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8/ 20 성령강림절 11주
본문 - 창세기 45:1 ~ 15
https://youtu.be/buQS9iBA8Qo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평화하게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들'
평화를 구하는 시대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풍성히 임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여러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락함과 안정감이야 말로 가장 기저의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안정감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인간은 행복이 아닌,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것을 더 가지려는 욕구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켜내려는 욕구의 지배를 충족하기 위해 수고하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유별나거나 섣부른 욕망과 꿈을 가지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저 지금 내게 허락된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고 지켜내려는 소박한 몸부림이 아니겠습니까 ? 그렇게 마음 상할일이 많아도, 몸이 힘들어도 또 그렇게 윗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 가며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이지만 그 틈 바구니에서 살아내보려는 것도 사실 모두 같은 이유, 동일한 본능에의 순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그런 안정감을 다른 표현으로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1. 평온하고 화목함. 2.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이라고 정의됩니다
평화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 맑고 높은 하늘, 드넓은 초원, 한가로이 뛰어노는 여린 동물들, 아침 햇살 스며드는 아침의 침실, 엄마 품에 안겨 잠든 아가의 미소 …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이런 이미지의 평화는 실상 우리 삶에서 지속성을 가지고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평화는 우리의 것으로 실현되어지기가 쉽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생각속에서 흩어지고 마는 찰라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평화’의 가치는 더욱 고귀하기만 합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세상의 모습은 평화가 깨어지고, 갈등과 분쟁속에 내몰린 우리 현실을 드러내보입니다 한 개인으로부터, 가정,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전체가 갈등 없는 안정과 평화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테러와 전쟁, 미국과 북한, 한반도 주변국들의 정치, 역학 관계속에서 초래된 갈등들, 살충제에 오염된 달걀 파동,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건과 사고들은 우리 삶속에 보장된 익숙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감마져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삶은 늘 예측할 수 없는, 아니 결코 바라거나 소망하지 않았던 일들이 시시각각 찾아와서 초래하는 평화 없음에 직면하고 있고, 모두가 이 불화한 시대속에 함께 버성기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평화’의 결핍, ‘평화의 상실’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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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발견되어지는 갈등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 제1독서 창세기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인간 삶의 모습은 바로 예의 ‘평화 없음’’평화의 깨어짐’의 그것과 익숙하기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요셉을 둘러싼 주위의 모습은 갈등과 분쟁으로 깨어진 평화의 파편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 라헬로부터 얻은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막내둥이였던 그를, 형들은 시기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증오와 미움으로까지 자라버리고 맙니다 이 가정의 평화는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평화는 어느새 파국으로 치닷고 말아, 형들은 요셉을 먼 나라에 돈을 주고 인신매매해 버리기에 이르고 맙니다 천인 공로할 일입니다
과연 요셉의 형들은 평화했을까요 ? 부모의 편애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사랑에 대한 질투로 그들의 영혼은 평화가 깨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깨어진 평화는 그들의 눈을 가리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가족을 팔아먹는 끔찍한 죄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부모들은 어떠했을까요 ? 가족 공동체 일부안에서 깨어진 평화는 가정의 슬픔과 도탄에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들짐승에 찢겨 죽었다는 요셉의 형들의 거짓소식에 야곱은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절망과 탄식속에 잠기게 되고 말았습니다
당사자인 요셉의 삶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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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 (깨어진 평화) 의 원인
우리는 성서속에서 하나님이 요셉을 돌보셨고, 요셉을 돌보신 사건이 결국 야곱과 그 집안,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선한 결말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요셉과 같은 본문속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의 무게에 공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중에 한명만 질병에 걸려도 가족의 평화는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사나운 들짐승에게 찢겨죽은 아들을 둔 부모의 삶의 자리는 얼마나 끔찍한 곳이 었을까요 ? 상상이 되십니까?몇푼의 돈에 팔아넘긴 동생 요셉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속에서, 깊은 슬픔에 잠긴 아버지 야곱의 짙은 한숨과 눈물을 볼 때마다 요셉의 형들은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었을까요 ? 그리고 허망하게 피붙이들의 손에 의해 생면부지 타국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의 심정은 또 어떻습니까 ?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삶의 실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성공이라 말하고, 나의 평화라고 하는 삶은 실상 누군가의 아버지를, 누군가의 자녀를 경쟁에서 퇴락시켜 얻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경쟁속에 내몰려 타인의 평화를 무너트리고, 그것이 결국 나의 평화를 다시금 무너트리는 늪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강탈하고, 깨어진 평화속에서 경험되는 비극들은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속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요셉의 가족에 있었던 비극과 불행은, 그리고 깨어진 평화는 모두 ‘인간이 자초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책임은 모두 사람들 몫입니다
만일 야곱과 라헬이 요셉을 편애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의 형들이 질투보다는 사랑으로 동생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요셉이 그렇게 젠척하지 않고 형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모두 서로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수고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터입니다 우리는 모두 파편으로 깨어지고 만 이 시대의 평화에 책임있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미비하게 시작된 어긋남의 균열은, 결국 터져버리고 평화는 깨어집니다 깨어진 평화의 흔적속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담을 쌓아가고, 모두가 ‘남’이 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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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하지 못함’ 그리고 그 이후는 ?
평화가 깨어진 순간부터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단절되었습니다 형들에게 있어 요셉은 ‘타자’ 그러니까 ‘남’ 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를 보면, 평화가 깨어진 이후, 요셉의 형들은 한번도 ‘요셉의 이름’을, 요셉은 ‘형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37:32을 보면 요셉을 팔았다는 것을 비밀로 한채 아버지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전하는 대목에서 ‘아버지의 아들의 옷을 보소서’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셉인줄 모르고 애굽의 총리에게 42:13에 그들의 형제중 ‘하나는 없어졌다’고 말하는 가하면, 또 다시 44:20에는 ‘베냐민의 형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요셉의 형들에게 있어서 요셉은 그들의 동생이 아닌, 깨어진 남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도 거짓을 고하며 담을 쌓았고, 동생 요셉에게도 미움으로 세워진 담을 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담은 어느새 자신들이 누려야 하는 행복과 평화마져도 가로막는 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이후, 이들의 삶은 동생을 팔아 넘긴 비정한 형들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죄 없음의 평화를 박탈당한 채 말입니다
나 스스로와의 관계속에 평화가 깨어진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축복하며, 사랑하며 살아감이 마땅했던 존재로부터,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소외시키고 마는 불행함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안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살아감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타인과 불화하고, 나 자신과도 불화한 채, 갈등과 우울, 고통과 좌절속에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는 상실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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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살충제 계란 파동이 시작된 이후, 사람들은 국가에서 안전하다고 말하는 산지 계란도 쉽게 믿고 구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학습효과입니다 친환경 마크까지 달았지만 돈 몇푼에 양심을 팔았던 사람들, 사태의 위중함속에서도 검사의 책임을 등한시 했던 정부관계자들에 대한 실망감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태의 핵심은 ‘나’와 ‘너’의 분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자의 눈에 소비자들이 ‘남’이 아니었다면, 국가가 ‘나’와 분리되지 않았다면 이런 불신과 갈등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로 공감할 수 없고, ‘너’가 ‘그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과연 우리는 평화할 수 있을까요 ? 그렇다면 대체 평화를 향한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 타인과 평화하므로 사랑하고, 나 자신과 평화하므로 안정감과 평안, 만족감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삶 말입니다
탐욕에 물든 인간의 삶 속에서 평화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평화는 가진 자가 내것의 일부를 포기하고 나누면 되는 것을, 갈등과 균열은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먼저 이해해주고 배려하면 되는 것을, 전쟁과 폭력은 힘이 있는 자가 포용하고 양보하면 되는 것을 모르는 이 없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내 달리듯 자신의 길만을 추구한 채, 우리는 폭력과 갈등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니 ‘평화’란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리 세상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암담한 신화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평화하지 않는 세상속에, 우리는 ‘평화’를 향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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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악을 평화로 바꾸시는 하나님
단언 하건데, 타인과 남이 되고, 나와도 남이 되고 마는 이 폭력의 인간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 형들과 재회한 본문의 요셉 이야기속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형들 앞에 선 요셉이 말합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시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의 평화를 깨트리고 좌절과 절망과 비참한 삶을 초래한 형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요셉이 베푼 자비는 평화가 깨어진 인생속에 방황하던 형들의 삶을 구원합니다
요셉이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바로 지금까지 요셉의 경험이야 말로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요셉은, 그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비와 만나는 시간, 인간이 깨트려버리고 무너트린 평화를 다시금 회복시키심으로 생명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고 해석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삶에 대한 개인의 해석만으로 무슨 실재적인 의미나 영향력이 있겠느냐고 ? 반문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하나님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타자가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되고, 하나님과 평화함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의 삶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 주도가 되어 그와 이루시는 평화야 말로, 인간의 말의 성찬처럼 ‘의미없음’으로 끝나지 않고, 개인의 세계를 평화하도록 이끌어내는 실질적 힘이 됨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 우리들 삶에 묻혀있는 흔적들은 여전히 세상을 ‘나’와 구별되고 단절된 ‘타자’의 세계로 불화하게 만들고 있는데, 하나님은 ‘존재적 타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찾으시고, 그와의 걸음을 통해 평화를 이루어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평화를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이 초래한 뒤틀린 관계와 폭력과 상처로 벌어진 고립의 자리를 다시금 싸매고, 메꾸고, 돌보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심지어 그분은, 하나님과의 균열로 깨어진 세상과 개인의 평화를 이루어 보고자 찾아오신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인류의 폭력에 대항하여, 지금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 부활로 누리는 생명을 값없이 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인간 역사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늘 그렇게 불화와 전쟁과 갈등속에서도 평화를 일구어 내시고 마는 분입니다 개인의 삶속에 깨어진 평화로 초래되고 있는, 모든 고통과 슬픔의 굴레로부터, 평화의 땅으로, 구원의 기쁨으로 이끄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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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기억하십시오 ! 인간은 깨트리고, 파괴하고, 무너트리지만, 하나님은 막힌 담을 허물고 생명을 살려내시고자 평화하도록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소통하며, 평화를 회복해던 요셉은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화평케 하는 모습으로 오늘 본문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 하지 않고, 평화하도록 하는 이가 복이 있는 이라고 했습니다 그야 말로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전한 ‘평화의 복’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자비를 형들에게 베풀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절망과 죽음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희생의 피를 뿌리셨고,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시키시기 위해 또한 그를 ‘부활’의 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요셉의 경우 성경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대목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거나,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거나, 인생이 역전되었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타인을 평화하게 하는 사람이었던 요셉은 분명, 하나님과 평화했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이었다는 것이 성경이 주목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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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 이 평화없는 폭력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과연 우리는 자비를 흘려 보내고, 평화를 가꾸어 가는 이들인지, 아니면 폭력과 은폐속에 자신을 감추는 불화의 복판을 살아가는 사람들일지 되물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인간의 탐욕과 죄가 파괴시킨 나 자신과의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하나님과의 사이에 놓인 깨어진 관계를,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한 절망과 슬픔, 좌절, 분노, 억눌림의 모든 죽음의 증상들로부터 우리 생명을 살려내시려, 평화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먼저 평화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길이빈다
평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소망을 싹을 틔워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