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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첫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1. 23. 13:47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2:1-5
응송 | 시편 122
2독서 | 로마서 13:11-14
3독서 | 마태복음 24:36-44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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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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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그날'에 입어야 할, '옷'
# 01
오늘이 되고 보니 마치 2022년을 한달음에 달려온 것 같지만, 각자에게 주어졌던 한해의 시간은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때로는 아파했고, 때로는 절망했습니다. ‘내일’이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담함에 사로잡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창한 성탄 기념과 행사로 바쁜 세상을 뒤로 한채, 그리스도께서는 묵묵히 당신 자녀들의 아픈 시간을 함께 걸어와 주셨습니다. 그덕에 우리는 오늘 새로운 교회력을 열어젖히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감사할 일입니다. 대림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이지만 그 기다림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이천년전 그분의 첫번째 방문을 근거로 합니다. 실존 인물로서 역사속에 찾아와주신 ‘초림'이 없다면 애당초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 그분께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신앙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허물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불합리성이나 절망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늘 주님의 초림과,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의 날 사이의 긴장감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기다림'은 교회를 지켜주는 힘이며,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재림’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 억울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이 없다면 힘겹게 붙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허무로 떨어지고 말 겁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구원의 빛으로 오실 주님의 길을 밝히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촛불에 불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 02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끝날’이라는 뜻의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뜻은 단순히 지구나 우주의 시간이 끝장나 버린다는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라고 하는 ‘죄’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보내주셨지만, 여전히 ‘십자가’는 어리석음이라고 거절한 채 세상은 스스로의 지혜를 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원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의 길은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임하는 순간 ‘어둠’이 드러나듯, ‘참’된 진리가 임할 때 ‘거짓’은 비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이야 말로, ‘거짓’의 운명이 끝이 나게 될 때입니다. 더 이상 누구도 거짓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니까요. 이전까지 사실로 받아들였고 지혜나 성공이라 굳게 믿어왔던 인류의 믿음이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는 때가 마침내 올 겁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 때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거짓과 죽음으로 팽배해진 우리의 세계 밖에서 우리의 땅으로 찾아오시고 침투하는 ‘하나님 사건’입니다.
‘나는 주님의 재림을 분명히 믿고 있다’ 말하고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재림’을 인식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슬플 때는 슬퍼서 기쁠 때는 기뻐서, 염려 근심이 많을 때나 행복할 때도 예수의 재림은 우리 삶의 이유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제 이름을 드러내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세워감으로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살이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고백처럼 이미 스스로는 세상을 향해 죽었으므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있는 자로 서게될 ‘주의 재림의 날’에만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종말’이나 ‘재림신앙’은 ‘언제’나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날’은 어떤 날입니까?
# 03
1독서인 이사야 2장에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뛰는 놀라운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이사야 2:4
세상의 방식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날, ‘마지막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말씀은 선지자 ‘미가’도 외쳤던 말씀입니다.(4:3) 그런데 참으로 이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전쟁의 소문이 끊이질 않고, 핵무기와 같은 온갖 살상 무기 개발이 끊이질 않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주님의 날’은 늦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애당초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하는 절망감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으니, 우리가 더디 온다고 생각하는 ‘주님의 약속’은 주님편에서는 결코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베드로후서 3:9) 뿐만 아니라 그 날은 반드시, 그러나 ‘도둑’같이 찾아올 것(데살로니가전서 5:1~3)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만으로는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을 힘겨워 하고 있는 우리의 의문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복음서 말씀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이며, 두번째는 ‘남겨진 자들’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두 이야기안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갑작스레 찾아오는 ‘종말’의 시간이 우리는 전혀 모른 채 ‘하나님 뜻대로 정해 놓으신 때’라는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천지를 지으실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얻으셔야 할 필요가 없으셨고, 살고 죽는 것 역시 우리의 이해나 동의와는 무관합니다. 밭을 갈던 두 사람이나, 맷돌을 갈던 두 여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장소,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남겨집니다. 우리 인생의 실체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의인이 갑작스레 죽음을 당하고 악인은 여전히 형통한 이유도, 세월호나 이태원에서 희생당한 이들과 달리 ‘나’는 왜 남겨두셨는지도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날’, ‘그 순간’에는 그 누구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각자가 경험하게 되는 ‘주님의 날’에는 결국 ‘생명’이 내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입니다. 엄중한 선고가 내려지고 우리로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때 ‘홍수’가 일어나고, 왜, 그때 ‘종말’이냐고 물을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홍수나 참담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로서는 그저 '종말'을 운명으로 맞이해야할 준비를 해야 할 뿐입니다. 준비하지 못하면 갑작스레 홍수가 임할 때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 04
복음서 본문의 다음장인 25장을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마태복음 25:13
비유 안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날’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잠도 자지 말고 하던 일도 모두 팽개치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밤’을 세워본 분은 아실테지만, 제 아무리 애를써도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고통만 더 깊어질 뿐입니다. 결국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겠다는 피로감에 사로잡히거나, 해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정죄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입니다. 뭔가 주님의 말씀이 속시원하게 들리질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고민에 바울 사도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서신서 말씀이야말로 우리와 같은 신앙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 로마의 교우들을 위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번 귀 기울여 살펴보십시오.
첫머리는 11절은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라고 시작합니다.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벌써되었다’는 그의 말에서,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때가 시작되었다는 긴급함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 로마서 13:13
이런 식으로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권면은, 방탕하지 않고 경건한 누구나 인정할 법한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라’, 또는 ‘~하지 마라’는 이런 식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결론으로 삼는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던 바울 사도답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으며, 율법으로 하면 누구보다 뛰어났던 그 였지만, 이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사람입니다.
율법은 제 아무리 잘 지켜내도 결국 하나를 어기면 ‘율법을 어긴 자’일 뿐입니다. ‘율법’은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정죄감으로 늘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멍에로 짊어지도록 강요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불행해질 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로마서 7:24
‘죄의 법’인 율법에 매여 아무리 지켜도 ‘죄’의 무게로 짓눌리니 ‘죽을 것 같다’는 그의 외침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자유와 해방,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결론 내렸기에 바울은 마침내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의’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기로 결단할 수 있던 겁니다. 이것을 우리도 교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이 동의어는 아닌 겁니다. 단순히 ‘기독교인’이 되었다거나, ‘세례’를 받았다거나, 혹은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는 하지만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또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지 여전히 막연해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사는 걸까요?
# 05
바로 앞절인 10절에 바울 사도가 전하는 처방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로마서 13:10
‘사랑’할 때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벗어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사도는 율법의 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닌,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은 옳습니다. 우리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정죄감으로 몰아세울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거나 아끼는 감정이나 태도가 아닙니다. ‘악을 행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남을 잘 대해주고 또 그런 척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럴듯 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미움이나 원망, 시샘하는 사특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게다가 얼마든지 겉으로는 선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속내를 감출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잘되는 것이나, 나보다 나은 것을 보면 부럽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세워야한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겁니다. 게다가 옳은 선택을 했음에도, 상대에게 해악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의지나 결단, 행실을 조심하는 것만으로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정죄감과 고통으로 불행해 질 뿐입니다. 윤리, 도덕적인 삶으로 대변되는 ‘율법’은 늘 우리를 속이고 뒤흔듭니다. 사랑하는데 상대에게 악을 행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의 말처럼, 노력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마음 먹는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14절 말미에,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벗어내라고 규정하고 있는 명령이 ‘율법’이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하지만, 이 땅위에서 살고 있는 한, ‘정욕’이나, ‘육신의 일’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먹고’, ‘마시고’, ‘배변’하는 등 육신의 욕망을 거스르면서는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준의 힘으로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려고 하거나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순간,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게 되는 ‘율법주의’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14절 상반절이 바울 사도의 최종 답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 로마서 13:14a
그렇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을 능력인 ‘사랑’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인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외에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결국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이고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의 은혜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때만 우리는 육신의 일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 겁니다.
# 06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이것이 ‘대림’의 절기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걸쳐 입는 ‘옷’이 아닙니다. 남들 앞에 잘 보여야 할 때는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고 이옷 저옷 걸쳐 입지만, 화장실에 갈때나 목욕을 할 때 좋은 옷, 비싼 옷을 입으려고 애를 쓰거나 염려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라는 말입니다. 그분으로 충분하니 다른 선택은 우리에게 필요 없고, 그런 선택에 강요받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삶은, 이전까지 입으려고 붙들었던 것들, 또 입어야만 한다고 매달리던 것들을 벗어내며 사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온전히 선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손에 맡긴다는 것은, 실은 죽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얼마나 힘이 든 것인지,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까지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그래서 믿음 없이는 누구도 예수로 옷 입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그분께 내 인생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인정해주셨던 것처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야 말로, 그 날을 준비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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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날은 도적처럼 임하는 날입니다. 더욱이 ‘그날’은 아버지께만 속해 있는 비밀이기에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날은 이미 '지금, 여기’에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곁에 ‘그 비밀’이 찾아와 있음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도둑처럼 임한다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그날’이 되어주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넘치는 기쁨의 능력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영혼은 안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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