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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1/17 성령강림후 스물여섯 번째 주일 * 창조절 1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1. 15. 13:3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기상 1:4-20 혹은 다니엘 12:1~3

     응송 | 시편 113 혹은 사무엘기상 2:1-10

    2독서 | 히브리서 10:11-14(15-18)19-25

    3독서 | 마가복음 13:1-8

     

    # 설교음원

    http://naver.me/Gxkd5lsQ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EBBLnzOF12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Under the Command of Titus, David Roberts  -  http://jerusalem.nottingham.ac.uk/items/show/62

     

    하나님 '응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1.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주님께서 한해를 살아온 우리의 걸음과 동행해주셨음을 기억하며 감사를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슬프고 괴롭고 낙담하게 되던 시간들, 특별한 어떤 사람에게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올 한해는 우리 모두에게 버겁고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고 보니 그 동안 간절히 때로는 울부짖으며 드렸던 기도의 응답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때 주님의 응답은 언제나 희미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응답을 구하는 막막한 기다림에 서 있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감사의 날, 여전히 간절하고, 여전히 아픈 어떤 이들의 기도의 자리에도 기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고백하는 은혜의 날이 되기를 빕니다.

     

    구약 1독서 계속 본문인 사무엘기에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본문은 아이를 낳지 못하여 그의 어머니 ‘한나’가 경험할 수 밖에 없던 서러움과 멸시, 그리고 속상한 이야기를 비교적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런 문제를 제 손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문제로 인해 제 탓인 것처럼 형벌처럼 무거운 짐을 질고 살아가는 분들은 많습니다. ( 상처와 아픔에 내몰리는 그런 분들에게 위로자 되시는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

    우리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나 ‘역경’앞에서 속절없이 ‘왜?’라는 물음에 떨어지곤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병약하게, 못나게, 능력없게 그리고 이런 가정에, 이런 나라에 태어난 걸까?’, ‘왜 나에게?’…

    차라리 왜?라고 하는 물음에 속시원한 답변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극복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런 현실을 인내할 수는 있을겁니다. 하지만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돌아오지 않는 답변 때문에 더 비참하고 비루해진 아픈 삶의 흔적만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음을 안고 서둘러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구원, 더 나은 미래, 더 놀라운 의미와 같은 이유와 납득할 만한 까닭이 있다면, 우리는 고난을 얼마든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드리거나 아니면 ‘신의 이름과 뜻’이라는 명분으로 체념할 수 있을테니까요. 눈물속에 몸부림만 치던 ‘한나’도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20절 ‘주님께 구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그녀의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간구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2.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이런 말씀은 때로는 위로가 아니라, 더 큰 부담이나 거부감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괴롭고, 서러우며,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만, 그런 내 삶에는 이런 기쁨의 이야기들이 일어날 조짐도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속상한 이들에게 또 ‘얼마나 더 간절하고, 얼마나 더 진실하며, 얼마나 더 눈물을 흘리시라’고 말해야할까요? 정말 ‘믿음’의 수준이 문제라고 한다면, ‘대체 어느 정도의 믿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있을 법도 한데, 성경에는 이와 관련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린 한 대목은, 길을 잃어버리게 할 만큼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 사무엘상 1:6

     

    애당초 ‘한나’에게 찾아왔던 고난, 눈물로 기도할 수 밖에 없던 그녀가 겪어야 했던 서러움의 시간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고난’을 가져다 주신 하나님께서 또한 기도에 응답하고 구원하셨다는 이런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흔들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응답을 놓치게 만드는 걸까요? 

    선택본문으로 주어진 것은 ‘다니엘’서 12장 입니다. ‘다니엘’서는 주전 2세기 경에 기록된 ‘묵시’의 말씀입니다. 총 12장 중에 전반부인 1~6장은 주전 6세기에서 5세기 경 포로로 끌려왔던 ‘다니엘’과 친구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살아냈다는 놀라운 간증들이 담겨있고, 후반부인 7장 이후에는 곧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현재 그리고 장래에 일어날 암울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묵시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배경안에서 읽혀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천사장 ‘미가엘’이 등장했습니다. 그가 왔다는 것은 이제 포로기의 수치가 끝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 다니엘 12:1b

     

    하지만, 묵시를 통해 예고된 이 백성들이 직면하게 될 현실은 이런 기대와는 한참 어긋나 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바사와는 차원이 다른 또 나라가 일어날 것이며 그로 인해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더 힘든 역경과 고난의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대체, 천사장 ‘미가엘’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걸까요? 

     

    3.

    복음서 말씀인 마가복음 13장도 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21장과 더불어 ‘소(小)묵시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닥쳐올 ‘종말’에 대한 암울한 예고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막 13:2b

     

    주님 곁에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라면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무너졌던 이스라엘 패망의 날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섬칫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을 겁니다. 그날, 우리 편이신 하나님, 그분의 집인 성전이 있는 한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던 그들의 신앙은 땅바닥에 처참히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난 이후, AD 70년 경 유대 전쟁이 발발했고 성전은 말씀 그대로 무너졌으며 이스라엘이 초토화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임한 것처럼 악몽같은 날이 또다시 찾아온 겁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라고 하는 한 문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고난이나 그에게 임한 ‘구원’의 날들도, 포로민이었던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리고 주님에 의해 선포된 ‘종말’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전도나 선교의 결실들이 채워지고, 돌 하나라도 더 쌓아 성전을 높이 올려야 할 텐데, 주님은 오히려 이 성전을 무너트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하던 바램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거나 하다못해 평화하고 평온한 날들을 기대하던 우리로서는, 그러니 이런 현실앞에서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맞는가?’라는 심각한 의문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생각이 모두 부정되고 뒤엎어지고 말았으니까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 마가복음 13:4

     

    그렇다면, ‘대체 그런 일은 언제 일어날 것이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의 물음은, 타당합니다. 언제 일어나는지라도 알아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눈치라도 챌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도 없던 고난과 역경 앞에서 우리가 물었던 질문과 닮아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억울하지 않고, 알수 있다면 답답하지 않을 수 있고, 알고 있다면 실족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4.

    하지만 주님이 해주신 말씀만으로는 ‘그날’,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오는 것들인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주님은 우선 그날이 이르면, ‘속이는 자’들,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이는 자’들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속이는 자들’이라니까 ‘신천지’같은 사이비 단체의 교주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구원자’라 불리울 법할 만큼 매혹적이며 그럴 듯해 보일 겁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쉽게 속아 넘어갈테니 애당초 ‘징조’를 알아차리지도 못할 겁니다.

     

    두번째 징조는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는 전쟁의 소문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진과 기근도 일어날 것이랍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이 곧 오신다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세 운운하는 허튼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류의 역사안에는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본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통해, 이런 식의 ‘종말’이라는 것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의 특징이 뭘까요? ‘생명’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종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전쟁과 지진과 종말의 특징은 ‘평화’가 깨어지고, ‘자유’가 유린당하고 세상 그 누구도 생명을 가져다 주거나 보장해 줄 수 없는 ‘생명’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 복음서의 말씀을 함께 읽던 당시의 교회 공동체는, 믿음을 지키며 살고 있는 자신들의 오늘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라고 실감하며 살았습니다. 박해와 핍박, 순교로 얼룩진 그들의 삶이 늘 그와 같은 세기말적 시간이었을테니까요. ‘종말’의 징조를 깨닫는다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어떤 날’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안에서 죽음과 공포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겁니다.

     

    5.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성경안에서, 적어도 어떤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으로는 납득이 되고,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우리 각자가 직면해야만 하는 현실에서는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단답형으로 묻고 답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왜?라고 물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명확한 답을 요구했던 우리의 물음은 채워지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인지 질문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의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 사무엘상 2:9 - 10

     

    ‘한나’의 고백처럼, 이런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고 싶지만 그것이 쉽질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믿을 만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진술된 숱한 증언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하셔야 하는 일에 신실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대나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대로 믿으려는 경향에 익숙한 탓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치명적인 상태에 떨어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말씀’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그것 말고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다. /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 | 시편 113:4 - 9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가요? 여러분이 기대하고 목격하는 것과 같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보다 높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낮추고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수준으로 높여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유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덮는 ‘은총’과 ‘복음’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드러내주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능력과 모든 위엄이 되시는 당신안에 거함으로서, 생명의 능력안에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 자신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되기 위해 기꺼이 찾아오시고 당신의 모든 것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이나 응답을 실감할 수 없을 겁니다.

     

    6.

    ’하나님의 나라’는 자격과 조건을 성취해서 들어가는 ‘어떤 이들만’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차별적인 선물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해, 영원한 징표를 세우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가장 밑바닥의 인생, 세상이 모두 하나님께조차 저주를 받은 인생이라고 포기했던 ‘십자가’로 추락했던 예수를,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임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조차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절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던 그때에도, 여전히 함께 계심으로 응답하셨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왜’?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그 하나님께서 또한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주님으로 하여금 오롯이 ‘십자가’를 향할 수 있도록 지켜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실에 운명을 걸고, 오늘 허락된 한 걸음만 나아가십시오. 그 한걸음이 한해의 끝에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게 한 것처럼, 삶의 끝자락에서도 ‘참으로 내 인생은 온통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고 감동하는 복을 가져다 줄 겁니다. 우린 그런 놀라운 은혜안에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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