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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0 사순절 제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3. 15. 15:51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55:1-9
- 응송 | 시편 63:1-8
- 2독서 | 고린도전서 10:1-13
- 3독서 | 누가복음 13:1-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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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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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라도 다를 바 없다
1.
원하든 원치 않든 인생에는 다양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오죽하면 인생이란 시험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힘든 시험을 통과하고 계시는 분들을 뵐 때의 마음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도록 무엇을 해주거나 어떤 말이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목사의 직임’이 가져다 주는 부담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늘 서신서의 바울이 말했던 바처럼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이상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라고, 그러니 힘을 내보라고 북돋워주는 것만으로도 좋겠지만, 눈물을 삼키고 홀로 아픔을 견뎌내고 있는 누군가의 앞에 설때마다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구하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서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고난을 씩씩하게 헤쳐가고 있는 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느닷없이 찾아온 고난이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겁니다. 만일 자신의 수고함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라면 조급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들 보다 조금 늦어지거나, 조금 더 수고하면 됩니다. 그리고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면 사로잡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요?
2.
두 토막으로 이루어진 오늘 복음서의 첫단락은 끔찍한 사고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성전 안뜰에서 희생제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이 총독 빌라도가 보낸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겁니다. 희생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은 특히나 로마와 기득권자들에 의해 삶이 온통 유린당하고 착취당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실재로 갈릴리 주변에서 자주 로마에 대한 항거나 투쟁이 일어났었고, 무력 독립운동을 주동하던 열혈당의 본거지도 그곳이었습니다. 여튼 유월절 처럼 갈릴리 사람들을 포함해 대규모의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몰릴 때면, 로마 총독 빌라도 입장에서는 여간 골칫 거리가 아니었을 겁니다. 온통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날, 갈릴리 사람들중에 위험인물들이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전해졌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빌라도는 아랑곳없이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는 성전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을 들여보냈고,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했습니다. 그 난리 가운데 요행히도 목숨을 부지한 누군가가 지금 예수님께 일련의 사정을 전하러 나아왔습니다. 대체 왜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이런 참극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인지 답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를 직면하게 될 때면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찾아왔는지를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해석을 내놓기에 바쁩니다. 대부분 ‘무엇 때문에’라고 하는 인과론이거나, ‘무엇을 위해’라고 하는 목적론적 견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 신명기 28:15
신명기에 담겨있는 인과응보적 신앙관은 모든 고난은 중한 죄를 지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에 갇히게 되면,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사고를 당한 이들을 보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짓고 정죄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해석에 길들여지게 되면 과거로 인해 현재의 삶이 결정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현재의 불행한 삶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과 수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마져도 모두 의미를 잃고 맙니다. 게다가 이런 해석은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하나님 앞에서도 죄인으로 내몰아 두번 죽이는 폭력이 될 뿐입니다. 목적론 적인 해석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무턱대고 ‘하나님의 계획’이나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무심한 위로는, 누군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시간이나 생명을 도구화시키는 악마같은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말 뿐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향해 여러분은 어떤식으로 그 고통의 현실을 해석해 줄 수 있겠습니까?
3.
삶에 찾아온 이 비극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른지 알 수 없어, 참담했던 사람들이 모두 주님의 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 누가복음 13:1~2
사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인과응보’ 신앙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저들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에 쉽게 사로잡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 마음안에는 ‘나’에게서 죽음이 피해갔음을 ‘복’으로 여기는 천박함이 숨어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곤 희생당한 이들이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캐물으셨던 겁니다.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무조건 ‘무죄’하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도’라는 말씀을 통해, 늘 스스로의 신앙이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자하는 민낯을 돌아보게 하시려고, 그들의 스스로를 향하도록 시선을 옮기고 계신 겁니다. 끊임없이 타인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우리의 반응속에는, 저 만치 떨어져 ‘나는 그들과 관계 없다’는 ‘거리감의 안전’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입니다’라거나 ‘이 사람은 숨은 죄가 있습니다’라는 수군거림을 통해,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드러내려는 겁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는 말씀은 이기적인 우리를 향한 ‘너도 다를 바 없다’는 꾸짖음인 겁니다.
4.
희생당한 사람들이 ‘죄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일’로 여기는데 익숙한 우리의 지향을 ‘너와도 상관이 있다’는 관계안으로 끌고 가십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내 문제가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여깁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와도 상관’있는 문제, 언제라도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쟁, 기근,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이나 사고처럼 낯설기만 한 두려움의 시간들이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고,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함’ 시간이니,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은 채, 훌훌 털고 일어서 가야할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어지는 두번째 단락은 포도원 주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한그루 심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도원에 심었다는 겁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와 달리, 유대땅에서 너무나 흔해서 큰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는 나무입니다. 1년이면 네 다섯 차례나 열매를 맺는 풍성함이 오히려 흔함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성들여 가꾼 포도원에 심기에는 과분한 나무입니다. 거기다 열매까지 맺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나무는 당장 잘라버리는 것이 땅을 낭비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무려 세 해나 열매를 얻을까 기다려왔다고 합니다. 한해에 네 다섯번은 열매를 맺었어야 할 나무를 세 해나 기다려준 주인의 너그러움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인의 인내와 기다림은 더욱 놀랍습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일 나무를 심을 경우에 그 열매를 사람으로 치면 갓난아기의 포경처럼 여겨야 한다. 삼 년 동안을 할례 받지 아니한 갓난아기의 포경처럼 여겨 따먹지 마라. 넷째 해에 열린 과일은 모두 거룩한 것이므로 야훼에게 축제물로 바쳐야 하며 다섯째 해부터 열리는 과일은 따먹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너희가 과일을 더 많이 거두게 되리라.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 레위기 19:23-25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삶을 규율하던 율법에 따르면 나무를 심고 5년이 지난 때부터 열매를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포도원주인은 어림 잡아도 최소한 8년 이상이나 무화과나무가 열매맺기를 기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러나 주인의 인내에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이제는 그만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이제 이 나무의 운명은 끝이 났다 싶은 그때 포도원지기가 주인을 막아섭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 누가복음 13:8b
포도원 지기는 기꺼이 자신이 공을 들이고 가꿀테니 한 해만 더 유보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포도나무라면 몰라도, 8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내년이라고 나아질리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기다려준다는 기다려준다는 것은 말이 않됩니다. 곁에서 말씀을 듣던 사람들 모두 ‘세상에 그럴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며 말도 되지 않는 말씀에 ‘비아냥’ 거렸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실재로 우리 사회는 능력이 없어보이고, 경쟁에 뒤쳐지는 쓸모 없다 여겨지는 사람을 두번 기회 없이 내칩니다.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못한 사람을 귀히 여기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 비교되는 것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얼마전 대선 기간, 모 후보가 거론하면서 2, 3억이면 아파트 한채를 살 수 있다고 특정 지역을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분노해서 머릿띠를 하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들보다 못한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이고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부끄러운 우리 민낯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럴리 없다고 생가하고 마는 일이, 그 나라에서는 일어납니다. 모두에게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여겨질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왔던 모습을 돌아보면 나아질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들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꿈을 꾸는 포도원주인과 포도원지기의 나라입니다.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 무화과나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6.
자기 자신이 무화과나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이나, 주인을 가로막은 포도원지기가 보여준 ‘자비와 기다림’은 은혜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은혜가 공감되지 않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제 스스로를 포도나무나 올리브 나무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가 있고 유익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애를 씁니다. 무가치하거나 무익하다 싶으면 스스로에게는 좌절하고 타자를 향해서는 정죄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나무일까요? 지금 이 시간은 스스로가 잘해서가 아니라,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말씀하신 1년의 유예기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판과 은혜의 갈림에 서있던 무화과나무처럼, 우리의 운명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비를 거두지 않고 기다림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살아온 시간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런 오만함에도 여전히 오랜 기다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살아냄이나 열매맺음은 내게 달려있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뉴스에서 전쟁으로 인해 탈출하는 이들을 거슬러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전해집니다. 전쟁으로 인한 불행과 관계 없이 이미 안전한 곳에 터를 잡고 있었으니 자신은 안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뻔히 죽음이 기다리는 길을 향해 돌아가는 걸까요? ‘나’와는 관계 없는 일로 여기는 이들의 현실적인 물음에, 그들의 답변은 언제나 명확합니다. 내 조국이고, 내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음에 내어지고 깨지고 상해 몸부림치며 살아가야하는 삶,
늘 똑같은 실수와 반복되는 허물로 얼룩져있는 지난 시간들,
복음을 접하게 된지가 몇해인데 여전히 성령의 열매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나와는 관계 없고, 내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 외면하신다고 해도 탓할 자격이 없건만,
기꺼이 우리 모든 삶이 자신에게 상관있다 하시며, ‘네 운명이 내 운명’이라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말로 그치지 않고, 주님은 너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전적인 은혜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누구라도 그리하지 않을 일’을 행하신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들이 다 이런 겁니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 이사야 55:6
사순절은 '누구도 그리하지 않을' 사랑과 희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초대야말로, 나를 향한 부르심으로 듣고 응답해 가는 길입니다. 아멘.'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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