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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0 성령강림후 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7. 5. 22:26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아모스 7:7-17
응송 | 시편 82
2독서 | 골로새서 1:1-14
3독서 | 누가복음 10:25-37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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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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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성서일과는 구약 1독서, 응송인 시편, 2독서인 서신서와 3독서 복음서로 구성됩니다. 1독서인 구약본문은 복음서의 배경으로 주어지는 본문이고, 구약 본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시편’응송입니다. 그렇다면 서신서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복음서 본문에 대한 오늘 교회의 응답과 결단을 촉구하는 본문으로 주어지는 것이 ‘서신서’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드리는 까닭은 오늘 말씀을 서신서로부터 시작하려는 탓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안에서 구속함을 얻었으니(1:14),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골로새 교우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런 말씀에 응답하며 살았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더듬어가는 것이 오늘 말씀 공부의 목적입니다.
# 2독서 _ 믿음인가? 행함인가?
골로새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할례와 금욕, 천사숭배까지 강조하던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목숨바쳐 세워주신 복음안에서 성도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바울의 귀까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더불어 교우들 서로가 사랑안에 하나 되었다는 흐뭇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얻게 되는 복음이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 바울은 끝까지 참고 견디며 살아가라고 축복해줍니다. (6, 11) 믿음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실천적 삶을 요구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그 동안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던 바울의 가르침과는 무언가 조금 어색하게 보입니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누가 무어라해도 사람으로부터 비롯하는 모든 구원의 시도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의 신학은 행함과 실천에 대하여 말하는 야고보와 갈등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과연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까? 행함으로 얻는 겁니까?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바울은 오늘 왜 이렇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걸까요?
# 3독서 복음 _ 사마리아인의 비유
복음서 말씀에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한 토막이 소개됩니다. 실재의 사건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둘 간의 대화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가?’라는 그의 물음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답변 대신에 오히려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는 곧장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인용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답으로 제시했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의 정수로 불리울 만큼의 모범답안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뜬금없이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더 묻습니다. 누가는 그 속셈이 ‘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정작 먼저 물었어야 했던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여야 했지만, 그는 대뜸 ‘이웃’에 관한 질문만을 던졌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다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의 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과 친구가 되거나 이웃을 삼는지를 떠올려 보시면 답하기가 쉬울 겁니다. 율법교사의 이웃이라고 한다면 분명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 그와 비슷한 성향, 직업, 계층, 수준의 사람들일테고, 그 또한 이웃되고 싶어하는 이들일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나아 보이는 이들과 친구나 이웃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성서공회 해설’에 따르면,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치, 종교적 ‘동지’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비유의 말씀안에서 율법학자의 이웃이라 할 만한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도 못 본체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율법학자의 마음은 몹시 불편했을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율법교사인 너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날카로운 비난처럼 들렸을테니까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주님께 이 질문을 던졌던 것은, 제가 섬겨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율법학자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 자신과 무리를 짓고 있던 이들이 바로 ‘네 이웃’이라고 말씀해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동안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켜왔음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율법를 가르치는 교사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부담과 부끄러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 정의하고 있는 ‘이웃’에 동지와 동료, 친구와 같이 가까운 대상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 장애인, 그 땅에 기대어 살아가야만 하는 외국인들과 나그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율법교사였던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자신의 동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 이상을 사랑해 본적이 없습니다. 경건과 거룩에 힘써왔던 터라,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씀앞에서는 비교적 당당했지만, ‘이읏사랑’이라는 말씀 앞에만 서면 슬쩍 한 걸음 물러설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 이런 마음의 부담으로부터 면죄부를 얻으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님이 전하신 비유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겁니다. 마음이 편할리가 없습니다.
# 오늘 우리는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불편해 할 사람은 율법학자 외에도 또 있습니다. 아마도 이 비유의 말씀을 전해 듣던 누가 공동체의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이를 지나쳤다는 대목에서 모두들 위선적 종교인들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속으로 강도만난 이를 치료해 주는 선한 역할로 등장할 것은 역시나 자신들 같은 평범한 유대인들 뿐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했던 선한 이웃은 그들이 그렇게 천대하고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는 강도만나 피흘리는 이를 돕는 것이 부정한 일이었지만,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사람’이야 말로 부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들 자신도 피해 지나쳐가는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제야 주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향해서도, ‘너희도 똑같다’고 꾸짖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던 이들이 하나 둘, 조용히 떠나 갔을까요?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지난 날 말씀대로 행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 좋은 대로 나와 같은 사람, 내 편인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 내게 유익이 될 만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는 그 안에서 율법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했다고 으스대려고 했던 겁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모두 낯설은 이들을 경계합니다. 익숙한 것에 편해하듯 내게 익숙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편할 뿐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라는 말을 보호막 삼고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담장 너머로 밀쳐내는 겁니다. 여튼 우리의 사랑이 이렇게 이기적인 수준안에 있다는 것이 들키고 보니, 더 이상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만난 이를 왜 도와주지 않았는가 비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돕지 않았던 ‘강도만난 이웃’을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그리고 왜? 도와줄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 누가복음 10:33~34
주님은 그가 걸음을 멈추어 세우고 강도만난 이를 끌어안고 돌볼 수 있었던 이유가,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가엾게 여기는 마음,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 곧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배우고자 했던 주님의 마음이 이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도 또한 이 마음을 키워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핀잔과, ‘나는 너와 다르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오만함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없었기에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소년 소녀 가장들, 냉혹한 세상에 의해 벼랑끝에 내몰린 강도만난 이들을 지나쳤던 겁니다. 율법이 가로막은 ‘부정함’이라는 높은 담벼락도 그렇게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딛는 걸음은 막아서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십자가를 가로지르는 예수님의 걸음을 가로막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교회는 부끄러워야 합니다. 부끄러워 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1독서 _ 다림줄이 드리워졌습니다
사람취급도 하지 않을 만큼 혐오하던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되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발을 당했으니 율법교사는 엄청난 모욕감으로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했을 겁니다. ‘누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도 그는 차마 ‘사마리아인’이라 답하지 못한 채, 비겁하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끝까지 저 사람 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옹졸한 마음, 여전히 제 기준을 포기하지 못한 탓입니다. 제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들으려는 습관은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쯤’이라던가, ‘이 정도면'이라는 자기 합리화의 구실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주의, 자아숭배의 습성이 여지 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1독서 아모스에게 주셨던 환상과 예언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무엇을 근거 삼아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40년간이나 왕노릇을 할 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아쉬울 것 하나 없는 태평성대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대체 하나님은 예언자도 아닌 남유다의 목자요 농부였던 아모스를, 북쪽 땅에 말씀을 외쳐야할 선지자로 세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없이 모두가 제 멋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앞에 더 큰 책임을 짊어지고 깨어있어야 했던 상류층들은 모두 살만한 세상이라고 만족하며 탐욕에 취해 갔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가난한 사람들, 농민들이 얼마나 높은 세금에 시달리고, 절망과 고통에 짓눌리고 있는지,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의 짐은 무거워만 갑니다. 내 백성을 돌보라던 주님의 말씀을 잊은 채, 권력과 힘을 제 이익을 위해 사사로이 휘두르는 이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듯이 살아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의로워야 할 법정은 힘있는 이들에 의해 굽어진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법’이 힘있는 이들, 악인들의 편으로 떨어져버리고 나니 가난한 이들과 힘없고 약한 이들을 서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앗수르의 우상까지 숭배하는 지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5:26)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다는 사실마져 잊어버린 패역한 땅이 되고 말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깨닫고, 외치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일어나셔셔,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 시편 82:8
응송인 시편 기자의 절규가 이 땅에 울려퍼질 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동안 산처럼 높은 권세를 행세하던 온 세상의 권력자들을 모조리 피고석에 세우셨습니다. (시편 82:1~2) 그때처럼 하나님의 법정은 그들의 권모와 술수, 아첨하는 이들의 기만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다림줄’을 그들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림줄’은 건축할 때 늘어트려 수직과 수평이 맞게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되는 도구입니다. 제 아무리 많이 쌓아 올리고 그럴 듯 해 보여도, 다림줄에 대 보는 순간이 오면 그 운명이 결정되는 법입니다. 다림줄에 잇대어 어긋나 있다면, 쌓아 올린 기초가 흔들린다면 여지 없이 깨트리고 다시 짓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대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는 것, 마침내 이스라엘을 덮고 있던 어둠을 깨트리고 새로이 세워야할 때가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 믿은대로 살아가는 ‘복음’
하나님의 다림줄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도 그 앞에서는 제 속을 감출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반듯하게 잘 세워지고 있을까요? 그 다림줄 앞에서 안전할까요? 하나님의 법정이 열리게 되는 날, 오늘의 나는, 우리의 삶은, 이 땅의 현실은 내가 아닌, 우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평가받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을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그 동안 율법교사에게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제는 다 되었다는 섣부른 안도나, 그러니 다 좋을대로 살아도 된다는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셨고 구원은 다 이루어주셨으니, 천국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고 에둘러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서 이와 같이 하라’시던 말씀은, ‘어찌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주님의 최종 답변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에 그치는 이가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고, 바라만 보다가 돌아서는 이가 아니라, 천국은 이렇게 살아가는 곳이라는 기쁨을 누리라는 초대의 말씀인 겁니다.
율법학아직도 제 자신을 기준삼아 주님의 말씀을 헛되이 듣고 있는 자, 제사장, 레위인, 유대인들과 오늘의 교회와 달리, 골로새 교회와 교우들은 이 말씀에 응답하여 결실을 거두며 살았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믿음은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응답하고, 그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복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사는 길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임을 경험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만민에게 복된 소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입증하시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한 없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하늘에서 안타까워 바라보고만 계셨더라면,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십자가를 짊어지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찌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입증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신 겁니다.
어떤 사람이 전해듣고, 초대 받은 대로 ‘복음’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복음’이 참으로 내 인생을 복되게 하고, 온 땅에 복된 하나님의 초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세상 모두가 조롱하고 핍박하여도, 그렇게 제 입으로 맛본 사람, 제게 주어진 삶으로 경험한 사람은 달려갈 수 있는 겁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 응답할 수 있는 겁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 땅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누가 전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분명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말씀은 듣고 아는 것에 그치는 자로 머물려 했는지, '그렇게 하라'는 말씀에 응답하며 살았는지 우리 모두의 삶을 가늠질하는 다림줄이 될 겁니다. 상황이나 여건,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 안주하려고만 하는 우리를 주님은 자꾸만 채근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윽박지름이나 달콤한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림줄 삼아 삶의 걸음을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서 참되게 깨달은 그날로부터,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낸 삶의 열매가 온 세상을 채우며 자라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1:6)
골로새 교우들이 참으로 복음에 참여하며 살고 있음을 보았다고 환호하던 바울처럼, 이처럼 복음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의 교회를 보며 주님께서 환호를 지르실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대로, 사랑하며, 은혜를 입는 자처럼 사십시오.
여러분도, 가서, 이와 같이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일로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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