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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7 부활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4. 13. 12:08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65:17-25
- 응송 | 시편 118:1-2, 14-24
- 2독서 | 사도행전 10:34-43
- 3독서 | 요한복음 20:1-1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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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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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부활'
1.
며칠 여름처럼 따듯하다 싶었는데 한순간에 벌겋게 올라오던 벚나무의 꽃망울들이 팝콘 터지듯 흐드러지게 피어버렸습니다. 이에 뒤질새라 개나리나 이름 나무들도 저 나름의 꽃을 피워내려고 봄이 가기 전에 부지런을 떨고 있습니다. 생명을 일구어내려는 열심이 흐뭇합니다. 사순절기를 어찌 보낼까?싶었는데, 이처럼 생명이 역동하는 ‘부활절’아침을 함께 맞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죽어 말라버린 나무 같았는데 이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꽃들이, 오늘 아침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부활’의 약속으로 심어 놓으신 선물처럼 보입니다. 모쪼록 이 아침,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죽음 조차 몰아내는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이 쫓겨지기를, 또한 ‘반드시 다시 살려내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는 가슴벅찬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2.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더욱 간절한 것은, 늘 ‘지금’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1독서 본문 이사야서안에는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이 빚어내실 내일입니다. 하지만 희망의 빛이 강렬할 수록 오히려 현실의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해야하는 현실은 곳곳에 울부짖는 울음이 끊이지 않고, 태어난지 몇날이 지나지 않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은 제게 주어진 생명을 그저 온전하게 누려보려는 소박한 꿈마져 짓밝힌 채 희생당하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수고하며 심어도 손에 잡히는 것은 허무와 결핍과 상실감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삶을 덮쳐오는 가혹한 재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총체적으로 불운한 삶,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찬란한 내일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서러운 모욕과 치욕의 눈물이 그치기만 해도 좋겠다 싶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라 외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날’에 대한 말씀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 처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찰만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별 기대없이 상투성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 동안 우리의 기대라는 것들이 늘 혆실안에서 배신당해 온 탓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혹은 저렇게만 하면 복지도 좋아지고, 정의가 실현되며, 억울함이 씻겨지는 세상이 될거라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면 모두가 잘 살 것이라는 소리에 허리띠를 졸라메며 살아왔지만, 결국 이루어진 천국은 자신만 소외된 특별한 이들만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다보니 ‘내일’에 대한 약속은 늘 막연하고 헛되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전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수준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되어도 터무니 없다는 실망과 불신이 먼저 고개를 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침 우리는 ‘부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메시지앞에 서있습니다.
3.
오늘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무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스올’이나 ‘음부’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경건한 자인지 악인인지와 관계 없이 모든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이처럼 죽음만이 음침하게 내려앉은 무덤에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굳게 막아섰던 무덤입구의 돌문이 치워져있고, 분명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당혹스러운 상황입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무덤 주변에서 주님을 찾고 있던 마리아에게 말을 건네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명은 천사였고, 다른 한명은 무덤안에 있어야할 주님 자신입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던진 말은 ‘왜 우느냐?’, ‘대체 누구를 찾고 있는거냐?’는 겁니다.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려는 그녀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는 투의 말입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주님을 찾아야 하고, 등뒤에 덩그러니 비어있는 무덤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걸까요? 우선 고민을 멈추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머물고 있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들이 머무는 ‘무덤’에 있는 것이 더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이런 당혹감이나 낯설음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겁니다. 설교 첫머리에 읽은 이사야서 말씀안에 유독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입니다. 본래 ‘창조’란 이전의 어떤 것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수준이 아닌, ‘없음이 있음’이 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개벽의 사건입니다. 어제와는 결별하는 내일은 하늘이 열리는 수준의 사건인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빚어내실 ‘창조’의 내일을 결코 엿볼 수도 없고, 더더욱 경험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부활’이 이와 같습니다. 이전까지 볼 수도 경험할 수 도 없던 하나님만이 이루어내실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기 때문에, 부활은 늘 낯설고 어려울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4.
주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울먹이던 마리아처럼 우리는 빈무덤앞에 설 때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어디에서 찾을수 있을까의 고민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직면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려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누가복음 20:38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살아있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으로 발견된다는 의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통해 바람이 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심은 하나님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빈 무덤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 입니다. 주님은 살아있는 사람들 곁을 찾아오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도 서신서 선택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분명히 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 고전 15:13
우리의 믿음 여부에 따라 주님이 부활하실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죽어있는 이들이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만, 오늘도 예수께서 살아있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빈 무덤앞에서 우리는 먼저 답을 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습니까?’
5.
부활의 이 아침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천년전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물음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 그를 따라 내가 짊어진 ‘십자가’가 되어야 하듯, 예수 부활로부터 시작된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바로 ‘우리 안에서부터' 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뒤에 주님이 서 계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른 새벽이라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한 것 뿐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떠나가시는 주님이 안타깝다고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어드렸을 만큼 주님을 사랑했던 그녀가 주님을 몰라봤을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만 하는 것처럼, 오히려 ‘부활’은 눈을 뚫고 마음으로 들어온 생명이 느껴지는 사건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우리와 주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15절에서는 주님을 찾고 있던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의 시신을 잃었다는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녀를 두번째 부르실 때는 ‘마리아’라고 이름을 직접 불러주셨습니다. 주님께 특별한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게 된 순간입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의 귀가 열렸고, 눈에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불러주실 분은 한분 뿐입니다. 이분이야 말로 사람들을 가로막고 책망이나 비난으로부터 늘 자신을 지켜주셨던 주님이라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겨났던 그 비통한 절망의 상태가 주님께서 불러주실 때, 충만한 기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도 ‘랍오니’라고 주님을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선생이나 스승을 지칭하는 ‘랍비’에 비해 무척 개인적이고 친밀한 호칭입니다. 마리아가 다시금 이전의 주님과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색하신 주님은 ‘아직은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며 마리아의 손을 뿌리치셨습니다.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늘로 오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셔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일순간 마리아는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더 이상 이전에 알고 있던 친밀함의 대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겁니다.
6.
사도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비로서 차별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사도행전 10:35
이전까지 유대인으로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살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의 새로운 믿음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들의 야만과 폭력, 불의함은 하나님의 아들조차 십자가에 매달고도 득의 양양 했었지만, 하나님은 결코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의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불법과 폭력에 짓눌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을 외면하시지 않으신 하나님의 역사개입 사건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이나 사람들에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홀로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처럼 죄의 권세 아래에 눌린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구원해내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건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라도, 또한 어떤 죄와 비극의 구덩이에서도 용서를 받고, 무덤에서 일으켜지듯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독점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에게 나라와 민족과 방언과 어떤 차이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앞에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힘있는 이들, 으스대는 이들 눈에 들려고 비굴해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법한 세상이라면 당당히 꾸짖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 시편 118:16~1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그리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잇대어 있는 우리 중에 누구라도 죽음에 내어주시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은 살아있는 당신의 백성을 지켜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비록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탐욕과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의 가르침에 빠르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길에 익숙한 이들을, 성경은 ‘죽은 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제 아무리 화려한 궁궐에 터잡고 있더라도 음습한 무덤일 뿐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부터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심중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정신과 얼을 날카롭게 벼리되, 사랑과 인애와 자비를 흘려보내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 보지 않고도 예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기에 영혼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용기를 내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실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을 발견해 내시고, 기꺼이 그들의 곁에 거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더 이상 헛된 증거를 구하며 예수의 빈 무덤을 기웃거리는 세상 사람들을 따르지 마십시오. 죽은 이들의 주검만 뒹구는 무덤에 우리의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깊은 호흡안에 성령을 들이마시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이 무어라하든 예수의 부활과,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하나님께 이어져 살아가십시오. 할 수 있는대로 살아있는 이들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곁에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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