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 성령강림후 26주
본문 - 마태복음 5:1 ~ 12
* 예배중 정전으로 설교영상이 깨어져버려, 이번주 설교영상은 없습니다 ....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9주의 시간동안 심령/ 애통/ 온유/ 의에/ 긍휼히/ 마음이/ 화평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이들이 바로 복된 이들임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된 이유가 그들이 얻게 될 천국/ 위로받음 / 땅을 기업 / 배부를 것/ 긍휼히 여김/ 하나님을 보는 /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안에 있음도 함께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팔복이라는 것이 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들에게 언약처럼 주어져 있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
본문의 1차 수신자들은 산 아래에서 예수를 따라 올라온 제자들임, 이 말씀을 복음서로 전해들은 2차 수신자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의 대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복되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향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미 약속안에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우리의 질문은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복’을 주시는 것일까?’ 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팔복의 마지막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의 복입니다 이것은 실상 팔복의 마지막에 소개되는 복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복받는 사람들의 마지막 결론이기도 합니다
‘박해’를 받는 것이 하늘의 복을 누리는 결론이라니요 ? 복받기만 기대하던 우리의 걸음이 섬칫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면 않된ㄴ 중요한 것은 ‘박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받는 박해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세상에서 받게 되는 ‘마땅한 대우’ 또는 ‘당연한 결말’ 정도로 해석함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3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대하여 대하는 방식이 ‘구별되고, 거룩함’이도 같고, 세상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 바로 박해인 셈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박해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조건 해악의 것은 아닙니다 병이 나아질 때 더 아픈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고 있음의 증거가 박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순간 세상에서 우리는 구별되고 달라보임이 당연하니 말입니다
4
그렇다면 왜 ? 예수를 믿게 되면 세상에서 박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는 존재인지를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우리에게 채우고, 많이 가지라고 채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답일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오늘까지 우리는 늘 생을 다하여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채우고 가지기 위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수고하며 달려왔지만, 언제나 ‘지금’의 경험은 부족하고 불행하다는 자각만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는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렇게 많이 추구하고 가져도 왜 우리는 늘 가난하고, 불행할까 ? 질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 실상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입니다 돈, 명예, 건강등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그것이 없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게 만드는 것들이 바로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은 돈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것을 채우려면 그 발앞에 굴복하고 무릎 꿇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염려하는 것들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5
성경이 이야기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
돌아보십시오 그런데 그 동안 우리의 삶은 늘 눌려있고, 불행했고, 나 자신은 쓸모 없고, 비참하지 않았습니까 ?
왜? 그러했습니까 ?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오늘 내게 주어진 것도 다 잃어버리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우리가 배부르고, 그런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있을까요 ?
6
예수는 답이 요원한 우리에게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땅의 것을 채우라고, 가지라고, 소유하라고 말하는 세상의 강요를 거부하고,
먹이고, 입히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와 지위, 꿈을 회복하며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를 끼고 보면 하늘의 가치가 소중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돈을 소유해야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집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가정을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거나 이루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무엇이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귀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려움과 염려, 근심이 짐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평안과 기쁨,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니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인가 불편하고 낯설은 곳이 됩니다
7
예수를 믿게 되니,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불지 않은 공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움켜쥐려는 손을 하나씩 놓게 됩니다 그렇게 잃어버리게 되는 세상의 것이 바로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박해’입니다 예수의 길을 선택함으로 포기되어지고, 잃어버리게 되고, 손해보는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땅한 결과입니다
수고하고 땀흘려 열심히 담았는데 그것이 밑이 빠지고 뜯어져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계속해서 일할 사람은 없다 !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좇아다니는 것이 결국 망하게 하는 길임을 알아도 달려갈 수 있을까 ?
열심히 나를 죽이는 것을 찾아다니며 먹고 마실 사람이 있을까 ?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8
이 포기는 괴로움도 손해도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절망, 걱정, 염려를 무기삼아 세상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걱정과 염려가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두번째, 박해가 있습니다
14절을 보니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 팔복의 약속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빛이 하는 일은 어둠을 밝히는 일입니다
빛가운데 있는 작은 어둠은 않보일 수 있지만, 어둠 가운데 있는 빛은 너무나 드러나 보입니다 빛이 있는 순간, 그저 세상이었던, 그것이 옳은 것 같았던, 그것이 잘 사는 것 같았던 세상은 온통 엄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잘 못된 것임이 무가치한 것임이, 폭력과 죄의 무덤이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두 ‘빛’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그런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9
우리를 복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주님의 목적은 고발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어둠이 빛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
16절 ‘너희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주인이 채우고 소유하라고 강요하는 돈도, 명예도, 인정과, 풍요, 안락도 아닌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희 착한 행실’을 통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10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천국을 바라보며, 예수님 처럼 생각하고, … 말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입고 계셨습니다 그분도 배고프셨고, 그분도 헐벗었고, 그분도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에 머리숙이지 않으시고, 내일의 먹을 것 때문에 고개 숙이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내일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에 휩쌓이는 대신에, 선하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심으로 나아갔습니다
머리채를 끌고 죽음으로 이끄는 세상의 거짓된 신의 지위를 폭로하고, 우리를 살리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세상이 채우라고 말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천국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땅의 것이 없어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구나 ! 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빛의 역할 입니다
11
느긋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예수를 따르십시오
우리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을 추구하고, 세상에 굴복하고, 세상을 주인삼고, 살아갈 때가 아닌,
우리가 어둠을 비추어내는 작은 빛이 되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들로서 일컬음을 받게 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나약하고 연약하여, 꺼지기 쉬운 우리이지만
기꺼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입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셨던 그 때, 그 빛은 짙은 어둠과 같은 세상속에서 보이지도 않던 빛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던 그 빛은 꺼저버린 것만 같은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앞에서도 빛이 빛으로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으로 세우시고, 온 땅을 비추이신 것처럼, 오늘도 작은 불꽃과 같은 우리안에 주님은 소망을 담고 계십니다
C.S.Lewis 가 남긴 말 한 토막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내게 허락하셨나이까? 하고 하소연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장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