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7 주현후 5주
성서일과
1독서 | 이사야 40:21 ~ 31
응송 | 시편 147:1 ~ 11, 20c
2독서 | 고린도전서 9:16 ~ 23
3독서 | 마가복음 1:29 ~ 3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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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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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 손을 잡아주셨다
1
질병이란 건강한 상태가 깨어지거나 무너지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 더 넓게는 개인의 인생이나 삶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병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리게 되면 균형을 깨트리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요즘에야 이런 원인을 곧장 찾아낼 수 있지만, 보건 위생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질병이란 그저 스스로 지나쳐가기만 기다릴 수 밖에는 없는 재앙과도 같았을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질병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일어난 폭력적인 현실이 되고 맙니다. 의학수준이 발달한 지금이야 조기에 발견하고 병원에서 치료만 잘 받으면 암도 고칠 수 있게 되었다지만, 병에 걸리게 되면 귀신이 사람안에 깃든 탓으로 여겨 의사보다는 무당을 찾는 것이 더 익숙했던 시절이 불과 몇십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서가 씌여졌던 고대에 사람들의 형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안에는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좇으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만큼 당시는 삶의 균형이 깨어져버린 이들이 많았다는 반증일 겁니다. 특권층들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시절이 어려워도 오히려 그것이 기회가 되고 걱정없이 살곤 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세금수탈을 피해 스스로 집을 버리고 떠돌이가 될 만큼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서슬퍼런 로마의 권세는 해가 지날 수록 더 높아만 갑니다. 로마에 항거하다 학살 당한 이들의 시신이 마을 어귀마다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흉측한 시대를 제 정신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억눌린 시대, 암울한 매일을 살다보면 육체는 병들고, 정신도 쉽게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귀신이나 악마처럼, 악하고 사특한 영들은 그런 시대의 암울함을 틈타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귀신들린 사람들의 형편은 안쓰럽기만 합니다. 무병을 앓다가 결국은 가족에게 미칠 화를 면하고자 천형을 받아들이듯 무당이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지금 자신을 고난으로 몰아넣는 존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말일 수 있지만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매일을 공포와 두려움에 억눌린 채 살아가야하는 우리 시대의 형편이야 말로 불행하기만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각박한 세상이 되었는지, 사람들의마음이 왜 이렇게 사나워져가는지, 왜 우리가 이렇게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는지, 한편으로는 손가락질하던 것들을 또 한편으로는 모두들 부러워하는 불편한 세상을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무엇엔가 짓눌려있습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사람살이를 깨트리고 생명을 갉아먹는 이런 힘을 사특한 어둠의 힘, 귀신이나 마귀의 세력으로 이해했습니다. 증상은 치명적이지만 귀신은 풍요롭고 멋스러운 모습, 안락한 삶, 성공, 그리고 때로는 정의와 평등의 구호를 외치는 등 교묘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2
오늘 복음서에 첫 장면은 사도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열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병세가 위중했었는지 주님이 직접 그녀를 찾아가셨습니다. 심한 경우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열병은 가벼이 볼 수 없는 질병입니다. 어쩌다가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리게 되었을까요? 살다보면 속에 억울하고,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하지요. 열이 머리까지 올라오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워집니다.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장모도 혹시 견딜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 울화병에 결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힘들지만 그래도 고기잡이하며 착실하게 살던 사위가 어느날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예수라는 이를 따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한숨이 늘고 가슴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할 수록 답답하니 이제는 가슴을 쥐어뜯는 것만 같습니다. 온통 무책임하게 버려진 자신의 딸과 손주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봐도 사위 베드로는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자신의 말에는 들은 척일 뿐입니다. 자신도 야웨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살이를 어찌해야 할른지 전혀 대책이 없는 사위나, 그를 그렇게 꼬드겼을 예수를 생각만해도 화가 치밉니다. 어찌 살려고 저러는지 알 수가 없으니 한숨만 내쉬던 어느날 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녀의 깊은 한숨을 반복하곤 합니다. 얼마전 기독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실천신학대학교대학원 정재영 교수의 설문 조사에, 응답자의 40%이상이 ‘성경대로 살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교회밖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는 낙망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같아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힘차게 날개치는 독수리처럼 새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외치던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너무나 공허합니다. 그런 날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절망을 깨트리는 복된 소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묵묵히 그녀의 푸념과 원망을 들어주시던 주님이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었고,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열병은 간데 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가슴에 맑고 시원한 숨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이런 복음이 또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늘 복된 기쁨의 소식이 가득합니다.
3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오랜 질병에 귀신들렸다고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안식일의 해가 저물고 다음날이 되었으니 안식일 규정에 거림낌없이 병든 이들이나 귀신들린 이들을 고쳐주셔도 되는 상황인데, 38절을 보니 주님은 오히려 서둘러 그곳을 떠나려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다른 마을에 가서 그곳에서도 전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이 자리를 피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전하셨던 복음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지요.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니 이제 질병이나 귀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왕노릇하는 모든 권세는 끝장났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의 사명입니다. 그러니 병에 걸린 사람이나 귀신들린 어떤 이들을 고쳐주는 것은 주님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전하시던 복음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나 축귀사역이야 말로 병이나 장애를 ‘저주’받은 것처럼 정죄시하던 시대의 폭력과 그릇된 믿음을 고발하고, 귀신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음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나라를 얻게 되고, 귀신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만일 그곳에서 병이 낫고, 귀신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쫓겨나가는 일들이 계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치유를 기대하는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당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칭송과 영광을 받게 되셨을 겁니다. 여기가 함정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주님을 넘어트리려던 마귀의 시험이 떠오릅니다. 마귀는 매우 집요하고 간사합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 그의 사자들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징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광야,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채 묵묵히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던 그때,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표징을 보이면 사람들이 주님께로 모여들것이 뻔합니다. 인정과 명예, 더불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단호히 거절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유혹에 넘어가주면 인간적인 명성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마귀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길이 사람의 명성을 얻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무너트리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 마귀의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은 마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폭력으로 얻은 평화 역시 폭력일 뿐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는 마귀를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 마귀의 권세만 남게 되니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을 향한 두려움이나 위협이 될 수 없게 하는 것, 즉 다시 살려내는 ‘부활’만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하지만 다시 살려내려면 반드시 먼저 통과해야할 것도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택하신 길이 바로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주님은 귀신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그 복음을 이루기 위해 길을 나선 겁니다.
4
바울도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복음안에서 찾았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다던 그의 말은 (고린도전서 9:23) 자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의 미혹과 위협은 누구에게나 현실로 찾아옵니다. 바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은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실패한 전도자처럼 보이는 삶을 향해 ‘남부럽지 않을 만큼 멋지게 한번 살아내보라’는 귀신의 유혹은 무척 달콤하게 파고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바울도 자신에게 그런 유혹과 영광을 거절하고, 모두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늘 계속되는 유혹앞에서 그것이 가능할까요?
주님은 자신의 길을 무너트리려 유혹해오는 귀신의 음모와 사람들의 허무한 영광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셨습니다.(35) ‘에레모스’라는 단어가 ‘한적한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인데, ‘버림받은’, ‘텅 빈’, ‘고즈넉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즉 ‘광야’(eremia)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기 위해서는 보여지는 것들에서 눈을 감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귀신의 속삭임에 흔들리고 요동치는 마음판을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해야만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 음습한 귀신의 유혹을 깨트리고, 곳곳마다 자리를 틀고 있는 귀신을 내어쫓으며, 복음을 전도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던 그 순간을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이 내미신 손을 붙들고 그 손의 이끄심을 따라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병이 떠난 이후에, 그녀가 주님을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시중’(diakoneo)은 ‘종’(diakonos)이 하는 일입니다. 열병에서 놓임을 얻고 ‘복음’을 경험한 그녀가 이제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제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억울함, 답답함, 낙망함에 무너지게 만든 귀신의 권세가 떠나가고 하늘의 평강이 임한 겁니다. 복음입니다.
5
오늘 우리는 아득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제 자식을 때려죽이고, 폭력이 난무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이들이 정의를 말하고, 폭력을 일삼는 이들이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땀흘림을 어리석음이라 비웃는 세상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권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정신을 놓고 사는 세상이야 말로 귀신에 눌린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누가 이런 세상에서 지치고, 버림받고, 소외되고, 상처입어 절망에 사로잡힌 이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까요?
더 많은 것을 채우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을 요구하는 마귀와 귀신의 세상에서, 주님의 손을 뿌리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는 복음에 사로잡혀 기꺼이 포기하고, 무너지고, 죽기를 선택하십시오. 그만 일어서라고 우리 손을 이끄시는 주님의 억센 힘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함께 가자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으니 심장이 뜁니다. 일으켜 세운 손을 놓지 않고 함께 하시니 힘이 납니다. 그가 우리 삶을 지키시는 능력과 힘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