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1 사순절 5주
성서일과
- 1독서 | 예레미야 31:31~34
- 응송 | 시편 51:1~12 혹은 시편 119:9~16
- 2독서 | 히브리서 5:5~10
- 3독서 | 요한복음 12:20~3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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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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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안에 담기는 '주님 마음'
1
사람은 ‘관계’안에서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제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잘 났어도 온전히 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있음 자체가 기꺼이 자신의 자궁을 빌어준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그뿐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먹고 마시고 살아감의 모든 것이 누군가의 ‘있음’ 덕분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나’는 곁을 지나쳐간 수 많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와 경험 덕분임을 감사할 수 있다면 함께 하는 삶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 혼자의 힘으로 충분한 것처럼 큰소리치며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머물고 지나간 자리에는 늘 상처와 아픔이 깊이 남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흔히들 ‘이스라엘’을 혈연이나 민족, 지연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본래 수 많은 소수의 떠돌이 집단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그들입니다. 노예로, 또는 나그네로 애굽에 머물던 이들이 어느날 자유를 찾아 함께 길을 나섰고 가나안이라고 하는 소망의 땅에 근거를 잡게 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야웨’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내셨다는 공통의 경험과 고백안에서 맺어진 공동체이다보니 그들에게는 국가나 땅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있다는 증거로 붙들고 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율법’ 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언약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었기에, 이 법을 지키는 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유효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법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2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였어도 이혼과 함께 속절없는 남남이 되고마는 것처럼, 언약이 파기되었으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깨어진 셈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은 남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책임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없어 몸이 닳은 것은 깨어진 관계의 피해자?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을 위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시겠다는 의지를 전해주셨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이 관계의 증거인 당신의 법을 그들의 마음안에 주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마음’과 ‘심장’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가 ‘레브’입니다. 재미난 것은 ‘레브’가 특별한 대목에서는 모세오경, 또는 하나님 말씀과 법인 ‘토라’를 뜻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법)을 그들의 마음에 전해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것은, 그들을 향한 당신의 절절한 ‘마음’이었던 겁니다. 그러고보니 주님의 법을 찬찬히 읽고 묵상하다보면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법안에 담겨있는 정의와 공의, 자비와 인애는 모두 고스란히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입니다. ‘주의 법이 심중에 있다’(시편 40:8)고 했던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과의 이런 만남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3
사람은 제 마음이 있으면 하고, 또한 마음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다. 비록 몸은 떨어져있으나, 마음이 함께 있다면 그리움이 됩니다. 하지만 몸은 같이 있으나, 마음이 떠나 있다면 그것은 불륜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새겨놓은 곳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는 죽음앞에서도 꺾어지 않을 만큼 단호하고 견고한 것이 우리 마음이지만, 작은 시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만큼 허무하고 연약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고 있지만, 정작 이 물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셔야 할 질문입니다. 과연 이 물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어야 할 마음에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 세상이 좋다하고 복되다 하는 것들을 채우려고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인류 역사 가운데 단 한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시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하나님께 담아드렸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댁이라고 하는 인물로부터 시작하는 2독서 본문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성서기자는 유대교 전통이 세워지기도 훨씬 이전의 신비에 감추어진 인물인 멜기세덱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족보로 보자면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아론의 계열도 아닐 뿐더러, 대제사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 사명이고 최선일 뿐인 그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후일 신성모독이라는 올무가 되었던 속죄를 선포해 주시는 대제사장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근거로 속죄, 죄 용서의 선포를 하실 수 있던 걸까요?
예수님의 속죄의 선포는 주님께서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이신 분, 즉 언제나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불행한 우리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용서받았다는 속죄, 즉 하나님께 용납되고, 받아들여졌다는 선언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겁니다. 누구도 감히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던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죄인을 향한 속죄의 선언을 하시고, 속죄의 주님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그분의 뜻과 일치 되어 계셨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깊이 아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계셨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하셨던 그분의 말과 행동, 삶의 모든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될 수 있을까요?제 아무리 그럴듯 할 만큼 거룩해 보이고 신실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걸음이 얼마나 비틀거리는지, 깨끗함을 말하는 그 마음안에 사특함이 꿈틀대고 있음이나, 심연 깊은 곳에 도사리는 얼룩들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조금만 해가 될라치면, 내 뜻과 다르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십시오.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로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지향하는 지순한 순복과 따름의 길을 걷고 계신 예수님의 삶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5:8 ~ 10
시퍼런 죽음앞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으셨던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 온전히 하나님과 일치되어 사는 것이 ‘순종’함에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실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느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응답하여 선택하셨던 예수님의 길이 그를 온전한 구원과 그리스도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5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만 새겨두고 제 마음에는 세상을 채우려 부산하기만 할 때,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판이 아닌 자신의 마음안에 오롯이 담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보면 두려움에 휘청이던 마음이 든든히 서기 시작합니다. 온갖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결한 하나님 마음으로 가득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도록 가리우고 있는 현실을 가로질러 의연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아들을 향한 하나님 마음의 충만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히 쌓이자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치의 길이 기적을 베풀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던 사람들의 영광을 받는 곳이 아닌 고난을 통과해야하는 그곳에 있음이 더욱 선명해보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위에서 그제야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자신을 드러내신 이유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다는 안정감과 일치를 현실의 무게를 거슬러야만하는 고난의 때에 이르러 경험하곤 합니다. 믿음은 믿음이 필요한 순간에 드러나고, 처절하게 버림받은 것같은 고독의 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마음을 울리고, 깊은 사랑이 싸늘해진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닌 돌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두고 만 사람들이라면, 막상 고난의 문을 통과해야할 때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채워져있어야 할 하나님 마음은 비어있고, 버려야할 제 마음만 가득차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 요한복음 12:31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패망하고, 버림 받은 것만 같은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오히려 주님으로 인해 성공과 승리를 자랑하고 큰 소리치던 세상의 기준과 가치와 권세는 십자가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삶과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납받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언약을 새겨졌던 옛 돌판은 깨어지고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그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새겨주셨으니, 적어도 하나님이 직접 깨트리시지 않는 한 이 언약은 결코 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의 관계를 유효하게 성취하고 누리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응답하셨던 것처럼, 이제 새 언약의 상대인 우리의 자발적 응답이 필요합니다. 언약의 상대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듯, 우리도 또한 새로운 언약이 성취가 되어주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담아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행여 이 언약의 관계를 깨트리면 어쩌나 불안해 하거나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언약의 관계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이끌어오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 관계를 지켜내시기 위해 당신의 거룩하신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