질렀던 불법과 불의함을 선명하게 들춰내시려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제자들이 주님앞으로 나오는 아이들을 제지합니다. 별볼일 없어보이고 힘이 없고 연약한 이들을 주님과의 사이에서 소외시키려 윽박지르는 못된 행동입니다. 노하신 주님의 불같은 꾸짖음이 여지없이 그들에게 떨어집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가복음 10:15
이 아이들이야 말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반대로 이들같지 않은 너희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가 거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거칠게 부끄러움과 수치로 몰아세우는 말씀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것’이라고 씌여있지만, ‘받든다’는 말이 봉사하고 섬기는 뜻으로 읽혀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말 그대로, 내것으로 받는다고 읽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누구라도 부르시고 초대하는 나라이며, 받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라도 내미는 손이라면 기꺼이 주시는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만 이 나라는 아이들처럼 받는 이들에게만 전해집니다. 반드시 선물처럼 받아야 하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선물은 선물로 받아야만 가치가 있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세상에 눈을 뜨면서 우리는 점점 타자의 호의와 선물을 의심하고, 부담을 가집니다. 선물 자체가 아니라, 돈으로 환산하는데 익숙해지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갚아야할 짐이될지 모른다는 숙제를 스스로 떠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선물을 받으면서도 기뻐할줄 모릅니다. 값을 치루어야만 한다는 세속적 습성, 자기의 능력, 업적, 의를 근거로 삼으며 길들여지고 살아온 탓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게 주어진 선물로 받지 못할 만큼 믿음이 없고, 타인에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할 만큼 이기적이고 옹졸합니다.
6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형제(자매)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모두 하나의 완전한 가족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착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내미신 손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은총입니다. 이보다 큰 은혜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어기면 부정해지고, 은혜로부터 떨어질까에만 닿아 있습니다. 선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있지만, 결국은 선물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앞에서 선물 받은 아이들처럼 기뻐하고 있습니까? 왜 이런 삶이 주어졌을까?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겨야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처럼 받은 삶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실감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탄의 참소를 거부하고, 주어진 하루, 삶의 조건들, 함께 하는 사람들, 소망과 기대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는 모든 것들을 선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감동, 삶을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 더불어 사는 삶을 회복하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활짝 여는 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0:8 ~ 9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지체로 연대하는 한 몸이 되었으니, 우리의 결속은 가정보다 더 든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로에게 알맞은 짝, 돕는 짝, 그로 인해 온전해질 수 있는 짝으로 맺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셨으니, 이제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환란과 시험도, 유혹과 핍박도 그리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성도를, 우리 모두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없으며, 주님을 향한 믿음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로서의 존엄과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키시기 위해 기꺼이 우리와 한 몸이 되어주셨고, 지금도 당신의 피로 이 새로운 언약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 로마서 8:3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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