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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성령강림후 아홉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7. 15. 21:2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7:1 ~ 14a 혹은 예레미야 23:1 ~ 6
응송 | 시편 89:20 ~ 37 혹은 23
2독서 | 에베소서 2:11 ~ 22
3독서 | 마가복음 6:30 ~ 34, 53 ~ 5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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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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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도 '화해'한 사람들
1
오늘도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는 이제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던 원수들도 모두 사라졌고, 이제는 정말 두 발을 뻗을 수 있을 만큼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부담감이 일어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신세가 뒤바뀌어 자신은 왕궁에 머물게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궤는 휘장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머무실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은혜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스럽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응답은 칭찬이 아니라, 않된다는 단호한 거절입니다. 너무나 뜻밖입니다. 게다가 덧붙여지고 있는 말씀도 불편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 사무엘하 7:8b
하나님을 위해 머무실 성전을 짓겠다는 이런 마음은 얼마나 귀합니까? 요즘도 많은 교회들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면서 성전을 짓습니다. 모두의 마음이 뿌듯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성전을 짓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 네가 실상 ‘목동’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는 지적합니다. 지금 다윗의 치명적 약점, 출신에 대한 역린을 건드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누가 누구를 위하는 거냐?’는 물음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당신 마음에 합하다고 했던 그 다윗의 마음을 단호히 거절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말씀안에서 들은 바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이사야 55:8 - 9
다윗의 생각이나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무엇이 다른 걸까요?
2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굽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 보다는 월등히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는 ‘태초에’로 시작하는 성경의 첫장에서부터 길을 잃고 맙니다. 아무리 넘겨잡아 보려고 해도 태초라는 성경의 선언은 아득합니다. 이런 우주적 차원은 고사하고, 일상의 신앙의 자리에서 조차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사고를 뛰어넘습니다. 그런 오해와 한계로 인해 우리는 줄곧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한없는 사랑과 끝까지 용납하시는 분이시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과 소외의 ‘담’을 높이 쌓아 올리는 모순에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조차도 모른 채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다른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거룩’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부담은 아무리 비워내도 어느새 또 한가득 채워져 숨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해지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이’는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스스를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열심에 내몰린 겁니다. 성서기자는 ‘다윗’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그 보다 잘 헤아리는 이가 없었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그는 오늘, 하나님께서 멈춰세워야 하실 만큼 단단히 헛발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목동이었던 그를 여기까지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이제는 그가 하나님을 걱정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내가 언제 집을 지어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는 주님의 타박에, 다윗은 비로서 ‘왕’인 그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공간’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 사무엘하 7:6
제 안위와, 제 영광, 내가 해낼 수 있는 것만 들여다보던 ‘다윗’과 달리,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당신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줄곧 그들의 방패가 되고, 그들의 요새가 되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자기 백성들의 곁에 머무시기만 원하시고, 또한 그들도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계실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돌보시듯 자기 백성들을 보살피는 ‘왕’이 되어 달라고 ‘목동’이었던 ‘다윗’을 택하셨던 것인데, 그는 지금 ‘하나님께’, ‘하나님을 위해’라는 명분을 외치며, ‘하나님’도 ‘하나님 백성’도 아닌 자기 자신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3
‘왕’이 된다는 것은 세상 모두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얻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겁니다. 그런 힘을 가지게 되면 사람이란, 속절없이 제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떨어지고 맙니다. 고대의 모든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실제로 예외없이 제국의 왕위에 오른 권력자들의 첫번째 사업은 언제나 거대한 왕궁이나 신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신전을 지음으로 자신이 신적 카리스마와 정통성을 부여받았음을 과시하려는 겁니다. 오늘도 이런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 끝이라도 닿을 듯 높아만 가는 현대의 도시 건축물들은 ‘왕’처럼 성공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리에 선 ‘우리’도 따지고보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대형 백화점처럼 화려하고 마천루처럼 높아만 가는 교회건물들은, 아무리 좋은 구실을 가져다 붙여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께 이만큼 큰 건물을 지어드린 ‘나’ 또는 ‘우리’의 ‘신앙’의 업적만 드러낼 뿐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그곳에는 이 만큼 하나님을 위해 열심이었던 ‘왕’인 자신과 자신의 업적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씀은 추호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기만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나, 또는 우리의 이름으로) 성전처럼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싶어하는 마음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록 우리 때문에 곁에 있는 이들은 ‘더러운 이들’로 낙인이 찍히고 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천사'처럼 높이려고만 하면 곁에 있는 이들은 ‘어둠의 자식’들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고 거룩해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 될 수록, 우리의 곁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이들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선하다 여기지 않으십니다.
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4
복음서 말씀에서 읽게 되는 ‘주님'의 행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벳세다’ 평야에 오신 이후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과 달리, ‘오병이어’사건 직후에 ‘벳세다’로 건너가시려다가 일어난 이후의 이야기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주님 일행이 ‘벳세다’로 건너가려고 했던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드는 상황이 불편하고 부담이 될 밖에 없던 까닭은, 바로 앞 단락에 담겨있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던 ‘요한’을 살해한 이들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주님 일행에게는 여간 부담이 되지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것은, ‘나, 여기있소’라고 시선을 끄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급하게 배를 타고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던 겁니다. 31, 32절에서 외딴 곳으로 자리를 피하려고 하셨던 것도, 같은 이유로 보입니다. 외딴 곳으로 피하려던 첫번째 계획은 이미 먼저와서 기다리던 사람들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이 ‘오병이어’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게 되면 매우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가는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헬라어로 ‘오클로스’(ὄχλος)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대단히 특별한 목적에서 사용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군중’을 뜻하는 헬라어로는 ‘라오스’(λαός)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가는 굳이 ‘오클로스’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사실 이 두 단어는, 용례가 전혀 다릅니다. ‘라오스’는 경계안에 있는 백성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오클로스’는 경계 밖의 ‘많은 사람들’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을 기다리던 이들은, 하나님 백성인 ‘라오스’로 불리워질 수 없던, 유대 사회안에서 내쳐지고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 대부분은 질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병들고, 아프고, 그것 때문에 괴로운 이들을 유대사회는 저주받은 자들처럼 하나님 백성의 울타리 안에서 내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그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동기는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표현된 ‘불쌍히’여긴다는 말은 단순한 연민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입니다. 이들의 무엇을 불쌍히 보셨던 걸까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버려지고 정작 자신들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셔던 가르침의 내용이 분명히 ‘하나님 나라' 천국 ‘복음’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율법에 의해 정죄받고 버려진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그 어떤 인생도 저주 받고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소식말입니다.
5
그 이후 사람들을 피해 ‘벳세다’로 향하려던 일행들의 여정은 예상치 못한 ‘폭풍’에 의해 ‘게네사렛’에 닿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늘 본문의 두번째 단락이 시작됩니다. 그곳에도 주님 곁에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곳에 모여있던 이들의 병을 고치쳤습니다. 적어도 오늘 두 단락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가르치시고,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이야 말로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통해 불신으로 떨어지고 병들어 버린 정신은 맑아져야 하고, 주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는 건강해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통해 나아야 하는 질병은 어떤 것들일까요?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모든 육체의 질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런 차원의 치유라는 것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과연 어느 편이 옳을까요? 이런 물음에 답을 찾으려면, 먼저 우리들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지를 먼저 질문해야만 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는 쉽게 말하면,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하는 물음입니다. 아마도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돈만 있으며 마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하게 된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거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이 실감나시나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몸의 건강’은 더 폭넓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단순히 육체적 질병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는 병원을 찾고 의사를 만나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필요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서안에서 ‘장애’나 ‘질병’은 하나님께 버려진 결과로 여겨졌기에, 공동체 안에서 쫓겨나야할 만큼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대접’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여졌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질문 드려볼까요? 오늘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사회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존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람대접받지 못하여 눈물 짓는 서러운 인생들은 없을까요? 혹시 ‘나병’처럼 가까이 오면 않된다고 더럽다고, 협오스럽다고, 우리 곁에서 사라지라고 박해를 받는 이들은 없습니까?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움이 짧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이유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가장자리’로 내몰려 신음하는 이들은 없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마음은 지금 너무나 슬픕니다.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내치는 우리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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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 안에서 사람들에 의해, 종교에 의해, 제도와 사회에 의해 차별받고 소외되었던 이들이,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에 용납을 받았다는 해방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삶의 끝자락에 주님을 향해 몰려든 그들을 찾아가주시고, 가르치고, 질병을 고쳐주셨고, 손을 내미신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기꺼이 거룩의 옷을 벗고 더러움에 던져진 이들을 찾고, 건강한 몸으로 병든 이들의 곁에 머물고, 하나님이 아들이 몸소 하나님께 내쳐진 이들의 곁을 찾아가 주셨을 때, 비로서 우리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버려지지 않는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심으로 모든 원수된 것을 허물어 주신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육체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해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진 걸까요?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 에베소서 2:15b -16
율법의 조문 때문에, 또는 교단의 규칙 때문에,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 때문에 담장너머 구원의 경계 밖 ‘죄인’으로 내몰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해로 초대하시기 위해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끌어안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이라면, 담장의 이편이든 저편이든, 세상과도, 이방인들과도, 버려지고 소외된 그 누구와도 우리는 화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과 한 몸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율법의 조문 까지도 폐하셨다(15)는 바울의 외침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쌓아올리는 ‘의’가 아닌,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 사랑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그 앞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경건이나 거룩의 차이는 사라지고 맙니다. 성적의 차이, 인종의 차이, 성격의 차이도 무의미할 뿐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야 말로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육체로 율법의 담을 모두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으신다면, 주께서 허무신 담을 다시 세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그런 세상을 강요하고 강화하려는 이들을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자유한 걸음을 걸어가십시오. 주님은 '평화'의 다리를 놓아주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한,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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