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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성령강림후 12주 *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간성서의 거울 앞에 2024. 8. 7. 14:1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18:5 ~ 9, 15, 31 ~ 33 혹은 열왕기상 19:4 ~ 8
응송 | 시편 130 혹은 34:1 ~ 8
2독서 | 에베소서 4:25 ~ 5:2
3독서 | 요한복음 6:35, 41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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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1
구약 선택본문인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마병과 병거라 불리우던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제사장 팔백오십명과 싸워 이겼을 뿐만 아니라, 삼년 가뭄의 끝을 알렸던 그의 예언도 성취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당당하던 능력의 종이 차라리 죽여 달라고 구할 만큼 두려움에 짜부러들고 말았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 열왕기상 19:3
다름아니라 너를 찾아내 죽이겠다는 ‘에세벨’의 서슬퍼런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놓치자 현실의 위협은 태산처럼 그를 압도했고,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두려움이 그를 짓눌렀던 겁니다. 비록 능력의 종이라고는 해도 그도 역시 사람인지라 목숨을 위협하는 현실의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처럼 현실의 문제들은 너무나 분명하고 또렷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몰라도 일단 그런 현실의 위협에 떨어지고나면,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을 만큼, 하나님의 뜻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린 쉽게 상황을 잘못 이해하거나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 증거가 1독서 사무엘하 18장의 사건이다
2
‘높으신 임금님께 기쁜 소식을 가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 사무엘하 18:31a
‘압살롬’의 쿠테타는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요압’장군이 그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반역자 압살롬의 살해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이 소식이 ‘다윗’에게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께서 안겨주신 승리의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주님’께서 하신 일일까요? 이것이 과연 다윗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이런 상황을 승리라고 하기에는 죽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다윗의 울부짖음은 비통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현실의 문제는 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애당초 ‘다윗’이 헐레벌떡 도망치고 있을 때, ‘아히도벨’이 끝까지 그를 추격하여 죽여야 한다고 조언했을 때, ‘압살롬’이 따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황을 엿보고자 예루살렘에 파견했던 밀정들이 발각될 위험에 떨어졌을 때 그들을 우물에 감추어주었던 여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압살롬’이 왕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올렸던 머리채 때문에 오히려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게 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기까지 이르게 될 것을 누구도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렇듯 ‘역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당연하게 기대하고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질 않습니다. 언제나 뜻하지 않은 작은 사건, 예상치 못했던 ‘우연’으로 인해서, ‘이제는 끝났다’라고 큰 소리치던 독재자들의 권력을 무너트리기도 하고 ‘이제는 끝이라’고 체념하던 민중들의 희망을 불처럼 일으켜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역사’가 ‘우연’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안에서, ‘운명’이라는 것이 결코 우리 힘이나 지혜, 계획과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기대와 계획과 욕심에 매달려 살아갈 뿐입니다.
3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살아내려면, 상황과 처지, 환경과 현실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원적 사태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눈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단박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 이야기는 주님께서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에게 건내셨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 몇주간 계속해서 복음서가 외치고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요한복음 6:35
표면적으로 보면 주님은 지금 당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안에 찾아와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태를 폭로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땀흘리고 수고하고 업적을 이루어내야만 빵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강요하는 세상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나라가 이미 와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는 대단히 위급하고 위태로운 소식을 전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말해도 듣지 못하고 가르쳐주어도 알지 못할 만큼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스스로의 지식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 요한복음 6:42
이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이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으니,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곧이 곧대로 들릴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주님이 가지고 오신 ‘하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받아들일 없던 것은 사실 ‘사람이 빵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수 있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심인 겁니다.
4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생명의 빵’이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복음서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방식과 기준안에서만 본다면 전혀 ‘메시아’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를 박해하거나 조롱하는 이들에게 드러낼 권위도, 저항할 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연약하고 무력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세상안에서 버림받고 내몰려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 자녀들 때문에 늘 슬펐고, 안타까웠고, 눈물흘리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도무지 ‘메시아’로 보일리가 없습니다. 땅의 위세나 권세 한줌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가 어떻게 하늘의 영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을 로마 황제보다 위엄있고, 온 세상을 힘과 권능으로 굴복시키는 ‘메시아’나 아니면 ‘부활’ 이후 그리고 언젠가 종말의 날에 심판주로 오실 분으로만 기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메시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말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통치의 방식이 발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것이 하나님만이 드러내실 수 있는 통치의 방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게 실감이 나시나요?
이 땅에서는 자신을 모욕하거나 해하려는 이들에게, 더 큰 힘과 더 큰 권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더 높이 올라가고, 더 힘을 갖고, 더 영향력을 쌓으려고 합니다. 무시당하지 않고, 비교나 서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보다 강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반대입니다. 불의함 앞에 침묵하고, 거친 폭력과 서슬퍼런 권세 앞에서 스스로를 내어주는 선택입니다. 누가 이럴 수 있을까요? 이건 모든 것을 끌어안음으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의 통치인 겁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은 요셉의 아들이라는 ‘소문’ 때문에, 예수님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그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안에서 일어났던 놀랍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나라,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끝까지 참아내고 사랑하시는 통치를 실감하고 계신가요? 이것만 가능하게 된다면, 돈이 능력이 되고, 힘과 명예가 권세가 되는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일상에서도, 여러분은 분명히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맛봄으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감격을 발산하며 살고 계실 겁니다. ‘복음’은 그렇게 해야지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능력’이기 때문에, 이건 당연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하나님의 통치를 능력으로 깨닫고 실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매일을 세상안에서, 세상의 원리에 길들여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 요한복음 6:44a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 요한복음 6:46b
주님 말씀처럼 길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께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외에 다른 희망은 없습니다.
5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경우로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생명의 빵’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주님께 있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 비교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유대인들의 조상들과 주님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는 사람들, 즉 교회입니다. ‘만나’를 먹었어도 그들은 결국 다 죽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영생’이라는 것을 단순히 굶주림과 끼니를 해결하고, 한해 두해 더 살아내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라는 뜻일 겁니다.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먹고 ‘영생’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천년 만년 산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처럼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말씀인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종말’ 뿐입니다. ‘새로운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 여기에 아직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우리는 지금의 삶의 방식이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 뱃속이 우리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지만, 지금을 그때에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 그때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종말이 오기전 지금은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그날에, 닫혀 있던 것들이 열리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될 겁니다. 주님과 함께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는 언제나 ‘생명의 떡’이 맞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죽음에 의해 짓눌리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 ‘영생’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빵임을 믿고, ’영생’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실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2독서인 바울의 서신서가 그 답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2독서 에베소서 말씀은 신약의 십계명이라 불리울 만큼, ‘하라’와 ‘하지 마라’는 식으로 기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가득합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 정도는 살아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은 고사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 한가지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실패하고 맙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 마치 나는 아닌 것처럼 혹은 나는 할 수 있는 것처럼 매달리게 되면, 결국은 강박과 조급함 때문에 영혼이 불안에 떨어지게 될 뿐입니다. 대체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당당하게 성도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걸까요?
6
바울이 전하려는 핵심은, 이미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동일합니다. 4장 32절과 5장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 4장 32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 5장 2절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이’가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본받는 것’ 뿐입니다. 능력은 그분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을 믿고, 그 능력이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 것 뿐입니다. 그분의 열심이, 우리를 지켜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의 근원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고, 그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믿음으로 주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그분을 믿고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어떻게 먹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 ’만나’를 얻어야 하는지에 머물러 있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잃을까 염려하거나 다른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임을 실감하고 믿기에, 오늘도 그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열심에 잇대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늠름하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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