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7 사순절 3주
성서일과
- 1독서 | 출애 20:1-17
- 응 송 | 시편 19편
- 2독서 | 고린도전서 1:18-25
- 3독서 | 요한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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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1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난 이후, 당시 유대사회에서 누리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을 만큼 ‘십자가의 복음’에 천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독서인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십자가의 도’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1:18)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1:2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십자가의 도’는 정말 하나님의 능력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사실을 교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 또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단히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민이나 어려움이 해결되고, 질병이 낫고 환란이나 역경을 건너가거나,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등을 십자가의 능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해결되어도 한 개인의 인생에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낯설은 문제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능력과 기적으로 질병에서 나음을 입는다고 해도 종국적으로 죽음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을 경험했거나 않했거나 별반 차이가 없는 셈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능력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을 해도 십자가의 실존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고발과 로마의 힘에 의해 살해당하신 고난이며 박해입니다. 주님도 이 잔 만큼은 피하고 싶어 하셨을 만큼, 인생이 끝도 없는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곳이 십자가입니다. 게다가 요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십자가를 진다거나 경험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마땅하고 옳은 길을 선택했다가 그냥 망한 경우인 겁니다. 실재로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안타깝지만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혼자만 잘난 척하더니 꼴 좋다’며 핀잔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거추장스럽고, 혐오스러운 대상일 뿐더러, 누구라도 피해가기를 원하는 곳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보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외침이 와닿지 않고 마치 드러내기 싫은 불편함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경험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2
오늘 서신서 본문 앞 단락에서 고린도 교회안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의 문제로 인해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파가 갈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갈등 상황에 빠져있는 교회를 향해 바울이 전한 권면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왜? 쓸대 없는 것으로 갈등하느냐는 책망입니다.
갈등은 서로들 자신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은근히 드러내려는 마음에서 비롯했습니다. 부목사들의 기도가 아니라, 담임목사의 기도를 받아야만 능력이 있다 생각하는 것처럼, 어쩌면 집례자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세례라는 것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인지, 무슨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로 줄을 세우려고하는 세상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상대가 더 높거나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면 쉽게 불편한 마음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래서 권위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드러내길 좋아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그런 것을 보여보라며 으름짱을 놓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생년월일이나 학번, 하다못해 군번이라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가 이런 겁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 상대보다 높아지려는 못난 마음 씀씀이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요구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던 환전상을 뒤엎으실 때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표적(근거)을 보이라’고 요구했고, 골고다에 오르셨을 때도 그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스라엘의 왕임을 보이라며 음험한 비웃음을 드러냈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표적을 내놓으라는 것은, 결국 상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약한 속마음이 깔려있는 셈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표적이나 이적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표적이란,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일 뿐인데, 온통 하나님이 아닌 표적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말다보니, 표적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버린 겁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보려고 하는 사고안에 늘 갇혀 있습니다. 말씀대로 그리하실 수 있는 것인지, 우리를 지켜내실 수 있는 것인지 또 어찌 알 수 있느냐고 항변하고,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이미 주어진 상황이나, 선물처럼 주어진 일상의 은혜, 하나님의 뜻이나 행하신 일을 통 믿을 수가 없으니, 내가 믿을 수 있고 내 마음에 충분할 때까지 이런 요구는 계속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것에 마음을 쏟고, 그렇지 못할 때 신속하게 낙담하게 되는 걸까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하는 것처럼, 밑둥없이 흔들리는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붙들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안정감을 얻고 싶은 겁니다. 우리 안에 뿌리 깊은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은 스스로 허우적거리다가 침몰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강요해온 세상에 익숙해진 탓에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붙잡아야만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니 결실을 맺기 위한 기다림은 더없이 힘들기만 합니다.
3
우리 안에서는 늘 ‘사실은 어떠한가?’라는 물음보다 두려움이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되돌아보면 삶을 혼돈과 파국으로 내모는 것들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들인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그만 지레 얼어붙은 꼴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꾸만 불안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선택하고, 생각안에 담아, 제 자신의 마음의 기준으로 삼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1독서 출애굽기 20장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십계명’, ‘하나님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선언은 허상으로 채워진 우리 생각과 충돌하고, 심지어는 남김없이 깨트려버립니다. 계명은 예외없이 허탄한 우리의 생각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복할 것을 가르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 출애굽기 20:4
우리안에 들어오는 ‘생각’은 비어있는 마음을 ‘형상’으로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야할 생각의 자리에, 자꾸만 다른 것을 채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이나 부러움, 때로는 거짓된 불안이나 두려움도 그 자리를 꿰찹니다. 눈에 선한 것처럼 우리들이 보고 있는 ‘형상’들입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쌓아둔 돌무더기나 마을 앞에 심기워진 나무를 보고도 절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말 뜻 그대로 ‘어리석은 것’, ‘우상’ 입니다. 이처럼 모든 우상은 우리들 스스로 ‘생명’을 부여하고, 생각의 자리를 내어주어, 그렇게 ‘신’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 순종함으로 든든한 믿음을 내면에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게 되면 되면, 불안이나 두려움이 마음을 뒤흔들때 누구나 이런 나약함에 내몰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인간을 알 수 없고, 인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칼빈의 말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고,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를 모를 때, 우리는 왜곡된 생각의 망령이 이끄는 대로 헛된 수고와 몸부림에 갇혀 살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단호합니다. 그분의 명령과 법은 ‘~하지 마라’, ‘~해라’는 절대적 명령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형식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창조의 주님, 절대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린다면, ‘절대’라는 단어 대신에 ‘마땅한’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절대적 명령인, 십계명을 통해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달리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된 존재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니 우리는 순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우리는 무능하고, 그가 생명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잇대어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 마땅히 따르고 순복해야하만 하는 분입니다.
말씀앞에 절대적으로 응답할 때 그제서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가 선명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가 분명해지니 있어야 할 제 자리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절대적 순종으로 그를 대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헛된 것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절대자로 찾아오십니다. 반대로 절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말씀의 자리를 두려움이나 불신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붙는 ‘절대’의 수식어를 대체하려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나 자신의 생각이 모든 우상의 근본에 서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놓치고 그분의 약속이 있음을 잊는 순간, 주님의 약속은 무의미해지고 우리 영혼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 걸음이 두렵고 불안합니다. 우왕좌왕하고 허둥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없음의 자리로 곤두박질칩니다. 내면의 중심과 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입니다.
원인이 분명하니 해결책도 단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이 몰려올 때 우리가 행할 것은 마음과 생각안에 헛된 우상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 되시는 주님을 향해 돌이키고 기다려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고, 그분의 명령은 절대적인 명령,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할 말씀이니,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4
유대인들의 신앙은 이 주도권을 도둑질하는 곳에서부터 그릇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했고 율법을 지켜냄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때로는 성전이 율법을 대신했습니다. 이방인인 헬라인들은 지혜를 얻어 무지에서 벗어나면 절대자를 만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럴듯하지만 모두 주도권이 뒤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말씀도, 성전도 거룩한 것일 수 있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하나님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해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던 주님의 말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상대화되는 성전에 가두려는 성전신앙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전을 대신해서 세우시겠다고 했던 새로운 성전은 바로 당신의 몸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눈에 보이는 성전에 갇혀계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절대의 아멘이 되신 당신의 몸을 통해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찢겨진 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우리안에 찾아오셔서 우리 자신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우리의 발이 닿는 모든 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이제 설교 모두에 드렸던 질문에 답을 해야할 차례입니다. 십자가는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일 수 있을까요?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운 어떠한 것도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선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허다한 우상들을 세우고, 윤리, 도덕, 교육, 정치,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살인, 폭력, 전쟁, 기근, 온갖 갈등과 고통과 같은 문제는 날마다 더 무거워만 갑니다. 뿐만 아니라 불행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운이 좋아서 무탈하였다해도 종국적으로 맞이해야하는 ‘죽음’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절망과 무력함의 실존에서 하나님의 용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죄 용서의 유일한 길로 삼아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 뿐입니다. 전능자에 의해 절대의 은총이 주어졌으니, ‘아멘’으로 절대적 순종에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두려움에 돌아서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마음에 두려움을 담고, 헛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우상을 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있으라’하셨을 때 만물이 ‘있음’으로 답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명령앞에 언제나 ‘답’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말씀에 응답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에 ‘십자가’라는 시련을 가져다 주겠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또한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과 평강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부활이라는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구원의 능력과 지혜가 숨겨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며 사십시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감으로, 죽으면 사는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발견하는 복된 사순절의 기간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