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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주현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 12. 15:56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62:1-5
- 응송 | 시편 36:5-10
- 2독서 | 고전 12:1-11
- 3독서 | 요한 2:1-1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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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포도주'로 불러내셨다 !
1
고금을 무론하고, ‘혼인’(婚姻)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부를 만큼 중차대한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한번의 선택으로 자칫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앞으로의 인생에 지옥 같은 삶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인이나 결혼에 대해 요즘 우리는 매우 우울합니다. ‘내 집’마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꿈’을 포기한다던 하소연들이 이제 좀 익숙해질까 싶었는데, 이제는 ‘가정’을 이루거나, ‘결혼’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고 의지하는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 채 깨어지고 미성숙한 인격들이 서로에게 흉기가 되어버리는 모습들이 안타깝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 그저 개인이 짊어지기 과도한 비용부담의 문제로 치부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무책임한 사회에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이상만 모이면 갈등하고 깨어지는 불화한 세상에서, ‘혼인’은 인간의 만남안에 하나님이 꿈꾸고 계시는 ‘평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게 해줍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속에서도 온전한 사랑을 통해 영혼의 안식과 구원을 경험하는 통로로서, ‘혼인’을 ‘성사’에 포함시켜 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막 결혼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제 아무리 사나운 파도라도 타고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주눅들지 않는 자신감과, 무엇이라도 또 어떤 모양이라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꿈’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결혼 소식을 알리는 누군가의 청첩장을 받는 일은 유쾌합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장면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혼인’ 잔치로부터 시작됩니다. 허드렛일을 도우러 갔는지 혹은 축하를 해주러 간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예수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신 것을 보면 먼 친척 즈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튼 이 혼인 잔치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독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사건인데,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는 첫번째 이적 사건을 여기에서 행하신 겁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출발로서 혼인이 성립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반드시 신랑과 신부, 특별히 신부가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누구를 만나고 헤어졌는지, 허물과 상처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모든 것이 덮어져야만 합니다. 자꾸만 이전의 이야기를 들춰내다보면, 실망을 하게 되고 결국은 파경을 맞기가 쉽습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서에서도 믿음에서 실패하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혼인’관계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지난 과거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면해야하는 현실이라는 것 조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루할 뿐입니다. 그들의 형편은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놀랍기만 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야곱아’라고 이름을 불러내셨는데,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신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겁니다. 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제 자신에게 조차 소박데기 취급을 받아야만 했던 그들이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는 신랑의 전적인 사랑이 있기에, 신부에게 혼인은 말 그대로 잔치일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기쁨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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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에서는 신랑과 신랑측 부모들이 부담이 되더라도 신부의 집에서 일주일 이상 ‘기쁨의 축제’를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혼인과 함께 딸을 떠나보내야하는 신부측 부모들과 정든 집을 떠나 새로운 삶에 인생을 맡겨야 하는 신부를 위로해주고, 또 한편으로 이 결혼이 얼마나 축복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잔치가 마쳐지고 나서야 신랑 신부는 들러리들과 함께 새로운 신혼집으로 가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혼인 잔치가 열리게 되면 신랑 신부 뿐만 아니라, 그곳에 함께 모인 하객들도 넘치는 기쁨과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잔치에는 일가 친척들과 친구들, 마을 사람들까지 가급적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루었다고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함 뿐만 아니라, 결국은 이들이 신랑 신부의 혼인이 잘 이루어졌다는 ‘증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를 채우는 기쁨의 상징이 바로 ‘포도주’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는 순간 잔치는 막을 내리고, 신랑 신부 뿐만 아니라 잔치에 참여했던 모두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이날 가나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잔치가 한창이던 차에 흥을 돋우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지고 만 겁니다. 축복받아야 할 혼인의 자리에 찬물을 끼얹는 형편입니다. 여튼 손님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던 탓에 포도주는 떨어졌고, 다시 사오기에 시간은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우리 삶도 꼭 이와 같아 보입니다. 본래 기쁨이 가득한 잔치여야 할 인생이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어진 것처럼, 결핍과 염려으로 인해 우울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인생에는 다만 ‘포도주’가 떨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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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도 잔치의 기쁨과 행복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칫 난감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지만,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인해 한번도 경험해 본적 없는 새로운 포도주의 향기로 잔치가 충만해졌습니다. 대체 갑작스레 어디에서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최상품의 포도주를 채울 수 있던 걸까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난감한 상황을 제일 먼저 예수님께 알린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은 하인들에게 물을 떠다가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그후에 다 채운 물을 가져다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끝입니다. 지금 부족한 것은 포도주인데, 그저 주변에 있는 물을 채우라는 말씀이 전부입니다. 도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 모르는 하인들이 명령대로 물을 떠다 가져다 주었는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물을 받아 마신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이전의 어떤 포도주보다 맛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분명 물을 떠다 주었으니, ‘물 맛이 좋다’라고 해야 정상인데 최고의 포도주를 맛보게 된 겁니다.
물 맛에 비밀이 있던 걸까요? 하인들이 그 물을 퍼온 것은 연회장 입구에 놓인 항아리에서 가져온 겁니다. 항아리속에 채워둔 물은 본래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하객들이 손과 발을 씻고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씻을 물'이었던 겁니다. 하객들이 다 씻고 나면 문 밖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수 밖에 없는 그런 물을 가져다 준 겁니다. 그런데 그 물이 잔치를 기쁨으로 채우고 바꾸어낸 포도주가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고, 버려질 것만 같은 인생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마주하게 되면, 이처럼 존귀한 삶,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가득’채우라고 하신 이유는 하인들의 믿음?을 채근하신다거나, 하인들이 믿음이 좋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이상 무엇을 채울 수 없을 만큼 물을 가득 채웠다’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좀더 가지게 되거나 바라는 무엇을 좀더 이루게 되면 행복해질 것처럼 말하는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기쁨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의 기쁨은 물에다 무언가를 더해서 마법처럼 덧씌우는 눈 속임이 아닌, 물 자체를 포도주로 변화시키듯 하늘의 은총으로 본질 자체를 덮어내는 근원적이고 충만한 기쁨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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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부족사태는 극적으로 해결되었지만,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던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언뜩 읽기에 ‘도와주기 싫다’는 귀찮아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덧붙이셨던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던 말씀 때문에, 뒤집어 읽어보면 당신의 때가 이르게 되면 그때는 ‘언제나’, 그리고 ‘기꺼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을 하시겠다는 의지로 들립니다. 아직은 때가 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던 거였고, 대체 무엇이 차지 않았다는 말씀일까요?
생각해보면 이적을 베푸시기 전에 이미 포도주를 마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기 전에 잔치에 와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잔치에서 제공했던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공하셨던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된 사람들은 아마도 포도주가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잔치에 참여할 수 밖에 없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이들은 대부분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않되는 일, 먹고 살기에 내몰려 잔치에 참여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할 일을 다 해놓을 수 있을 만큼 능력도 없을 뿐더러, 먹고 사는 것이 근심이 될 수 밖에 없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둘 만큼의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늘 이렇게 소외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설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언제나 예외 없이 품어줍니다. ‘아직 때가 차지 않았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싶으셨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직은 더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긍휼한 마음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물을 바꾸어 포도주로 먹이신 이 사건은, 곧장 ‘죄’에 짓눌려 죽음의 권세에 내몰려 있는 이들을 구원해내려고, 마침내 포도주보다 붉은 자신의 피를 흘려 모든 죄인을 덮어주셨던 ‘십자가’사건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수준을 뛰어넘어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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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물’은 세례와 같이 모세에게서 받은 율법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 즉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새 시대의 새 언약입니다. 요한이 혼인잔치에 등장한 ‘물’과 ‘포도주’를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말씀만 봐서는 물 떠온 하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지 혹은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하나님이 세우신 ‘새언약’이 되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제자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길가에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손씻은 물 같던 우리 인생과 삶이 신랑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신부’가 되었습니다. 의미없던 삶이 온통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쀼ㄹ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 이사야 62:4
‘헵시바’, ‘쁄라’ 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여인, 거룩한 신부라는 뜻입니다. 아픔과 상처와 허물을 덮어주고, 기쁨의 잔치로 초대해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천덕꾸러기가 존귀한 신부가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셨으니, 이전까지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품으며 살아왔는지, 혹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왔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부’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이미 모든 죄와 허물이 덮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찾아오시기만 하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죄인도 온전한 주님의 신부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변화는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도무지 ‘어떻게’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는 말씀처럼,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한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신부라고 하는 이 놀라운 신분을 감당해내고,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2독서 서신서에 따르면 바울은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예물을 신부에게 채워주심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을 받는 신부라는 징표로 삼아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신부가 되게 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사랑이 당신의 신부라는 존귀함을 지켜주실 겁니다. 이 선물을 바울은 저마다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같은 성령을 통해 받게 되는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표징입니다. 신랑의 사랑을 증거하는 이 징표가 있으니,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지칠지라도 다시는 이전처럼 ‘절망’이 우리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닐 수(고전 12:2)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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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물 동이의 물을 퍼다가 항아리에 가득 담으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사실 그닥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힘이 들 수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을 퍼다가 연회에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세우신 언약이나, 말씀, 복음이 돈이나 건강, 문제 해결같은 당면한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복음과 삶, 신앙과 삶을 분리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말씀을 제 자신의 삶으로 가져다 주는 일에 체념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서 버립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 만큼, 이런 삶이나 이런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말씀을 들여다보십시오. 천지의 창조가 ‘있으라’하셨던 말씀에 해도 달도, 땅도 바다도 순응했던 역사였듯, 물도 또한 주인의 말씀에 포도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 말씀에 우리가 응답해야할 차례입니다. 먼저 항아리에 물을 붓고, 새언약의 복음을 기쁨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으로, 또한 잔치가 멈추어진 세상을 향해 가져다 주어야만 합니다. 주님 말씀에 응답하는 그곳에 없는 것을 있음으로 불러내시는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마음과 인격 뿐만 아니라 삶도 변화시켜내실 것입니다.
주님이 물로 만들어 주셨던 포도주가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 맛있었던 것처럼, 지금 이후로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 빚어가실 삶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포도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을 통해 빚어질 최고의 포도주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우리 삶에도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가 이르게 되엇을 때 우리는 물 떠온 하인들이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았던 것처럼 또한 이 모든 일이 ‘주님께서 이루신 것’임을 넉넉히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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