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7 주현후 2주
성서일과
- 사무엘상 3:1~10, (11~20)
- 시편 139:1~6, 13~18
- 고린도전서 6:12~20
- 요한복음 1:43~5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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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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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 선, 당신께
1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삶이 바뀌어 버려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을 또한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가장 눈에 띄게 바뀌고 변화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없다’ 말하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된 사람들이고, 땅이 전부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보게 된 사람들이며, 이제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1독서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엘리이고, 다른 한명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 한나가 간절한 기도후에 얻게 된 아이 ‘사무엘’입니다. 어머니 한나의 서원 기도대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무엘은 이제 제사장 엘리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어린 사무엘이었습니다. 성전제의에 능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제사장 엘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겁니다.
선물같은 하나님의 방문은 잘난 척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아닌, 늘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는 것이야 말로, 익숙한 어떤 것이나 오랜 신앙생활, 사람됨됨이 같은 것으로는 허락되지 않는 전적인 은총 사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사무엘기 기자는 이야기 초반 2절에서 연로했던 엘리가 눈이 어두워져갔다고 전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력을 잃으신 분들을 보면 대부분 시력 대신에 대단히 발달한 청각이나 촉각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처럼 육체의 눈은 쇠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 수록 영적인 예민함 더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는 영적인 눈도 쇠하여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성소를 찾아오셨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질 못하는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정작 자신은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질 수도 없으면서 ‘이렇게 하라’ 조언만 해줄 수 밖에 없던 엘리가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혹여 엘리처럼 영의 눈이 이와 같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어떤 연유에서든 시력을 잃은 이들을 안쓰러워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보는 것에서 얻는 우리이다 보니,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돈이나 세상을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 애를 쓰지도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입니다.
2
본래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산을 함께 거닐던 존재였던 우리가, 어쩌다가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을까요? 대체 무엇이 우리 눈을 이처럼 어둡게 만들어 버렸을까요? 본문 3장의 첫머리인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지 보이지 않았더라’ | 삼상 3:1
우리 영혼을 깨우고 어둠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말씀’인데, 말씀이 희귀해졌으니 빛을 잃은 눈이 어두워질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합니다. 제사장 엘리나 그의 아들들 홉니나 비느하스가,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모를리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지만, 들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던 겁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문자속에, 이스라엘의 역사속에만 계시는 분이었던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뜨끔합니다. 우리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렇습니다. 능력의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내 삶에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으신 일에 대한 기대감은 옅어지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직 몰랐던 사무엘에게 엘리가 전해준 조언은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본은 ‘듣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들은 대로 살려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좁은 길로 행하라는 말씀을 듣지만 대로로 다니기를 좋아하고, 낮아지라는 말씀을 듣지만 남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듣지만 세상에서 부유해지길 원합니다. 숱하게 들어온 믿음이지만 믿는 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시험성적이 좋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3
말씀을 외면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대로 살려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살면 말씀이 그런 삶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능력으로 살아내는 삶을 바울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 6:20
‘영광’이라는 뜻의 헬라어 ‘독사’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것,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음을 모두에게 인정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어떤 업적을 이루면 하나님이 인정받으실 수 있을까요? 그런 자기 업적은 하나님을 모르고, 말씀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삶을 통해, 말씀이 유효하고, 말씀이 능력이 있고, 말씀이 소망이 된다는 것이 발견되어지는 겁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해하고, 성공하면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내몰리고, 여전한 인생에도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감사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모두가 절망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3독서 요한의 복음서에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났던 것은 ‘빌립’이었습니다. 그가 친구에게 돌아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소개해줍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에 그런 사람이 메시아일리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짓고 맙니다. 메시아에 대해 언급된 성경이나 예언 어디에도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없으니 그의 부정은 일견 타당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빌립이 던진 한마디 말에 나다나엘의 운명은 뒤 바뀌게 됩니다. 그가 전했던 말은 ‘와서 보라’는 그것 뿐이었습니다.
빌립을 향해 ‘나를 따르라’던 예수님의 말씀이나, 나다나엘을 초청하는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은 모두 짧지만 대단히 강력한 초청이기도 합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외에 ‘나를 따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강력한 초청입니다. 그가 본 것이 프로그램이나 행사나, 도덕이나 윤리였다면 그리 말할 수 없었을겁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이런 초대를 하는 곳입니다.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외치고 보여주는 곳이 교회이며, 교회는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교회의 사명은 아닙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외에 삶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고,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며 나서도록 할 수 있는 다른 구원은 없으니 이 말씀이 옳습니다.
4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너야 말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구나’
당신을 향해 나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하나님 말씀인 율법에 천착하며 온 맘을 다해 공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존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음을 보셨다는 주님 말씀은 아마도 그가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신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알기 위해, 말씀을 듣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자신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밝히시는 예수님을 대면한 사람이라면, 태양을 본 사람이 손전등 따위를 찾을리가 없는 것처럼 다른 길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다나엘’ 뿐만 아니라, 빛을 찾아 당신을 향해 나오는 모든 이들을 향해 더 큰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요 1:51
우리는 창세기 28:12에서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향하던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이 꾸었던 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의 절망 가운데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만 계신 줄 알았던 그 하나님이었는데, 눈이 트이고 보니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자신이 서 있는 그 곳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던 겁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니, 이제 제 인생을 살아보려고 경쟁하고 속이며 살던 야곱은, 버려진 것만 같았던 제 자신과도 화해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되고, 자신의 삶이야 말로 하나님 손에 들리워져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버려진 것처럼 여겨지던 모든 상처가 회복되니, 인생을 선물처럼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에게도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무화과나무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좋은데 ‘바울’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훨씬 더 놀랍기만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고린도전서 6: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삼으셨다니요. 이보다 당혹스러운 말씀이 또 있을까요?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니 우주가 좁쌀 한톨안에 들어온 것과 같은 셈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과 그로 인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값을 주고 사셨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전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전 삼고 계시니 이제 주님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찾기 위해 헤매일 필요도 없고, 모든 버려졌던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터가 되었으니, 실패하고 깨어지고 눈물로 얼룩진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영광’이 드러나는 땅이 된 겁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든 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값’으로 치르고 사셨으니,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세상도 우리와 우리 삶을 향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 능력이나 출신에 관계 없이 이제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5
살다보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만 같고, 아무도 보는 이 없이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때가 왜 없겠습니까? 제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버거운 우리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너를 내가 보고 있었다’던 주님의 말씀은 잔잔하지만 강력한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체험한다는 것이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은총 가운데 소중한 것을 발견해내고 발견한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중한 그것, 마땅히 보아야할 것은 누구이고, 마땅히 들어야할 말씀은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보화같은 주님을 발견했으니, 어떤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주님을 잃지 않고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인 겁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신앙의 체험만이 하나님의 손에 들리워 누리는 자유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안에 성전삼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영혼을 집중하며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지켜내십시오. 가을걷이 끝에 손에 쥔 씨앗을 겨우네 잃어버리지 않으면, 봄의 어느날 뿌려진 그 씨알이 움이 돋고 자라게 됨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말씀만이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 날에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