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5 성령강림후 3주
2017/ 6/ 25
본문 - 출애굽기 21:8 ~ 21
* 비디오 메모리를 비워두지 못한 탓에 금주는 설교영상을 기록하지 못하여, 설교문만을 실어 놓습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1 고통 / 그 현실의 삶
-1 퍽퍽한 세상살이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오늘 예배 가운데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한 주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신 여러분의 땀과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떠셨습니까 ? 이번 한주간의 삶은 기대와 실망, 소망과 낙담의 경계에서 어떤 흔적을 남기셨습니까 ?
세상에 아무런 문제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것은 현실속에서 내 고통이, 내 문제가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문제나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또한 저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문제를 경험하면서도 일어서는 사람과 문제에 매몰되고 침잠하는 사람이 있음 처럼 말입니다
쾌락과 고통중에 기억의 잔상으로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 사람들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더 오래 기억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속에서 만나는 문제들 ?
오늘 성서일과 제1독서 구약본문으로 주어진 창세기 21장의 본문은 다양한 갈등과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속에는 아브라함, 그의 아내 사래, 사래의 몸종 하갈, 그리고 사래가 낳은 아들 이삭,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 부러울 것이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우리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아쉬울 것도 문제될 것도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발단과 씨앗은 바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역사 이래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죽음과 소멸로부터 자신을 이 땅에 남겨둘 것인지에 천착해왔습니다 그래서 찾은 답은 바로 ‘후손’입니다 자신은 죽어도 자신으로부터 나은 자녀가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지 않는 셈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안에서는 땅과 자녀에 대한 것이 가장 큰 복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을 만큼 부유한 사람이었음에도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영원한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앞에 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자녀를 약속 하셨고 그 약속 그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75세의 늙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불안하였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 이전에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아브라함의 적자이며, 이스마엘은 서자인 셈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근 10여년을 약속을 기다리기는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라고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젖을 떼는 나이는 통상 세살이 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스마엘은 14살이나 더 많은 17세 즈음이었습니다
적자인 이삭이 젖을 떼는 날 그러니까 사망의 위험이 높은 유아기를 잘 넘긴 것을 기념하여 잔치는 벌이는 장면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9절 14살이나 많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고, 그것을 사라가 보고 말았습니다 14살 짜리가 3살 박이를 놀린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놀렸다는 ‘메차헤크’라는 말은 경멸하고 멸시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권자라는 사실을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비웃은 셈입니다
게다가 사라의 입장에서는 첩의 자녀, 그것도 자신의 몸종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적자로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못한데 아들 이삭의 상속자로서의 지위를 비웃는 이스마엘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좇을 것을 강청하였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누치 타볼렛’ 전통에 의하면 몸종이라도 주인에게 자식을 낳아준 이를 함부로 내좇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종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주는 경우는 가능했다고 합니다 사라는 이 근거를 들이대며 아브라함을 채근하였고 자신의 상속을 베풀 권한을 비웃은 이스마엘에 대한 사라의 요청은 정당하였기에 그 요청을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3 문제는 무엇일까 ?
본문 11절 - 아브라함이 매우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사라의 요청을 듣자니 하갈과 그래도 자신의 씨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좇는다는 것은 죽음으로 내 모는 일이고, 사라의 요청을 거절하자니 자신의 지위와 상속자인 이삭의 명분을 조롱하였음을 눈감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다
사라나 이스마엘의 문제는 모두 자신의 것을 지켜내려는 집착에서 비롯했습니다
하갈이나 아브라함은 사실 이 갈등의 피해자들인 셈입니다 상속이라고 하는 자신의 몫이 침해되고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 갈등의 원인인 셈입니다 애당초 이스마엘이 이삭의 상속분에 대한 걱정, 자신의 상속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자신의 아들의 상속분이 침해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에게 없었더라면 이런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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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제가 찾아오면 우리들의 반응은 ?
-1 근심
본문의 갈등속에서 아브라함의 반응은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국어 사전에 ‘근심하다’라는 말은 “해결되지 않는 일이나 문제로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사라의 요청과 하갈과 이스마엘의 딱한 처지 사이에서 아무것도 해결해낼 수가 없었기에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가 근심하고 이유가 무엇입니까 ? 내것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버려야 합니다 내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도 그를 사라의 말대로 내좇으라 하십니다
맞습니다 오늘 우리가 힘든 이유,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내 것’, ‘내 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내 아들, 내 딸, 내 자녀, 내 사업, 내 인생…. 그런데 과연 이땅에 ’내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
TV프로그램에서 한 여자 연애인이 아이를 키우는 고초를 소개했다 한창 말썸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천사같은 엄마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에 ? ‘남의 아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맞습니다 남의 아들이라 생각하면 애태울 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근심하게 되는 것은 ‘내 것’ ‘내 아들’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것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재산이나 재물이 아닌, 늙으막에 얻은 아들을 버릴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2 두려움
하루 아침에 살길이 막막한 광야로 좇겨나게 된 하갈과 이제 17세 즈음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찾아온 상황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내쳐진 이들은 브엘세바 광야를 방황하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다는 것은 이제 죽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광야입니다
좇겨난 몸이니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정말 죽음앞에 놓여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상황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꺼려하거나 무서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발 앞까지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앞에 이들은 두려움에 휩쌓였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처연하고 안타까운 기구한 운명입니다
-3 다양한 방법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들
- 1- 1 구원을 찾는 사람들
근심과 두려움은 우리들 삶의 자리에 익숙한 것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살고 있고, 또 이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삶은 모두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꺼려지는 상황과 두려움으로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수고하며 일하는 것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아둥 바둥하면서도, 꿈을 포기하면서도 자신을 내어모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러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구원자’를 찾아 방황하는 인생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구원자로 여기고 돈을 향해 천착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문화를,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을, 또 어떤 사람은 평판이나 도덕성을 구원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인 근심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구원해줄 ‘구원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 1 -2 답은 있는가 ?
구원자를 찾아 헤매이지만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또 다시 낙담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기도 합니다 물 떨어진 듣는이 하나 없는 광야에서 통곡하는 모자처럼 오늘 우리들의 삶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통곡하듯 살아가는 시가들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서러워 하갈은 울고 있습니다 이제 청소년인 이스마엘도 서럽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출신이 서자인 것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문에 황량한 광야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통곡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모두 실상 이런 답없는 현실에 던져진 존재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문제들이 근심과 두려움이 삶을 덮고 있습니다 구원자가 없는 상황속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것은 물이 떨어질 때까지 광야를 해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서러운 사람들입니다
3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나 오늘 본문속에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됩니다 근심과 두려움, 그 인간 본연의 고통의 자리에, 구원자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것’에 놓아야만 하는 문제 앞에 ‘혼자만의 결단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무도 도울 수 없고,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는 광야에 버려졌습니다 스스로는 해결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속에서 모두가 구원자가 필요한 자리입니다
- 1 우리가 믿는 하나님
모양이나 사안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이나 하갈, 이스마엘처럼 근심과 걱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우리를 강요하고 기만합니다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땀흘리라고, 돈을 벌으라고 우리를 내몹니다 하지만 애당초 우리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세상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앞에서 계속 근심하라고 채근하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근심거리가 생기거나 두려움의 문제가 다가오면 문제 자체가 아닌, 근심과 두려움에 온통 지배를 받고 맙니다
그런데 근심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과 죽음의 목전에서 두려움에 휩쌓여 통곡하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이 전하는 말과는 다릅니다
근심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12절 ‘근심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죽음의 직전에 서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이 불행한 모자에게는 17절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
근심이나 두려움의 지배를 받지 마라는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개미지옥에 빠져들 듯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삶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 2 구원은 하나님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근심 거리에 대해 하나님은 ‘버려라, 버리지 마라’의 선택지가 아닌, 제3의 답을 제시하십니다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이스마엘이 너의 상속자로부터 버려지지만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것이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것이라 버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십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 즉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 애당초 우리는 문제로부터 벗어날 구원의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된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두번째, 자신 뿐만 아니라 눈앞에 있는 아들 이스마엘앞에 놓인 죽음에 두려움의 통곡을 쏟아놓고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면,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 ….
‘무슨 일이냐?’는 말씀은 내용을 모르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너에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도전입니다 실상은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내 눈에 죽을 것 같고 내 생각에 죽을 것 같아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19절 하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밝아지고 보니 즉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보니, 샘이 보입니다 생명, 살아냄이 하나님 손에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저 아이가 누구입니까 ?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의 이름뜻이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몸종과 서자 이스마엘의 신음을 들으셨다
: 하나님은 신분, 성별, 학식, 배경에 차별이 없으시다 신앙의 기간에도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전심과 진심으로 나아오는 자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책임지시는 분,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걱정하고, 우리는 혼돈 가운데 머물지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살려내시고 주관하시는 분, 능히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애당초 우리들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씨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것 아닌 것을 내것으로 여기고, 내 능력 밖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더욱이 답을 갖고 있지 못한 세상이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내모는 길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챗바퀴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이 없습니다 늘 허무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 삶의 구원, 생명의 구원은 우리 안에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Extra Nos !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인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 우리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수준에서는 돈이, 명예가, 재력이 구원의 문으로만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내셨습니다
4 오늘 우리에게 구원은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발전하고 살만해 졌다고 하지만 늘 위기와 갈등, 고통의 문제앞에 던져져있습니다 기후의 문제가, 핵위협과, 전쟁, 기근의 문제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들의 삶은 다양한 문제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근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휩쌓일 수 밖에 없는 문제들입니다 구원이 우리 안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이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나의 삶의 구원이 주님안에 있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책임지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구원의 현상은 보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처럼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려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눈을 밝혔을 때, 샘물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그곳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근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심하지 마라고 하시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