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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3/13 사순절 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3. 9. 11:33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창세기 15:1-12, 17-18
    •   응송 | 시편 27
    • 2독서 | 빌립보서 3:17-4:1
    • 3독서 | 누가복음 13:31-35

     

    설교음원

    http://naver.me/5bRnPsk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D0w0hv1IWi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주신, '하느님'

     

    1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보지 못하거나, 혹은 한계탓에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여기에 의문을 달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우리는 늘 ‘오늘’만 살아갈 뿐, ‘내일’은 볼 수도 없고 손에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장 눈앞에 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짓 곤 합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존재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려들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누군가 ‘그렇더라’고 전해주는 말을 철썩 같이 믿어 버리곤 합니다. 제 힘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스스로의 선입견에 사로잡힌 탓에 아무리 사실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믿을 만 한가?’라고 하는 그 대상 자체의 타당성에 달려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보다도 보고 싶어하거나, 보지 않으려는 제 자신의 의지나 태도에 휘둘리곤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2

    ‘믿음’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아브라함일 겁니다. 오늘 구약 1독서 본문이 바로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던 네 명의 왕이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모든 재산과 조카 롯 조차도 끌려가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사병 318명을 이끌고 그 뒤를 좇아갔습니다. 빼앗겼던 재물들 뿐만 아니라 롯을 구출하고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돌아오던 그를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 창 15:1b

     

    객관적으로 보면, 그들은 부족국가의 왕들이지만 아브라함은 일개 개인일 뿐입니다. 운좋게 이번에는 승리했지만 언제 다시 그들이 보복하기 위해 뒤를 쫓아 올른지 모를 일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어느새 아브라함의 마음은 온통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것이 바로, 이처럼 형편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원하여 그의 방패가 되어주실터이니 염려하지 마라는 위로를 전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 창 15:2b

     

    그의 물음은 하나님의 친절함과 호의와는 구색이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거나 내일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눈에 보이는 칼이나 말, 병사들이 더 힘이 되고 실효성이 있으니 그것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상이나 약속이 공허하게 들렸다는 겁니다. 우리네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복을 약속으로 받았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복’이 뜬 구름 같고, 허무하다고 여겨, 내가 바라는 바 혹은 원했던 그것을 얻을 때까지 자꾸만 ‘무엇인가’를 달라고 때를 쓰고 조르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는 것이 우리입니다.

     

    3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필요없고, 자신이 바라던 ‘그것’만을 자신의 구원으로 믿고 있던 겁니다. 호의로 건내는 선물은 반드시 선물을 주는 이와의 사귐이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누구라도 선물만 주면 좋다는 꼴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를 하나님보다 우선시 하는 완고함이 하나님을 구원으로 ‘믿는 것’을 가로막는 겁니다.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주장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 창 15:3a

     

    자신의 아내 사래를 통해 하늘의 뭇 별들처럼 바다의 모래알 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신의 상속자를 결정하고 확정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좋은대로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자녀로 삼겠다는 겁니다. ‘엘리에셀’의 이름 뜻은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는 제 뜻대로 살겠다고 잔뜩 불퉁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라고 그를 따르는 척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과 행동, 말과 삶은 불일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고 있는 셈이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서 밤 하늘을 올려다 보게 하셨습니다. 그 날따라 별들이 하늘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자신이 올려다보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크심 앞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뭇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니 곧장 ‘아멘’이라고 응답했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도 그닥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앞에서 그는 또다시 이전의 믿음 없는 모습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창 15:8b

     

    확실한 보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4

    이쯤되면 역정을 내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제물을 준비해 두라는 요구만 하실 뿐입니다. 믿음없어 불안한 그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 타오르는 횃불(하나님의 불)이 아브라함이 준비해둔 쪼개 놓은 희생제물의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쪼개어진 희생 제물의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면 이런 제물처럼 죽어도 좋다는 계약을 보증하기 위한 고대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께서 ‘너와 맺은 이 언약을 지켜내시지 못한다면 이렇게 죽을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개 인간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숨을 걸려면 반대 급부도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계약의 보증이라면 아브라함도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이었고, 약속을 지켜내시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약속의 확실성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은 믿을 만 하신가?’ 라는 사실만이 이 약속의 확실성을 담보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이야 말로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주실 만큼 ‘믿을 만한 분’이라는 이 사실만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게 된 이들에게만 주님의 언약은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지난 주에도 설교시간에 언급했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증거나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꾸만 표징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믿을 만 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 자신의 앎이 믿음을 싹틔울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일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애당초 단어의 뜻이나 정의가 아닌, 살아내는 방식이나 지향을 드러내는 것이 ‘믿음’의 본래적 의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믿음인 겁니다. 내게 주신 말씀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약속일지라도 목숨이라도 걸어주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입바른 고백이 아무리 넘쳐나도, ‘주님 따로 나 따로, 신앙따로 삶 따로’인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는 못살겠다는 ‘믿음없음’일 뿐입니다.

     

    5

    서신서는 비록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지만, 빌립보 교회 교우들에게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겸손한 척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라’면서 은근 슬쩍 피해가려는 우리네와 다른 그의 당당한 신앙의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말뿐이 아니라, 바울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지난 변모 주일에 읽었던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라고 오롯이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바울의 신뢰의 대상은 오직 주님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생각이나 기대, 바라는 것들처럼 ‘자신의 배’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탓에 정작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아의 두터움을 깨어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제발 자신을 본받아 주님만을 믿으며 살아보자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하늘의 시민이 아니겠느냐는 바울의 외침은, 오늘 이 아침 우리 자신은 어떤 나라에 속해 있는지를 고백해 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앞에 무너지고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숨어서 때를 기다리려했던 악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악마는 오늘도 끊임없이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탐욕과 욕망의 옷을 입으라고 우리를 기만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아를 추구하며 살라고 속삭일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했듯 삶의 문제를 가지고 두려움이나 염려, 걱정으로 우리 마음을 짓눌러 올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 될른지나, 형편이나 상황은 나아질 것인지, 혹은 내가 과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것 인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아닌 ‘나'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긴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결국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떨어지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그럴때마다 우리가 기대야할 것은 오직 ‘과연 주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가?’라는 물음에 대한 말씀의 약속, 그 약속의 성취이신 그리스도 뿐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묵묵히 걸어갔던 아브라함이나, 전도자로 부름을 받고 희망의 길을 앞서 걸어갔던 사도 바울, 그리고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는 그 길 끝까지 ‘나는 내 길을 가겠다’며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또한 누구랑 하신 약속인지와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는 목숨 걸고 지켜내실 분이라는 사실을 근거삼아, 말씀의 모든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모두가 절망하는 순간을 희망의 날로 열어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이 약속을 지켜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는 죽음을 결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어기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살려내시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켜 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는 피흘리까지 약속을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불법과 불의함, 어둠과 죽음의 힘이 또는 불신앙이 불쑥 불쑥 고개를 들때면, 그 옛날 하나님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던 밤 하늘에 빛나는 뭇 별을 올려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별들만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별들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셨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도 보고 계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의지는 무엇으로도 가로막힐 수 없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던 주님을 따르는 길 뿐입니다. 그 길을 따라 비틀거리는 발이라도 붙들고 힘껏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바울의 권면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 빌리보서 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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