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2/ 31 성탄후 첫주

ViaNegaTiva 2017. 12. 31. 15:24

본문 - 누가복음 2:22 ~ 40


https://youtu.be/zFDI3VwwKEg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성도들의 꽃길




‘인생에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세요 !’ 한국교회 성장기에 흔하게 들려왔던 전도의 언어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역시 같은 부류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 인생에 성공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까 ?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의 축적과 명예의 누림을 성공으로 삼으며 달려왔고, 교회는 이런 세상의 조급한 성공지향의 추세에 편승하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늘 우리 교회의 실상은 더 큰 교회, 더 많은 성도의 수, 더 많은 활동을 예수를 믿는 삶의 내용으로 여기며 만족하는 신앙적 타락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고 만족을 얻게 되는 길이 신앙의 길일까요 ? 그런 신앙의 걸음이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만족시켜주기를 기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표상이 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나의 삶을 맞추어가는 자리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내 바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길,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면 않된다는 우뢰와 같은 음성에 정신이 차려지고, 가슴이 뛰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라고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문제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녀로서의 권세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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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들 모두가 바라보고 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온전한 표상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산다면, 예수님을 따라 걸어간다면, 예수님처럼 사람을 대하고 살아간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인정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 22 ~ 27절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율법의 정결의식을 치르기 위해 성전을 향해 올라가시는 장면을 삽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길은 예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길입니다 그가 누구이십니까 ?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아닙니까 ? 그런데 정결의식을 치루러 제사장들 앞으로 나아가다니요 ? 인간인 제사장에 의해 정결의 예식을 치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 누가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사고와 기대와 종교심안에서 주목하던 메시아의 모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떻게해서든 남들보다 위에 서고, 남들보다 인정받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하는 우리네 삶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걸음입니다 

그런데도 어린 예수는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순순히 이끌려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호령하고, 남들 위에서 큰 소리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왕의 이미지를 모두 걷어내 버린 연약하고 무력한 아이의 모습 일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이렇게 우리의 방식과는 낯설은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시듯, 우리의 생각, 우리의 성공, 우리의 가치관가 다릅니다 우리는 남들 위에 서야 높은 사람이라 말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남들보다 낮아지는 자리가 귀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이를 높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하고 연약한 아이를 하나님의 아들, 왕이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변화와 결과를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예수를 통해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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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낮아지심의 길을 향해 올라오시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시므온입니다 29절에 종을 평안히 놓아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시므온은 많은 나이로 늙을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던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 입구에서 예수를 기다리던 시므온, 나이 들고 초라한 모습의 힘없는 그의 모습은 거룩한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의 화려함과 권세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시므온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근본적인 것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며, 성령의 지시를 받는, 다시 말해 시므온은 성령과 함께 하는 이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과 함께 하였던 시므온의 일평생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 그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의 위로(25절) 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위로는, 온전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 뿐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살아온 시간은 이스라엘의 고통의 시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는 절망의 땅에 태어났고, 일평생 이 절망은 나아질 조짐도 없이 이 땅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아픔과, 고통은 모두 시므온의 삶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이들처럼 그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평생의 삶이었겠지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평생의 그의 간구와 기다림은 얼마나 사뭇쳤을까요 ? 포기하고 싶은 때는 또 얼마였을까요 ?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시간이 어느새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동안 소망을 가지고 성전을 오르면서도 이내 다시금 절망하며 성전을 내려와야 했던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 하지만 다시금 성전을 향해 오르는 그의 걸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는 절망으로 확인되던 날을 딛고 일어서 다시금 성전을 향해 올랐고, 드디어 오늘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을 오르는 예수와 만나게 됩니다 

그의 기다림의 자리가 포기되지 않는 소망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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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은 대체 성전을 오르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 제발로 조차 걸을 수 없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기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시므온은 이제 눈을 감아도 좋다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외쳤던 것일까요 ?


이스라엘의 영광 ! 즉 하나님만이 행하실 일, 구원이 이 아이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임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의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이 작은 아이가 예언처럼 그들에게 찾아온 것 자체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증거였으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확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의 오늘은 주의 구원 가운데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이스라엘은 구원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눌린 땅, 고난과 고통, 죽음이 지배하는 땅입니다 하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예수 안에 맺혀있으니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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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 구원의 표적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점점 분명해지고,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성장해 나가면서 헤롯의 권좌도 무너지고, 제국 로마의 지배도 무너지게 되겠지요 ?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분명한 표적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기대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시므온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해가는 표적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길을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34 ~ 35절입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표적으로서 예수의 삶이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결국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는 것, 세상이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야 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분명한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길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마리아에게 칼이 찌르는 듯 한 고통일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 


그런데 어떻게 시므온에게는 이런 예수가 구원이었습니까 ? 누가는 성령의 충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말은 또한 무슨 말입니까 ? 시므온이 하나님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방식에 의한 구원 말입니다 돈이나 명예,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방식을 기대하거나 전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만이 발견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시므온은 그렇게 유대인들의 방식이 아닌, 로마의 방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삶을, 그의 인생을 마무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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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을 마칩니다 답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더디 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패배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구원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자신이 한 없이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함께 하던 이들이 세상으로 뛰쳐나갈 때,  또한 그렇게 세상이 승리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때마다 세상의 구원 방식이 더 가치있고 대단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애당초 세상의 구원에 비하면 조롱받고, 비방을 받을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의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을 믿으며 눈을 감았던 것처럼,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믿으며, 승리를 외치는 세상속에서 죽음의 십자가를 통과하셨던 것처럼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세상이 인정하는 꽃길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인정받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새겨야 합니다

성도들의 꽃길은, 짙은 어둠과 절망 같아도, 죽음 같은 십자가 그 길 끝에서야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에 닿아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지난 한해 여러분이 걸어오신 삶의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 꽃길처럼 아름답고, 만족스럽고, 함께 하는 이들이 많아 흐뭇하고 기분 좋은 길이었습니까 ? 아니면 돌작밭같고 가시밭 같은 길이었습니까 ? 늘 두렵고, 힘들고,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외로움을 이기며 걸어오셨습니까 ?

그 길이 꽃길 처럼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끌어안는 삶이 아니었다면 그 길은 인생의 허무와 만나는 가시밭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눈물로 지새우던 그 날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고자 몸부림치던 길이었다면, 주님께서는 그 길이야말로 꽃길이었다고 위로해주실 줄 믿습니다


고난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슬픔과 좌절의 자리를 저주하지 마십시오 더디 가는 것 같은 삶이라 낙망하지도 마십시오 회피하거나 돌아서지도 마십시오 ‘십자가’만이 성도의 꽃길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꽃길로 열어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그 믿음을 지켜내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