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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9/08 성령강림후 열 여섯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9. 3. 15:3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잠언 22:1 ~ 2, 8 ~ 9 , 22 ~ 23 혹은 이사야 35:4 ~7a

      응송 | 시편 125 혹은 시편 146

    2독서 | 야고보서 2:1 ~ 10, (11~13), 14 ~ 17

    3독서 | 마가복음 7:24 ~ 37

     

    # 설교음원

    http://naver.me/xLWsldq7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OLO-RlEP5_A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Ludovico Carracci, Christ and Canaanite woman(Cristo e la Cananea), 1595

     

    주님께, 기댄 사람들

     

    1.

    잠언, 이사야, 시편 응송까지 오늘 구약본문이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의지’ 또는 ‘의존’적 삶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한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게 보일리 없을 니다. 시대의 지혜와 교양은 ‘스스로, 홀로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존’이라는 말속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듯한 위로가 담겨있습니다.

     

    생명은 그래요 /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 기대는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 흐리기도 하지요 /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지고 있는 이여’

     

    제가 참 좋아하는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을, 마치 실패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홀로 버티고 서려고 할 뿐, 정작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 피곤에 지치고 슬픔에 힘겨워 어렵게 곁을 찾아와도 선뜻 기댈 수 있도록 틈을 내주는 일에도 서툴기만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너나 나나 똑같이 아프고 힘겨운 우리이기에, 더욱 서로에게 기대는 ‘의존적’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댄다거나 의존한다는 것은 결코 비굴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모두 애당초 처음부터 ‘의존적’인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갓난 아이가 부모에게 ‘의존’된 것처럼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생명과 안전을 맡길 수 있는 ‘부모’가 없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존재로서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을 홀로 버텨내야만 한다는 알 수 없는 부담감에 길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그래야만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강요받아온 탓입니다. 하지만 ‘의존’하며 살 수 있다는 것, 힘들면 기대어도 괜찮고 울고 싶을 때는 안겨서 울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의존성’의 감각을 잘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우리 자신이 더불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고 용납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여기에서 ‘의존적’이라는 말은, ‘살아감’의 근원이 되는 토대가 내 안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 밖에 있는 것에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다 잃어도 이것만은 있으면 되고, 다 얻어도 이것을 잃는다면 다 잃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의존’하는 대상입니다. 1독서 계속 본문인 잠언 22장은 ‘은’, 이나 ‘금’보다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것이 낫다고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이런 말씀은 곧잘 현실성 없이 들릴 겁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구’는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태양’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입니다. 만약 지금 ‘태양’이 꺼져버리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지구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은 절대적으로 ‘태양’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태양이 사라지는 순간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에서보면 태양은 본질적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비본질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 없이는 살아도 태양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태양은 그저 낮인지 밤인지, 뜨거운 여름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의미 밖에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것이 낫다던 잠언 기자의 말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내 생명과 존재의 모든 것, 지금 내가 누리고, 경험하는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의존적’ 고백인 겁니다. 성경은 이 사실이야 말로 삶의 토대와 근본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큰 소리를 쳐도 인생은 마치 ‘태양’이 꺼져버리는 것처럼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겁니다.

    다시 한번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의존되어있고, 또한 무엇을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과 삶,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것 만큼은’ 이라고 말하던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끝까지 묻고 물어 남게 된 마지막, 여러분이 의존되어 있던 그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라는 말이며, 의존적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이 내 생명의 토대라는 고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내 마음과 영혼을 의존할라치면 그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피곤하고 힘든데도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댈 수 없다면, 이유는 두가지 뿐일 겁니다. 첫번째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거나, 그리고 알고는 있지만  기대도 괜찮다고 할 만큼의 믿음이 없어서가 두번째 이유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거나 의존하지 못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늘도 어떤 영역에만 이르면 여지 없이 애당초 믿음이란 것이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낯설고 믿음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도무지 믿음이 생기질 않는다’고 힘겨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가 ‘믿음’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탓이 대부분입니다. 

    최면 검사를 받기 위해서 선행하는 테스트가 있습니다. 받아주겠다고 말한 뒤 눈을 감고 그대로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겁니다.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은 최면에 잘 걸리고, 상대를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국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고 의존하는 데에는 얼마나 합리적인지, 근거나 증거는 있는지는 부차적입니다. 애당초 믿음이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맡기고 투신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모두 내가 믿고, 의존하고 맡긴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이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의 마지막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한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진다거나 극적인 반전을 가져다 줄 증거도 표징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던졌습니다. 이제 주님의 영혼과 그분의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의존이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갓난 아이는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젖을 주면 먹을 수 있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워주어야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어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어떤 상황에도 세상 모른 채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제 아이가 어렸을 때 과제를 하다가 어려운 부분을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귀찮아 했지만 아빠다 보니, 어떻게해서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는 어찌해야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돌아보면, 정작 이 녀석은 발 뻗고 자고 있더군요. 그러고보니 지금 우리가 이처럼 힘겹고, 서글프고, 속상하고, 억울한 까닭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서, 그래서 맡기고 의지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4.

    오늘 복음서 말씀은 두 덩어리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24절부터 30절까지가 한 덩어리이고, 31절부터 마지막 37 절까지가 나머지입니다. 앞 단락은 두로지방에 가셨을 때 주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출신의 이방인 여인에 관한 이야기로 마태복음 15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후반부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신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수리아’와 ‘페니키아’라는 지역의 합성어입니다. 성서기자가 이름 대신에 출신을 기록한 까닭은 그녀가 팔레스타인 북부 출신의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튼 많은 경우에 이 본문은 포기할 줄 모르던 이 여인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자는 식으로 설교되고, 또 읽혀지곤 합니다. 표면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사실 본문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과 이 여인을 비교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어떤 편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것은 수로보니게 출신의 이방인 여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앞단락을 읽어보시면 다른 한편에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지난 주일 주님과 논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소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들 중에 ‘어느 편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결과는 명백할 겁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누구라도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손 꼽게 될 겁니다. 이방 여인이 하나님 신앙을 가졌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의 예상을 모두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오늘 마가의 복음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 마가복음 7:29b 

     

    라고 담백하게 전하고 있지만,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보이신 반응을 좀더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마태복음 15:28

     

    이 본문이 이방여인과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을 대조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대로 유대인들은 사실 믿음이 적거나 없다는 이야기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정말이지 ‘믿음’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괜시리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이방 여인에게는 있는데, 정작 하나님 백성이라 일컫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핵심일텐데 말입니다.

     

    5.

    여인의 딸은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비단 여인의 딸 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단락에 소개되고 있는 귀 먹고 말 더듬던 사람들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적어도 오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구약 본문인 ‘이사야’의 예언서에 기록되었던 ‘사슴이 뛰고, 말못하던 혀가 노래부르는 일,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일’처럼 기쁘고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놀라운 이적과 기쁨의 소식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힘차게 울려퍼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목격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믿음도 하늘에 닿을 만큼 깊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여기가 아닙니다. 이런 기적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고 있는 ‘완전한 구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마시고 기독교 신앙이 천착하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뿐이라는 이것 하나만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비록 걷지 못하던 자가 걷고 말하지 못할 만큼 암울함에 짓눌렸던 삶에 기쁨이 찾아왔다고 해도, 여전히 노래할 수 없고, 언젠가 뛰지 못할 날이 올 것이며, 물이 끊어져버린 인생처럼 벼랑 끝에 내몰리는 위기의 순간은 찾아오게 될 겁니다. 너무 비관적인가요? 하지만,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고 운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말씀안에서 물어야 할 것은, 어떤 현상들이 아니라 대체 ‘예수 경험’이 무엇이냐는 것 뿐입니다. 대체, 예수가 누구이길래,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길래 이런 놀라운 생명경험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를 만났던 이들이라며 누구라도 예외없이 이런 환희와 기쁨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주님앞에 섰던 이방인 여인은 오직 귀신들린 딸을 살려내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만 있습니다. 그녀의 딸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오직 예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개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이 없었던 겁니다. 이건 마치, 막상 죽음에 내몰리게 되면 그 동안 즐거워했던 것들도 덧없고, 힘들어 했던 문제들이나 포기할 수 없던 탐욕들도 다 지워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살아야 한다는 ‘생명’에 대한 갈급함만 남게 되니, 나를 둘러싸고 있던 가난, 건강, 비교와 평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들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워지게 되는 겁니다. 이 때만 비로서 우리는 주님께 갈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내가 지워지는 ‘자기 부인’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은 먼 이야기일 뿐, 여전히 자기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나는 믿습니다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만 남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없는 것을 주님안에서 찾았으니 주님께 의존적일 수 밖에는 없고, 세상은 줄 수 없는데 주님은 주실 수 있으니 주님을 믿을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이건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또는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우리 밖에 있는 구원이 우리를 찾아와야만 합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없고, ‘주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손잡아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열려라, 에바다’ 이 한 말씀으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모든 막혀 있던 것을 풀어주신 그 날처럼, 우리를 향해 건내주실 그 한 말씀 듣기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이미 우리 안에 찾아와 계시는 주님께 인생을 걸고 걸어가는 의존적 삶, 믿음의 걸음을 걷는 겁니다.

     

    혹시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막연하진 않나요? 주님의 약속과 가져다 주실 ‘구원’이 실감나지 않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야 말로 지금 귀 먹고 말 더듬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엿보는 ‘열림’의 역사는 우리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야만 합니다. 자기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삶은 늘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에바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직면하는 눈이 틔이고, 그분의 말씀에 귀가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들이마시는 공기 뿐만 아니라, 세끼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소소한 일상의 평화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마져도 새로워질 겁니다. 이미 내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구원의 삶이었음을 실감하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우리는 모두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기 문제로 떨어져버린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시는 말씀을 듣는 이들이 될 것인지, 인생을 걸어야 할 선택 앞에 있습니다. 내가 큰 사람은 결코 주님께도 기댈 수 없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빌 4:6-7)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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