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8 사순절 2주
- 성서일과 사순절 2주 ( 3.1절 기념주일 )
1독서 | 창세기 17:1 ~ 7, 15 ~ 16
응 송 | 시편 22:23 ~ 31
2독서 | 로마서 4:13 ~ 25
3독서 | 마가복음 8:31 ~ 38 혹은 마가복음 9:2 ~ 9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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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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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로, 물러가라 !
1
앞서 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한주간 믿음의 걸음을 걸어내신 여러분의 모습이 참 대견합니다. 모든 좋은 것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마음다해 빕니다. 사순절 둘째주일, 부활절까지는 아직도 걸어야 할 걸음이 더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레 지치진 마시기를 빕니다. 당신을 길삼아 살겠노라 결심한 이들의 걸음을 지켜주시고 힘을 북돋우셔서, 아득했던 길도 어느새 수고한 땀을 식히며 쉼을 누리는 목적지로 닿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일방적이고 자유로운 구원의 언약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성서일과 1독서에서 우리는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세상 전체가 아닌 한 사람의 운명과 삶을 의미의 시간으로 건져내시기 위한 걸음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 창 17:2
모처럼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도 일방적이십니다. 앞선 1절에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그를 번성하게 해주시겠다는 언약이 먼저 있었고 그런 언약안에 있는 사람이니 ‘온전하게 살라’는 말씀일 뿐, 언약의 조건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 아브라함에게 확인시켜주고 계시는 언약은 일전에 하란 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초대하시면서 이미 체결해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세기 12:2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복을 주시겠다는 일방적 선언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당사자에게는 영원처럼 아득해보이는 약속이지만 우리는 이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태복음 1:1
혼돈의 신을 무찌르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던 전능한 하나님이, 한 개인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스케일이 한 없이 작아진 것 같습니다. 단박에 세상을 구원하셔도 될 일인데, 한 사람과 맺은 언약을 천년을 뛰어넘는 시간을 통해 성취해내시는 하나님의 긴 호흡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런 느긋한 약속과 응답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쓸모없어 보일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방식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결국은 세상을 구원하는 길임을 주님을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구원으로 경험하는 겨자씨 한 알 같은 개인이 모이고 곳곳에 채워지다보면 세상을 덮을 날도 올테니 말입니다. 한 순간 단박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란 그것이 세상이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구원해 내는 하루가 쌓여 구원받는 인생이 되고, 구원 받은 한 사람이 구원받은 세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나 교회가 직면하고 감당해야할 일은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구원이 세상 전체의 구원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일까요?
2독서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로마서 4:13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시는 ‘언약’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를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답이 없는 삶에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으니 ‘은총’이며, 우리가 누리게 되는 구원과 언약의 성취와 보장은 모두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 먼저 있음을 깨닫는 눈이 트이는 사건과도 같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고, 어떤 경지에 오르는 것, 혹은 수고함으로 얻어내는 결실이나 업적과 같은 것으로 ‘믿음’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수준에 이르렀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조바심에 초조해지고, 때로는 불안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자유와 해방, 기쁨의 이유가 되는 구원이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작동되는 겁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 된 겁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이해가 쉬울 듯 싶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고는 밧줄을 던져 그를 건져냈습니다. 물에서 건짐을 입은 사람이 옷을 말리고는 두말 없이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덕을 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를 건져낸 사람 입장에서는 인사 한마디 없는 모습에 불쾌해졌고 그를 나무랬습니다. 하지만 되려 상대는 마뜩찮아 보입니다. 그가 던진 밧줄을 자신이 스스로 잡지 않았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것이니 딱히 그의 은혜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는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어떤가요? 그의 배은망덕함에 참으로 불쾌하지요? 어쩌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보아도 다시는 도와주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허기사 요즘은 되려 내 보따리 내놓으라 멱살을 잡는 세상이니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상속자’가 된다는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율법과는 상반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자신이 쌓은 행위나 업적, 자기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믿음’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구원이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총 사건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제 한번 답해 보십시오. ‘구원’ 사건에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구원의 보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는 것, ‘믿음’은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인류를 향한 구원의 복 자체가 될 수 있던 것은, 그의 믿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까닭이었던 겁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얻고 이루려는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3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덧없이 무너지곤 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로마서 4:19
아브라함 자신은 백세에 이르고, 아내는 태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보통은 이런 상황이되면 ‘믿음’이 흔들리고 깨어지곤 한다는 것이겠지요. 으레 우리들도 이런 상황에서 믿음에 파선하였고, 그때마다 믿음이 흔들리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도 이런 상황에 무너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로들, 대제사장, 서기관들, 유대사회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그는 주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뒤이어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 ‘꾸짖으셨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꾸짖고 가르치는 겁니다. 주님이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로서는 그럴 법도 합니다. 자시들의 삶을 송두리째 걸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 무슨 죄를 지었길래) 죄인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하고 마신다면 자신들은 어찌한단 말씀인지 무책임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는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자란 주님께 듣고 따르는 사람인데, 지금 베드로는 주님의 앞에 서서 주님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꼴입니다. 주님은 35절 ‘제 목숨’을 구원하려 애쓰지 마라 하셨는데, 제 살길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성난 파도를 가라앉히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던 주님의 엄한 꾸짖음이 죽비처럼 베드로를 내려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막 8:33
정신이 번뜩 듭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자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좀 지나쳐보입니다.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하지만 주님의 말씀안에서 사랑하는 제자를 세우고 싶은 주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누구입니까? 거짓의 아비이며, 계시록 12:1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참소하는 이입니다. 범죄하고, 잘못된 것을 고발하는 이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주님이 택하신 길이 틀렸다고 그럴리가 없고, 그런 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고발했었습니다. 이제야 우리 안에서 믿음없음의 말들을 가르치고 쏟아냄으로 주님을 참소했던 이가 누구인지 정체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자신에게서 물러가라고 내치지 않으시고 되려 그의 자리를 교정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주님의 뒤’입니다. 그는 늘 주님의 뒤에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의 자리는 앞서 길이 되어주시는 주님, 당신을 길삼아 나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반응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사람이 할 일은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뒤 따르는 것 뿐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이제야말로 참 제자가 되어달라’는 간절하지만 따듯한 부르심으로 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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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이들만 주님의 뒤편에 설 수 있습니다. 제자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틀렸다는 생각 때문에 어느새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의 뒤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자꾸만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마가복음 8:3a
주님의 앞에 서려고 하는 ‘뿌리 깊은 자아’가 문제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니 아무리 보아도 주님이 틀렸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아니라고, 내 생각이 틀림없이 옳다 여기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그리고 믿음을 지켜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앞에서 이런 ‘자아’를 죽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해야만 하는 치열한 투쟁의 자리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옳으심을 인정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따르려면, 영원한 언약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응답하고 반응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매 순간,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이 옳다!’ 인정하는 겁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군중이 아니라,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생명의 길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응답으로 살아가는 이가 제자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으셨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창세기 17:1b
‘행하라’는 히브리어 ‘히트할레크’의 의미가 특별한 바쁨과 조급함에서 벗어나 여유를 갖고 걷는 산책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참 푸근하고 설렙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척박하고 사나운 인생의 길도 산책을 나서고, 소풍을 떠나듯 느긋함으로 걷는 유쾌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맘 편히 출발한 소풍 길이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안에는 벼락이 내리치고 천둥이 울릴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내 뒤로 물러서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앞서 걸어가 주시려고, 이제는 '나의 뒤'로 물러서 있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곁을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믿음은 그런 겁니다. 엄청나고 대단한 일을 한다는 자만이나 감당할 수 없는 부담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는 마음으로 눈 감고, 오직 주님의 뒤만 바라보며 일상의 걸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조금은 늦고, 때로는 삐뚫어지기도 하며, 오늘 믿었다가 내일이면 또 무너지는 우리 수준의 믿음에도, 언제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며 전심으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