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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4/09 부활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4. 5. 17:14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31:1-6

      응송 | 시편 118:1-2, 14-24

    2독서 | 사도행전 10:34-43

    3독서 | 요한복음 20:1-18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James Tissot, French, 1836~1902 The Resurrection (La Resurrection) 1886-1894

     

    '살아있는 자'를 위한 '부활'

     

    1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천년전 그 아침의 설레임과 감격위에 서 있습니다. 해마다 오늘이면 마침내 참된 생명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과 함께, 한편으로는 여전히 ‘죽음’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서글픈 우리 삶 때문에 묘한 감정에 휩쌓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곤 합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로마신조’에서 유래된 서방교회 전통의 신앙고백문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함축되어있는 ‘신경’의 마지막 부분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신화처럼 우습게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고백을 상투적인 교리 정도로 여길 뿐,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부활’은 아득하고, ‘죽음’은 실제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중적 태도도 여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힘을 뿌리치고 부활하셨음에도, 여전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결국 ‘죽는다’는 세속의 신화에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맞고 있는 우리 안에도 ‘부활’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아득한 저 너머의 사건이 되기 일쑤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길을 발견했음에도 정작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헉헉 거리고 있는 우리입니다. 죽음의 힘앞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부활의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2

    이천년전 처음 경험했던 고난주간은, ‘랍비’나 ‘예언자’로 알았거나, ‘스승’으로 혹은 ‘그리스도’이신 ‘메시아’로 믿었거나 ‘예수’를 따랐던 이들이라면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모든 빛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진공상태에 갇혀 버린 것처럼 아득하고 참담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세상이 모두 넋을 잃고 무너져있던 예수 죽음후 삼일째 아침, 마리아가 주님이 안장된 무덤을 찾았습니다. 목적 자체가 분명하지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면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혼비백산했습니다. 닫혀 있어야할 무덤문이 열렸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고 죽음의 경계가 열렸고, 죽은 자가 있어야 할 곳에 죽은 자가 없으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부활의 아침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본문은 모두 ‘빈 무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사실은 ‘부활’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무덤’ 자체가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이들로부터 전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근거가 자신이 목격한 것이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빈무덤’이야기에 집착하면 할 수록 교회밖으로부터 ‘결국 예수의 시신을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게 될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초기 교회의 부활신앙이 ‘빈무덤’이야기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무덤을 목격했던 베드로도 여전히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 이후로 ‘빈무덤’은 의미를 가지게 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빈무덤’자체는 ‘부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다면 대체 왜 복음서 기자들이 ‘부활’을 전하면서 ‘빈무덤’의 이 장면을 이야기하는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질문해야만 합니다.

     

    3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부활을 드러내고 입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살해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하다못해 총독 ‘빌라도’앞에라도 찾아가셨어야만 합니다. 황제 앞에 찾아가셨더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랬으면 ‘부활의 역사성’이라던가 ‘사실성’은 훨씬 커졌을 겁니다. 그런데 왜? 목격자들이 없는 빈무덤가에서 주님은 마리아를 만나주셨던 걸까요? 이런 질문이 신학적 사유이고 성경을 읽는 바른 자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당초 ‘부활’이라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보여지고 발견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있다거나 살아있다는 것을 그저 ‘육체’안에서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싸늘히 식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고, 반대로 온기가 있고 움직인다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활’도 그런 방식으로 경험하고 입증하려고하는 겁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들에게는 ‘물’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부활’은 그런 방식으로는 경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부활’은 종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실 전혀 새로운 몸이기 때문에, 종말이 오기전까지는 누구도 엿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와, 그를 목격한 제자들 외에 이제는 종말의 그날까지는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경험하고 싶고 입증하고 설명하고 싶어도 그 누구도 다시는 ‘부활’을 목격하거나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역사속에서 단한번 ‘예수’안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만이 최선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따지고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고 믿는다는 것도 사실 ‘부활’ 만큼이나 아득하고, 믿기 어려운 사건인 겁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함께 갔던 제자는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음에도 정작 무덤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5) '설마 무덤이 비었겠느냐’는 생각,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체념 때문입니다. 그 만큼 믿기 힘들었기에(9), 결국 그들은 ‘부활’을 믿는 곳까지 넘어가지 못한 채 다시금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10) 그들 뿐만 아니라 ‘마리아’ 또한 예수께서 서 계신것을 알아보지 못했고(14),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께 예수의 시신을 찾아달라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15) 

     

    4

    그러나 ‘빈무덤’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리아야’라고 하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졌던 순간, 예수의 시신을 찾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마리아의 두려움이 일순간에 해소되었습니다. 지금 여기, 죽은 자들만 머물고 있는 이 무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 뿐이었기에, 마리아는 곧장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과 달리 마리아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하신다’는 말씀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만 한다는 뜻임을 깨닫게 된 겁니다. 우리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제자들과 달리 어떻게 마리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부활을 목격할 수 있던 걸까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왜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할 수 없던걸까요? 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는데, 세상은 부활은 없다고 할까요?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유대인들이나 빌라도에게 보이시지 않았느냐는 물음과 결국은 동일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그 답을 ‘마리아’야 라고 부르시던 주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라부니’라고 응답하던 마리아의 모습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 마리아는 수 없이 많은 여인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단 한명의 ‘마리아’였고, 그와 같이 마리아에게도 예수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분이신 ‘라부니’였다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 부활의 경험과 사건’은 마리아가 예수님과, 예수님이 마리아와 특별한 관계 안에 있던 것처럼,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되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나아가보겠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결코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않됩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않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무덤에 묻는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죽음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계실 수 있는 곳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곁 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는 말씀을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의 세계안에서는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실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그것을 믿느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을 선택한 채 하나님 없이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성경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눈에는 예수께서 ‘죽은 자’로 보였지만, 정작 하나님께는 말씀이신 예수를 잃어버린 ‘마리아’나, ‘제자들'이야말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5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무덤에서 예수를 찾을 수 없고, 찾으려해도 않됩니다. 그가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만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13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예수의 부활을 가르치면서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먼저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오해하는 지점이 이곳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살려내셨으니 그분 걱정일랑 이제 그만 두셔도 됩니다. 살아야 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자가 되지 않는 한, 예수의 부활은 적어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부활사건을 경축하겠다고 모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도 살아있느냐?’는 물음에 먼저 응답해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이들과만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방식이 아니라, 세상이 강요하는 방식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살고 있다보니, 여전히 무덤안이 비었는지, 예수의 시신이 그안에 있는지에만 마음이 머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초기 교회공동체는 ‘빈무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부활의 첫사건을 기록하면서 ‘빈무덤’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이나, 예수의 시신을 찾아 헤매이는 일 따위는 이제 불필요해졌다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찾으라는 겁니다. 사도들은 온갖 살해 위협과 불안, 두려움에 내몰렸던 부활의 첫날, 생전에 예수님에게서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생명의 현실성,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특별한 부활경험에 닿고 싶다는 갈망이 있습니까?

     

    일년전인 22년 5월 5일 여수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의처증에 시달리던 남편에 의해 아내가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급한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가기전 끝까지 의식을 붙들고 있던 피해자가 했던 말은 ‘저 죽어요? 우리 아가들 어떻게…’였다고 합니다. 죽음에 의해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눈에 밟혔던 그이에게서, 저는 오늘 마리아를 바라보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참혹하게 살해당해 무덤에 안치되던 그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아가야 하는 마리아와 제자들과 우리와 세상 때문에 죽음에 의해 삼키워질 수 없어, 예수께서는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은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서슬퍼런 죽음의 힘이 짓누르는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무엇을 어찌할지 몰라 빈무덤앞에서 허둥대지 마십시오. 생명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찾아내어 구원해주시기 위해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땅을 다시 살리고, 죽음에 삼키워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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