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017/ 07/ 02 성령강림후 4주

ViaNegaTiva 2017. 7. 2. 14:35

본문 - 창세기 20:1 ~ 14 / 마태복음 10:40 ~ 42


https://youtu.be/uqsYtV2kKoY = '클릭' 하시면 설교 영상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 순종 '  믿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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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인간측의 ‘순종’ 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에게 말씀을 들어야하는 이가 순종해야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마땅하다 여겨지는 그 순종이 우리 삶에 쉽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순종을 이루지 못해 패망하고 스러진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니 거기까지 미치지 않아도 순종함 보다는 내 뜻의 이루어짐에 더 간절한 우리 모습만 보아도 순종이 쉽지 않은 것임은 분명합니다


‘순종’은 말 그대로 ‘순순하게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순순함’, 일말의 의심이나 저항없이 순순하게 따르려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왠 남성이 슬쩍 다가갑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무말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갑니다 그 남자는 누구일까요 ? 아빠입니다 만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끌고 가려는 손을 뿌리치려고 하거나 울어버릴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을 때 순순히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동물을 키울 때 처음 부딪히는 장벽은 먹이를 주는 손길을 잘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인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신뢰가 쌓이고 나면 다른 이들에게는 사나운 짐승도 제 주인에게 만큼은 더 없이 순한 존재일 뿐입니다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한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신뢰이겠지요 신뢰가 없을 때 순순함이 아닌 경계심이 방어기제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런면에서 보면 의심이나 회의하는 것도 또한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그분께 순종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주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하고, 신뢰함이 있으니 실재의 삶 가운데 자연스레 순순히 살아내고 따라가는 따름이 뒤 따르게 되는 것이겠지요


2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기막힌 이야기로 채워져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 있는 시간이나, 재물을 드리기에도 아깝고 그렇게 쥐고 있는 손을 열고 내어 놓으라는 말씀에 순종되지 않는 우리인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자식인 이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결단일까요 ?  

무조건적으로 믿으면 할 수 있다는 식의 명제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또는 ‘신앙’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외치는 이런 말은 사실 ‘나’의 이야기가 아닌, ‘너’의 경우를 강요하는 폭력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아들을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오늘 이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 질환이나 광기에 물든 맹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본문속에서 만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이야기일까요 ?

우리는 지난주 성서일과 제1독서로 창세기 21장을 읽은 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강요로 인해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좇아야만 했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자녀,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이 구원해야할 자녀로 여겼기에 심히 근심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셨고 그와 함께 계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통해 모든 구원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마엘을 내좇으라는 사라의 뜻을 좇아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좇으라시던 하나님이, 오늘은 자신의 본처로부터 얻은, 약속의 성취로 얻은 그 아들의 생명을 내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미 품안의 자식을 한번 잃은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혈육인 이삭의 생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선한 하나님이 맞는 것 일까요 ?

본문 3절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잡아야 하는 모리아산을 향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21장에서 14절 이스마엘을 내좇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을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21장에서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이후였지만 오늘 22장에서는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만 하셨을 뿐, 어떠한 약속도 하시지 않으셨음에도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섭니다

설마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 아니면 그냥 말씀을 따르는지 아닌지 떠보시려는 것으로 여겼을까요 ? 그것도 아니면 혹시라도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


3

아브라함의 순종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이스마엘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을 불신하였기에 생겼던 아들임에도, 게다가 몸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셔서 친히 함께 하시고 생명을 구원하시고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이미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어떤 신들처럼, 자신의 뜻을 채우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도 취하는 악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거나 제 맘에 들지 않으면 협박이나 폭력적인 강압을 일삼는 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생명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 신뢰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순종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르고, 그분의 뜻은 우리의 기대나 욕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절망을 경험할 때가 더 많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허망한 욕심이나 바람을 무너트리시는 하나님 경험이 더 많기에 내가 바라는 것과 반대를 요구하시는 순종의 길은 어렵습니다 먼저 나를 이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눈여겨 보셔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명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그의 순종으로 나아가는 행동을 지배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 하나님의 말씀에 순순히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이른 아침 일찍이 일어나 말없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기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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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이겨내고, 순종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실재 우리의 삶의 경험과 기억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치열한 결단과 끊임없는 투쟁의 삶 가운데에서만 잉태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의 고뇌를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21장에서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통과한 22장에서도 아브라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 소용돌이 속을 통과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쓰러질 수 있습니다 낙담할 수도 순종함을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떨어내고 잘라내듯, 불신의 마음을 잘라내면서 걷는 모리아 산을 향한 길위에 아브라함의 걸음은 실패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에 휩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내 아들 이삭… 하지만 내 손안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낼 수단은 사실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요청이 아니어도 그 아들의 삶 가운데 찾아올 위험과 절망에서 그를 지켜낼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이루어짐을 이스마엘을 통해 경험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아브라함이 본 것은 ‘지금’이 아닌, 하나님이 이루실 ‘내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더니 광야에서도 이스마엘이 살아날 샘을 준비하셨고, 그의 삶도 이끌어 가셨던 하나님이 그 말씀을 순종하며 나아가는 이 절망과 죽음같은 끝에도 마침내 살아날 길을 예비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의 길 끝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 본문 14절은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숫양) 예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것, 내가 채워야하는 빈 삶이 아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삶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 내가 채우려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가 얻으려는 것은 결국에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나마 지켜낼 수도 없지만,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은 우리 영혼을 만족시켜주시고, 풍성하도록 채우십니다

지금까지 걸어오신 여러분의 땀흘림이 채운 것이 무엇입니까 ? 지금까지 건강도, 사랑도, 행복도 담보잡힌 채 달려온 여러분의 삶에 지켜지고 남아 있는 것은 또한 무엇입니까 ?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종함이라는 행동을 지배하는 생명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경험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아무리 달려도 만족할 수 없던 걸음이었다면,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채우시고 예비해주시는 ‘내일’을 경험하고 누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5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채우실 내일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제3독서인 복음서 마태복음 10장 4:~40 ~ 42이며, 10장은 제자 파송의 장,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사명의 삶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시는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제자 ( 예수의 증인 )로 살아간다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길이지만 역시나 삶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아픔, 상실감, 두려움,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암초들이 그들의 길위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지치고 아파 더이상 걸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맡기신 선교적 사명을 붙들고 ‘순종함’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에게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 아브라함의 순종앞에 준비시켯던 여호와 이레는 오늘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서는 또한 어떻게 경험될 수 있을까요 ?


40, 41절까지는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여호와이레, 즉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갚아주심이 있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순종하며 나아가면 여호와 이레의 은총이 약속으로 주어질 터이니 어떻게 먹을지, 쓸지, 살아갈 것인지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약속은 42절에서는 실천적인 명제로 확장되어 나타납니다

42절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라고 하는 내일의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제자들에게 되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는 자의 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 누군가의 도움과 채움으로 만족하는 이가 아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사람, 누군가에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손이 되어주어야 하는 이들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도움을 받고 채움을 바라는 사람에서 도와주고 채워주는 사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너머 사랑해주는 사람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가셨고, 아버지의 뜻인 인류의 구원을 이룸에 자신의 목숨과 삶을 내어던지셨습니다

그분의 순응의 길은 참으로 매서웠고, 하나님은 순종의 걸음을 걷고 있는 예수의 삶 가운데 늘 채움과 이레의 손길로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독 최후의 한 걸음이었던 십자가에서 만큼은, 그 결정적인 걸음안에 맺혀있는 아들의 통곡과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경험한 하나님의 침묵은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의 순종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의 미래가 되었고, 그 미래는 믿는 모든 자들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 자체가, 예수의 삶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이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당장 자신들의 삶의 문제가 아닌, 세상을 향한, 누군가를 향한, 외롭고 고독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레가 되어야만 합니다


타인을 향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로 내미는 냉수 한그릇은 기억의 힘이 나를 이겨낼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준비되어지는 그곳이, 한 그릇의 냉수를 전하는 내미는 손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하고 있는 곳임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