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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2 성탄후 제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2. 29. 10:19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예레미야 31:7 ~ 14
- 응송 | 시편 147:12-20
- 2독서 | 에베소서 1:3-14
- 3독서 | 요한복음 1:10-1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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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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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복' 주시는, 하나님
1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새해 벽두에 이른 오늘, 다른 어떤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이 그 만큼 두려움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인도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대는 높아졌지만, 자신은 없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만만치 않은 현실의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돌아보는 순간 새로운 한해를 잘 살아낼 자신감이 사그라져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온통 시끄럽기만 합니다. ‘공정과 정의가 흐르는 나라로 바꾸어 보겠으니 자신을 뽑아 달라’는 정치인들의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마치 소음처럼 귀를 피곤하게 합니다.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들리는 그들의 말은 허울은 좋아 보이나 속은 비어 있으니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야만 하는 삶을 서럽게 만들 뿐입니다. 오히려 그런 소음들 때문에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라는 의문 속에 담아 놓았던 한조각 희망마져 ‘역시 그럴리 없다’는 좌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고문이 될 뿐이라며 섣부른 희망에 손사레를 치는 젊은이들에게 ‘내일은 좋은 날이 올거야’라는 말은 무책임한 어른들의 덕담 이상이 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또 다시 이 아침에 새로운 희망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성서를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1독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미 망해버린 북왕국, 세상의 끝 저 너머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서럽고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데리고 돌아오실 것이랍니다. 이제는 매일 삼켜야만 했던 눈물들은 기쁨으로 흘리는 눈물로 바뀌게 될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되면 곡식과 포도주, 양 떼와 소 떼를 얻고 만 백성이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현실 너머 꿈만 같은 메시지를 들을 수 있던 선지자의 영적인 감수성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아있던 유다 마져도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고, 예언은 실패했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그런 식의 예언이 성취되었던 때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늘도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살고 평안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평화’의 날을 기대하고 있지만 그 날은 신기루 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요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자의 예언이나 성경의 말씀은 무의미하고 쓸모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와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평화의 날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와 자본이 축적될 수록 힘에 의한 갈등과 위협이 커갈 뿐입니다. 삶은 더 복잡해 지고, 개인들은 소유로 내몰리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날을 이루어내실 것이라는 말씀이 훨씬 현실성이 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본인도 언제, 어떻게 그 날이 이루어질는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이루어내실 그런 세계를 엿보았을 뿐인 겁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무효화하지 않으셨고, 오늘도 우리에게 이 약속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도 주님의 말씀을 희망으로 삼으며 약속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미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던 출애굽에 대한 기억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겁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도 할 수 없었지만,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를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신다’는 성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족이 함께 공유하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포로로 끌려가는 말도 되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말씀을 희망의 꼭지로 삼으며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 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DNA안에는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말씀의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그 말씀의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백성들이 이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돕던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내용보다는 약속에 응답해야하는 형식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은 여전히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외침이 이 사실에 공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 시편 147:1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그의 말씀으로 ‘복’ 주시는 분이시니 마땅히 큰 기쁨의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복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나 여기있다’, 그러니 ‘괜찮다’는 그 한 마디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덩그러니 내동댕이 쳐진 삶에 그분의 위로와, 우리를 부르는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 냉랭한 삶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요?
4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 있던 마태나 누가와 달리, 요한은 아버지의 품안에 안겨있는 독생자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직 자신만이 누리실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기꺼이 나누어 주시려고 찾아오심으로 비로서 우리는 하늘의 유업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수준을 하나님의 자녀의 것으로 바꾸어 주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는 모두 ‘복’되고,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우리 삶이 든든해지게 됩니다. 삶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돈이 없다거나 무엇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 채이거나,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다보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탓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하는 모든 일은 어떻게 해서든 여러분들이 잊고 지내던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입니다.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말씀’의 지향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은 계속해서 당신의 삶에서 잊혀지고 있던 놀랍고 위대하신 이름을 기억해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늘 하늘의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그분을 따르는 삶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총이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지만, 다른 어떤 것이 없어도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과하고 따르는 삶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정하신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 아닌지, 설득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실을 실재로 믿을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예레미야가 약속했던 소떼나 양떼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상황과 여건, 형편에 관계 없이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영혼은 늘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경험하시고 누리셨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시는 능력을 내 삶안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더 이상 세상의 부귀와 권력앞에서 비루해지거나 굽신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에 언제나 찬양과 기쁨이 넘쳐납니다. 하나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5
오늘 말씀들은 모두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언제나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문제를 향해, 탐욕과 욕망을 향해, 세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절망에 사로잡혔었는데,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외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찬양의 기쁨이 넘치고, 그분의 영광과 은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비록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사는 것이 실제로는 삶에서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바쁘고, 위태로운 현실앞에서 우리는 여유를 조급해지고 맙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인한 ‘영광’이나 ‘찬송’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일상에서 절대적인 기쁨의 토대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사실만이 인생이 복되고, 그 사실 때문에 삶이 풍성하고 행복해지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 약속의 증거가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오늘도 나는 복된 존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사실과 비결을 예수안에서 발견했고 그 사실에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었던 이들이 초기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돌아가야할 곳도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 열두 번씩이라도 ‘말씀’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일년 열두달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닌, 자꾸만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을 얻게 될지 또 무엇을 얻지 못했는지에만 마음을 빼앗기다보면, 약속의 말씀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함정에 빠지고, 말씀이 대체 무슨 소망이 될 수 있느냐?는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불행하고 불쌍한 삶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삶을 구원하는 하늘의 능력이란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거둘 수 있는 길이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지 못한다면 그런 삶에는 말씀이 이루실 일이란 없습니다. 그런 삶에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신화속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삶에 터에, 신앙의 밭에 씨를 뿌리지 못했다고, 도무지 인력처럼 잡아끄는 세상의 힘앞에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었다고 실망하거나 낙담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로 인해 태양처럼 빛나는 ‘빛’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참 빛’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더 이상 손전등은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께서 비추어주시는 곳, 예수를 따르는 길만 쫓아 가면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길 삼아 살아가다보면, 어느날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는 삶을 넘치는 기쁨안에 살게 될 겁니다. 마침내 포로로 끌려간 곳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이끌고 오시듯, 주님께서는 절망과 한숨, 두려움과 좌절, 믿음 없음으로 채워지고 말았던 지난 한해의 해묵은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의 시간,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영광의 날, 온 마음과 영혼을 드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기쁨의 날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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