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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성령강림후 스물 두번째 주일 ( * 창조절 8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0. 17. 16:0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욥기 38:1-7(34-41) 혹은 이사야 53:4 - 12
응송 | 시편 104:1-9, 24, 35c
2독서 | 히브리서 5:1-10
3독서 | 마가복음 10:35-45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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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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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랄 수 있는, 한 가지
1.
제자들 사이에 작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서 사람들 앞에 드러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급해졌는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찾았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 마가복음 10:35b
그들이 요구하려는 것은 훗날 주님의 좌우편 한자리씩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방향이 틀렸다는 것만 제외하고 보면, 이들이 주님을 예사롭지 않은 분으로 믿고 있던 것 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제 몫을 챙기려고 했지만, 결국 이들의 사특한 의도는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다른 제자들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선수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탓인지 아니면 이미 주님이 이들에게 한자리씩 약속했다고 속단한 것인지, 마가는 다른 제자들이 이들에 대해 ‘분노’했다고 쓰고 있습니다.(41)
2.
이 일이 있기 바로 직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은, 다름아닌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런데도 곧장 이런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른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마치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전혀 예수님께 무관심한 채로,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님곁에 머물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가져오셨음에도, 여전히 오늘의 교회도 땅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나 우리의 형편을 마냥 무어라 타박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이곳이고 또한 여전히 이런 삶을 살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입니다.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바람이 지혜롭다 싶은 까닭은 꼭 우리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요? 제 귀에는 그들의 ‘무엇이든’이라는 과한 요구가 자꾸만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고, 조금이라도 실패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들의 ‘불안’과 ‘조급’한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대체 이런 삶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우리 중에 이렇게 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얻고 이루는 사람이 있냐는 겁니다. 적어도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겉으로 보면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가까이 그 사정을 들여다보면, 눈물도, 아쉬움도, 절망도, 아픔도 베어있을 뿐, 바라는대로 살아가는 ‘복’으로만 채워진 사람은 정말 없더라구요.
게다가 ‘무엇이든’이라는 이들의 바람안에는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제자’라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구하려고 하는 것들이 과연 주님께도 귀한 것인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구할 만한 소원인지,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들어주실 법한 소원인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 마가복음 10:38b
주님께 한 자리 얻으려고 했던 이들이 정작 ‘당신께서 가고 계신 길이 십자가로 이어짐’을 모르고 있다는 이 사실에 주님의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또한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그들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지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요? ‘무엇이든’이라는 말안에 담긴 우리 자신이 바라던 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돈도 있어야겠고, 명예도 있어야겠고, 남부럽지 않을 만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이유는 다름아닌 그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정말 그런 것을 가지면 만족하고, 그런 것을 이루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얼마 만큼이면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시 아직도 ‘영생’을 구하러 왔다가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돌아섰던 부자청년처럼, 주님 아닌 다른 것을 향하던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3.
제자들이 정말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바랬던 ‘것’은 남들보다 ‘으뜸’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의 ‘종’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따지고보면 이건 지금 십자가를 향하고 계신 ‘주님’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으뜸’된다는 것이 정말 나쁜 걸까요? 사실 공부도 으뜸이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신앙에서도 으뜸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떤면에서는 오늘 교회마다 이런 것을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리고 제자들의 민낯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까요?
내가 ‘으뜸’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2등, 3등부터 시작해서 꼴찌까지의 타인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으뜸’이 되야겠다는 것은 ‘나는 2, 3등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제외한 누구라도 ‘꼴찌’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 너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비교’라고 하고, 비교를 강화시키는 것을 ‘경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경쟁’이 있고, ‘경쟁’은 ‘비교’를 통해서만 부추기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세상 모든 곳은 늘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라고 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비교를 부추기고 경쟁을 강요하는 세상속에서도 오롯이 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겉에 보이는 것을 채우려는 시류를 따르는 대신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내면을 튼실하고 알차게 채우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누군가와 비교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나’ 자신을 구원해 내고, 인생의 가치를 아름답게 길어올리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여튼, 제자들 모두 주님 곁에 있던 것을 기화로 한 자리 차지하려는 얄팍하고 사특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생명의 주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이익 앞에서는 이처럼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도, 주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던 겁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 마가복음 10:36b
그런 제자들에게 ‘가장 귀한 것’ 해주시기를, 그들도 가장 귀한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시는지요. 여러분은 무엇 해주시길 바라며 주님 곁에 머물고 계시나요?
4.
주님과 함께 삼년을 동거동락하며 듣고 배웠을 텐데 여전히 헛발질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란 별 수 없이 다 똑같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아무리 이 길을 따라 걸어도 ‘나’ 또한 변화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서글퍼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 싶었는데, 뿐만 아니라 ‘당신 정도면’ 이라고 남들도 치켜세워주고는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망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니 말입니다. 교육이나 훈련, 기도나 신앙생활을 강화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분명합니다. 제자들도 똑같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으뜸’을 최고로 치는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주님 말씀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지 않을까요?
1독서에서 우리는 ‘욥’과 만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생이란 고통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인물입니다.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그의 형편은,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습니다. 곧잘 인내하기는 했지만, 결국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격동에 휘말린 탓인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냅니다. 욥의 아내가 던졌던 말처럼, 금새라도 ‘하나님은 없다’고 떠나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보입니다. 결국 그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다고 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섣불리 그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쏟아내고, 회의와 불신에 떨어지고, 원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차마 돌아설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게 오늘 모든 성도들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서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그 시간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 부재앞에 서야만 하는 것이 우리 운명입니다. 사람도 없고, 세상도 내 편이 아니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게 될 때, 제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같고 버려진 것처럼 비참함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쁜 일에 몰두하거나 술이나 약물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어찌해서든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흔적을 찾아내려고 위안을 얻기 위해 열광주의나 열심주의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밤이 찾아오고 홀로 남겨지게 되는 고독한 시간에 내동댕이 쳐지는 순간, 이 모든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욥’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니, 사실은 하나님이 절망과 불신에 떨어져벼렸던 그를 찾아내신 겁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욥기’서 전체의 핵심입니다. ‘욥기’는 ‘인생은 고난’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질문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결국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 욥기 42:2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포함한 모든 것의 처음을 여시고 마지막을 닫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식을 근본적으로 아득히 뛰어넘는 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자신보다 작은 일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평상시에는, 이런 말씀이 쓸모 없고 하찮고 무기력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 욥기 42:5
별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때까지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고, 세상이, 그리고 문제가 하나님보다 더 커보일 겁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행복도 만들어 줄 수 없고, 불행이나 고난도 극복할 수 없다면, 믿음이 왜 필요하고 살아서 무엇하는가? 저는 요즘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것 하나만을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제 눈앞에 열린 고난의 문도 해결할 수 없으면서, 되도 않게 세상을 구원하겠다느니 호들갑 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설득이나 설명이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건’에 온 마음을 집중하며 살아가자는 겁니다.
6.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 마가복음 10:45
주님은 당신의 존재의 목적을 ‘섬기러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제자들처럼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헛발질하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섬겼다는 ‘공로’를 드러낼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한자리 차지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사특함 때문일까요? 교우 여러분, 참된 신앙이란 ‘우리로부터’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에 마음을 담는 겁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 앞에서 철저하게 무능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가 ‘나’로부터가 아닌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뼛속깊이 ‘자각’(自覺)하는 겁니다.
여전히 죽음은 시퍼렇게 살아있고, 삶은 무겁습니다. 비록 ‘하나님 부재’라고 하는 처절한 밑바닥까지 버려졌을지라도, 그런 곳에서조차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내시고 함께 하는 분이라는 것을 폭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들이 아니었니까?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 운명을 걸고 살아내셨습니다. 쓰러질 것처럼 지치고 무너질 것처럼 아플 때라면 ‘십자가’에서 ‘부활’까지 나아가신 주님만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분이 구하라 하셨으니 주님께 구하시고, 찾으라 하셨으니 주님안에서 찾으시고, 또한 두드리라 하셨으니 하늘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찾아와 ‘계시는’ 주님만 믿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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