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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절 제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1. 29. 21:1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33:14-16
응송 | 시편 25:1-10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3:9-13
3독서 | 누가복음 2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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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으면
1.
교회력의 새로운 절기인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이르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것이 악마적인 힘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로 인한 것이든 관계 없이, 시대의 패배자처럼 신음하고 아파하던 상황과 처지를 벗어던진채 ‘희망의 날’이 오고 있다는 힘찬 함성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다시 오겠다던 주님의 약속이 인류를 구원해 내겠다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임을 믿기에, 우리를 찾아 오실 길을 밝히기 위해 마음의 초를 밝힙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뢰는 날마다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승천신 이후로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천년이나 이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받을 만큼의 유의미한 변화는 보이질 않습니다. 전쟁과 폭력은 멈추어지지 않고, 환경과 기후는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오히려 이천년 전 그 때보다 상황이 더 엉망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굳이 ‘이천년이 지났지만 아직도’라는 세상의 조롱과 빈정거림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안에서 조차 ‘다시 오겠다’던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림’의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고심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너무 믿음이 좋아서거나, 아니면 타성에 떨어진 냉소적 신앙이 되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대림절’ 희망의 초에 불을 밝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이 물음을 안고 1독서 구약본문인 예레미야를 읽습니다. 이미 25장에서 ‘예레미야’는 ‘반드시 유다가 망하겠고 그후, 70년 뒤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망할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희망의 날을 외칩니다. 우리는 그의 말대로 70년 뒤에 유다가 해방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날이 오면 ‘한 의로운 가지가 다윗에게서 돋아나고, 세상에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놀랍게 들립니다. 내일을 예언하는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언하던 당시가 주변 강대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할 것이 불보듯 뻔해 보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날이 오면’이라는 예언자의 외침을 곧이 곧대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이건 누구라도 별 수 없습니다. 현실이 암담하고 절망스러울 때, ‘희망’의 노래는 터무니 없고 귀찮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어떻게 그렇게 외칠 수 있던 걸까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예언자’인 그의 귓전에만 들리는 ‘하늘의 소리’라도 있었던 걸까요?
평범한 우리는 늘 당장 제 눈앞에 있는 것만 보게 됩니다. 처해 있는 상황이나, 감당해야만 것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우리 삶을 온통 뒤덮고 있는 ‘일상으로의 퇴락’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황에 떨어지면 당장의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지고 살아내야 하는 것들만 남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것을 인간의 불행인 ‘죄’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신앙’을 가지고는 있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염려와 두려움에 노출되는 순간, ‘하나님’을 쉽게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고려의 대상에서 밀려납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당장’의 생존 문제에 떨어져서 보게 되니, ‘유다 민족의 운명은 끝났다’는 합리적인 결론만 남게 됩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결론이며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바벨론’에 종처럼 길들여져 적당히 살아가든가, 아니면 항쟁하다 죽든가 둘중에 하나의 선택 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런 너무나 사실적이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해석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망해가는 조국의 운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해석했습니다. 그리곤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 3 의 길을 제시했던 겁니다.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열린 내일, 희망의 내일이 시작될 거라는 결론입니다. 그가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삶을 이해했고, 역사를 들여다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이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불러내신 것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이 민족의 역사가 이렇게 끝날리는 없습니다. 이게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시선입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삶이 무너졌고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으며, 간절한 기도가 수포로 돌아갔는데, 이게 무슨 말씀의 성취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결국 유다 백성들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3.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하나님만을 믿으며 산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오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씀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불가능’한 현실에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씀을 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죽음’앞에서도 의연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혼자만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고독한 현실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겠다’는 마음이고, 눈에 펼쳐진 절망스러운 현실 너머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 그분께 운명을 맡기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모두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이게 갑작스레 될리가 없습니다. 이건 그가 그 동안 그들 민족에게 주어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이야기와 함께 해왔던 자기 민족의 역사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을 얼마나 치열하게 들여다보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오늘을 먹고 사는 일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이끌어가고 계시는 인생의 걸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제국들이 하루 아침에 망하는 것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가 하면 금새 무너질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별볼일 없는 인생이라도 망하지 않는 것도 보입니다. 우리 편에서 세우는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무너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망하는 것도 아닌 겁니다. 살고 죽는 것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은 그가 도달한 결론이었고, 그가 살아가는 삶이었고, 선택을 결정짓는 기준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의 과잉’에 내몰린 탓입니다. ‘세끼’ 먹을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생명은 위협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내일은 또 어떻게 하겠느냐?’는 윽박지름으로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아세웁니다. 오늘의 만족은 실패자들의 자기 위로처럼 몰아갑니다. 지구안에 있는 한, 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날 수 없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이런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문제는 두번째입니다. 하나님 말씀, 특히 ‘예언’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면 어떨까요?
과연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고(15), 사람들이 ‘주님은 구원이시다’라고 말하게 될 것(16)이라던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하지만 실제 그들의 역사는 우리의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역사는 억울함과 고통과 눈물이 마르지 않는 불행한 시간의 반복이었을 뿐입니다. ‘바벨론’ 뒤에는 ‘페르시아’, 그 뒤에는 ‘헬라’,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기대했던 ‘구원의 날’은 한번도 경험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예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4.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의 말을 곰곰히 들여다봅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공평’과 ‘정의’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평’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공평’이 될 수 있고, 이런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정의’가 다른 누군가를 ‘부정의’한 삶으로 내몰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저 어느 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까?를 고민해 왔을 뿐, ‘누구나’ 공평하고 정의롭게 대우받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니 애당초 세상이라고 그런 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안에서 원인을 찾자면 결국 끝없는 탐욕에 내몰리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이룰 수 있는 답은 한가지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열어놓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보시기에 좋았던’ 그때는 그분만 이룰 수 있습니다.
늘상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세상’안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생명’과 ‘부활’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안에서 선지자가 예언했던 공평과 정의와 구원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대체 무엇이 예수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공평’이고, ‘정의’이며, ‘구원’입니까?
‘누구나’ 공평과 정의로 대우받고, ‘누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예수’안에 있어야 할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또 반대로 그것이 있기에 예수는 우리 모두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불의와 불법, 세상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초래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달려 죽었던 그 ‘예수’안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참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 생명은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진정한 공의와 정의, 구원을 이루는 참된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생명이 약속의 날에 ‘다시 오실’ 그분과 함께 우리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독한 어둠속에서도, 세상의 폭력과 암울해 보이는 내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림’의 초를 밝히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5.
꽤 그럴 듯해 보이고, 자부심도 일어나겠지만 ‘생명’은 ‘이렇게 하자’거나, ‘저만큼 해내자’는 방식으로는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없는 사람이 오거나, 세상 전부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시들어가는 꽃한송이 조차도 살려낼 수 없는 우리로서는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에 잇대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믿는다고 해도, 또 어떤 이들은 도무지 믿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믿음이 있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삶을 천국으로 길어올리는 말씀의 능력을 충분히 실감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 누가복음 21:25- 27
주님은 분명히 ‘마지막 날’이 이르게 되면 이런 ‘징조’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은 이 말씀을 ‘징조’를 볼 수 있으면 누구라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듣곤 합니다. 정말이지 ‘징조’를 보고도 ‘주님의 날’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징조를 보았다고 해서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 누가복음 21:36
‘마지막 날’에 대한 주님 말씀의 결론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징조’를 보게 된다고 해서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하며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치게 될 자연재해나 사건들일지라도, 오히려 기도하며 깨어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세상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가진 것’과 ‘비어있는 것’ 아니면 ‘행복’과 ‘불행’으로만 삶을 규정하는 거짓된 선동으로 몰아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고 돌아서지 않는 한, 주님의 날을 가늠할 수 있는 ‘징조’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셨던 ‘생명’ 사건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며 사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그러니 바쁜 세상살이 가운데 그럴 여유가 있겠느냐?고 한다고 해도 별 수 없습니다. ‘낮’은 깨어있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고, ‘생명’은 살아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주님 말씀대로 ‘기도’하고 ‘깨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기도’란 본래부터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의 운명이 주님안에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직전 겟세마네에서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26:41). 그러니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시험에 넘어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오직 '기도'하고 '깨어'있는 것, 깨어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그러니 벼랑끝에 내몰리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찾아내려는 조급함에 내몰리는 대신에, ‘하나님은?’이라는 물음끝에 주어지는 답을 끝까지 기다려보십시오. 비록 그뒤에 주어지는 것이 ‘배신’이든, ‘절망’이든 아니면 ‘불행’한 ‘인생’으로만 보인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로 내몰린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스스로의 운명을 끝까지 일치해 가십시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망한다면 우리도 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이 주님안에서 발견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운명도 ‘부활’안에서 발견될 겁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간다면, 주님의 날은 그런 이들에게 성큼 가까이 와있을 겁니다. ‘주님의 날에 깨어 있는’ 우리에게 그 날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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