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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2/06 주현후 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2. 2. 20:58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6:1~8, (9~13)
    •   응송 | 시편 138
    • 2독서 | 고린도전서 15:1~11
    • 3독서 | 누가복음 5:1~11

     

    설교음원

    http://naver.me/I5obZpkU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jl1Hf6UqOK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Raffaello Sanzio_ <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 1515-1516

    예수께서 보시니......

     

    1

    요즘은 너무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터라 눈을 감아도 자꾸만 소란스런 잔상들이 마음을 채우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 것이 본래 내 마음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피로해지곤 합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늘 무언가를 보고 있다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우리 자신도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시는지요?

    오늘 성서일과 본문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고 있는 이사야와 복음을 외치고 있는 바울,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이들과 베드로앞에 서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입장과 눈높이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시니’라고 하는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기에 서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실은 성전에 오른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를 찾아왔고, 해안가를 헤매이던 사람들을 주님이 보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2

    늘 들락이던 성전이었고 성전이야 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집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 이사야는 몸이 굳어질 만큼 당혹스럽습니다. 이렇게 느닷없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지 몰랐던 탓입니다. 막상 하나님을 직접 뵙고 보니 반가움보다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압도적인 임재앞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그의 외침은 말 그대로, ‘이제 죽는가 보다’ 싶은 절규였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하게 하셨고, 그 이후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문이 트입니다. 

     

    나를 보내주소서!’ 

     

    말씀을 전할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는 의욕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런데 기특하기만 해보이는 그의 서원에 비해 하나님의 답변은 생뚱 맞기 그지 없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 백성들이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땅이 황무지가 되고, 백성들은 모두 버려질 때까지 그런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시려는 이유는 다 망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그 땅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들,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돌이킬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루터기처럼 남겨질 백성들이 그들입니다. 이유가 그뿐만은 아닙니다. 네가 가서 전해도 결국 그들이 돌이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결과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초보 예언자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시려는 위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이렇다 내세울 만한 결실 없는 목회의 자리가 부끄러운 목사에게도 위로가 되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경험하게 되면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으로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경험입니다.

     

    신들 앞에서, 내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 시편 138:1b 

     

    응송에서 만나는 시편기자의 찬양이나, 서신서에 기록된 바울 자신의 고백도 주님을 만나는 이런 경험을 핵심으로 합니다. 시편 기자가 그 동안 끊임없이 삶을 지배하려고 하던 수 많은 우상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고 한껏 힘주셨던 하나님 경험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신자들을 박해하던 불신앙의 대명사였던 자신이 오늘 사도로서 설 수 있게 된 것은, 결핍한 생명을 채워주시고 (8), 자신을 전도자와 사도로 세워주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주님만 모든 것을 바꾸어내실 수 있습니다.

     

    3

    오늘 말씀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는 ‘바닷가’입니다. ‘회당’에 비해 ‘바닷가’는 말씀을 가르치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주님은 아랑곳하시지 않고 이곳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날카로운 바닷바람 가득한 그곳에도 '남아있는 그루터기'처럼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 하나님 말씀을 찾는 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 누가복음 5:2

     

    본문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계셨습니다. 밤새 허탕을 치고 그물을 정리하던 모습을 멀찌감치에 서서 보고 계셨던 겁니다. 대체 무얼 보고 계셨을까요?

    베드로는 바닷가에서 자라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입니다. 고기잡는 일로 가정도 일구고 부모님도, 처도 부양해왔습니다. 그러니 그의 삶을 유지하고, 지켜내고, 일구는 근거는 전적으로 제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그 능력이 절망의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닷 바람과 함께 하던 지난 수십년의 경험이 무능과 무력함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고기잡이를 끝내고 뭍으로 올라선 그의 힘없는 걸음은 성전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기 직전의 이사야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수 없이 많은 날 올랐던 성전인데, 유독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던 그 때를 성서기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유다를 개혁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낼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라면 그 일을 이뤄낼 것이라 믿었었는데, 그가 허무하게 죽고 말았으니, 이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모든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던 모든 것이 절망으로 바뀌었으니 그 걸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순간은 이처럼 내가 의지하고 믿던 것들이 깨지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기 무능앞에 설 때 뿐입니다.

     

    4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은 그를 ‘깊은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곳은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하다 등지고 돌아온 곳입니다. 뱃사람으로서의 잔뼈가 굵은 그의 경험은 그의 삶과 인생을 지탱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삶을 기대기 위해 믿고 있던 모든 근거가 자신안에 있던 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실패만 경험했던 그곳을 향해 다시 보내신 겁니다. 

    핑계를 대며 싫은 내색을 하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응답합니다. 주님의 말씀앞에서 단단히 뭉쳐있던 자신의 아집과 고집을 포기한 겁니다. 제게 익숙한 영역에서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베드로의 응답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처럼 쉽지 않은 결정을 하게 만들었던 동기에는 역시나 ‘말씀’ 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 누가복음 5:3

     

    아마 베드로도 그때 자신의 배 위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 주님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었을 겁니다. 몰려든 무리들을 향해 전해주시던 주님의 말씀은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참으로 새로운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록 패배감과 실패감에 짓눌려 차갑게 식어있던 그의 마음이 녹아집니다. 그 후에, ‘깊은 곳으로 가라’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초대로 들리게 된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자 주변에 머물던 동료들의 배까지 동원해야 겨우 실을 만큼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 베드로에게 만큼은 놀랍기 그지 없는 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토록 바라던 물고기를 가득 잡고 난 이후 주님을 향한 그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거나, ‘대단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며 동업해주시면, 그 돈으로 선교도 하고 주님의 일에 후원도 하겠습니다’ 정도가 현실적일 텐데, 그는 전혀 뜬금없는 고백을 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 누가복음 5:8

     

    이제야 무능한 자기 자신과 너무나 다른 분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제 아무리 큰 소리치고 살던 사람도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접하고, 말씀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의 작음과 초라함을 직면하게 됩니다. 마치 백척간두에 올라보면 그 동안 온갖 시름에 내몰리던 구름 밑 세상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던 경험과 같습니다. 왜 그런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다투기까지 했는지 자기 스스로가 이해가 되질 않게 됩니다. 

    이제야 부대끼고, 체이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염려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만 있다면 이런 삶이 아니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런 모습이 아니라 저렇게 살아도 괜찮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에서 시급하게 회복해야할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대상으로 경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냈으니, ‘다시는 죄짓지 마라’ 질책을 하거나 따끔하게 책망을 해도 좋을 법한데, 우리 생각과 달리 주님은 ‘두려워하지 마라’며 그를 위로해 주십니다. 애당초 주님이 그를 찾으신 이유는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따듯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위로받을 수 없는 이가 위로를 받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이가 용서를 얻으며, 사랑받을 수 없는 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 받고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주님 앞에서 뿐입니다.

     

    5

    지금 인생에서, 직업에서 혹은 맡고 있는 일에서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우리가 향해야 할 영혼의 지향점인 ‘깊은 곳’은 어디입니까?

    지난 주일 복음서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떠나 ‘오롯이 자신의 길을 향해 가셨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했는데, 오늘 본문의 결말도 비슷합니다. 주님을 만난 베드로 일행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뒤를 따랐다’(11)는 것이 결말입니다. 이제야 주님으로 인해, 그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삶의 모습입니다. 제자는 뭔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오히려 버리고 빼는 삶에 익숙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나 베드로, 바울 모두 무방비 상태에서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해 이사야가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나섰고, 베드로와 동료들은 소명을 받고 제자의 길로 나섰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준비가 잘되어 있거나 그럴 듯한 모습이 되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까? 불완전하고, 흔들리던 모습이 발견되던 곳, 버성기며 살아가고 있는 오늘!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이야 말로 원망과 불평의 시간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때임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 따듯한 시선과 마주칠 때, 비로서 우리는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에 응답하는 제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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