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8 종려주일 (고난주일)
성서일과
## 종려주일
시편 118:1 ~ 2, 19 ~ 29
마가복음 11:1 ~ 11 혹은
요한복음 12:12 ~ 16
## 고난주일
1독서 | 이사야ㅑ 50:4 ~ 9a
응송 | 시편 31:9 ~ 16
2독서 | 빌립보서 2:5 ~ 11
3독서 | 마가복음 14:1 ~ 15:47 혹은 15:1 ~ 39 (40 ~ 47)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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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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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난받는 그리스도입니까?
1
오늘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번 주간 고난주간 성서독서를 함께 읽습니다. 1독서인 이사야서나, 시편 응송, 그리고 복음서가 모두 버림받은 여호와의 종, 그의 고난과 죽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행복한 삶, 절망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함임에도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달리, 유독 기독교는 그렇게 회피하고만 싶은 ‘고난’이나 ‘죽음’에 천착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성서독서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은 저 하고 싶은 것 하다가 경험하게 되는 손해나 고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주목하는 고난당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존의 삶,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한 사람들, 주님의 말씀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며, 그들이 당한 핍박은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서고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데 고난을 받고,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2
구약의 하나님의 종이나, 신약의 예수께서 전하신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라는 복음이었습니다. 지금의 살아가는 삶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초대의 말씀이 듣는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았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야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기지만, 사실 누구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임했다는 말은 곧 지금의 나라는 허무 가운데 사라질 그림자일 뿐임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득세하는 이들에게 복음은 곧 그들의 세계가 끝났다는 선언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대단히 위험하고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좋지 않은 소식 일뿐입니다.
1독서 이사야서 말씀의 본질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1독서 이사야서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을 구출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건져내시겠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일까 싶지만 그건 우리들 생각일 뿐입니다. 포로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유대의 제사장들이나 귀족출신이었던 그들은 바벨론의 유화 정책 덕분에 신분이나 삶이 꽤 우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지난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억에 각인된 하나님은 패망한 신이었고, 유대민족에 대한 자긍심 같은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유대에서 살던 때보다 지금의 삶의 수준이 더 높았졌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돌아가야 할 유대는 말 그대로 패망한 척박한 땅입니다. 이제 그들을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은, 말그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강요이며 불편합니다. 하나님이 강요하시는 고난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합니다. 이 세계 가운데 살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겸할 수는 없습니다. 둘중 하나의 백성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나라에 속하는 순간, 저 나라에서는 배척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복음서 말씀도 대제사장 일행의 음모에 내몰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예수의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왜 죽임을 당하게 되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선택이 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대신, 세상으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스가랴 9장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 땅에 의해 살해당하셨지만, 이 때만 해도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군중의 소요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 겁니다.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은 그닥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입성하는 정복자라면 몰라도 나귀를 타고 성문으로 들어오는 예수와 그를 둘러싼 유대의 예언과 신화 따위에 마음 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일행들은 달랐습니다. 본문은 소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하는 주님의 나라가 로마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 자신들의 세상과 충돌하고 전복할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3
자신들이 안전하려면 방법은 예수를 제거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세계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예수의 말, 행동, 존재 자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후 예수를 붙잡고 죽음으로 내모는 그들의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면 사악하고 악한 음모로 하나되어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판결했던 산헤드린의 재판이라는 것도 엉터리입니다. 그 밤 주님을 붙잡아 올 때 이미 산헤드린 위원들이 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모여있었다는 것도, 유대 법에 따르면 저녁에는 재판을 할 수 없음에도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것도 모두 음험한 음모에 의한 불법입니다. 일사분란하게 예수를 죽이려던 그들의 걸음은 조마조마했을 겁니다. 그 음모가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낭패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주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산헤드린으로서는 사형을 권유하고 조언할 수는 있지만 로마의 지배아래 생사여탈의 사형집행권한은 오직 로마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일당은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를 죽이려고 들이댄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것이었음에도 빌라도에게 그를 고발할 때는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할 때 덮어씌운 올가미가 ‘유대인의 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로마에 대한 반역과 반란을 꾀하는 운동이라는 고발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일당이나 빌라도 총독 모두 저들의 나라의 위협이 되니 예수를 잡아 죽이는데 하나가 되었고, 그들의 음모대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에 의해 학살당했던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도 한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북부 마을인 세포리스에서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2천여명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도 당시에는 흔했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많았을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유독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조명하고 있는 걸까요?
복음서 기자들 뿐 아니라, 초대교회는 모두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불법과 폭력,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세상, 결국 하나님의 아들 마져 살해하는 세상을 더는 두고 볼 수도, 침묵할 수도 없으셨던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예수안에서 보게 된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마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 막 15:37 ~ 38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지르는 휘장은 10규빗(5m) 폭 10규빗(5m) 두께가 약 15cm 나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찢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래에서 위로가 아닌,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 사건이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과는 비교할 수 도 없는 하나님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찢은 놀라운 사건이 예수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인간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그 일, 예수의 ‘부활’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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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번째 질문을 해야할 차례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을 타고 정복자로 입성하는 세상의 메시아와 달리, 우리의 주님은 고난받는 메시아여야 하는 것입니까? 천군천사를 통해 세상의 불의함을 단박에 끝장내버리시면 좋을 테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 밖에 없으셨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보니 죽음의 겁박앞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기도를 꾹꾹 삼키고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걸음속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리할 수 없다’는 하늘에 잇댄 자의 결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가 현실이 된 사람이라면 어찌할 수 없는 겁니다. 조국의 독립이 보이고, 불의와 항거하며 자유를 외치는 것이 하늘 뜻임을 알게 된 사람들이 목숨을 던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박에 세상을 뒤엎고 악을 멸해주시기를 바라지만, 만일 지금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앞에서 우리는 안전할까요? 로마의 막강한 힘 앞에서 유대인들이 절망을 경험했다면, 하나님의 압도적인 힘은 세상 전체를 향한 치명적이고 처절한 폭력일텐데 이것을 세상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말그대로 ‘종말’인 겁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폭력적 힘과 보복은 하나님께는 훨씬 쉽고 편한 길입니다. 하지만 기꺼이 세상의 힘앞에 져주심과 길이 참으시는 자비하심, 자신의 육체로 우리의 허물을 덮고 가리워주시는 은혜로 인해 우리는 오늘 살았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편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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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물음입니다. 과연 ‘우리가 고난 받은 메시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입니다. 세상에서 보고 들은 승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고난과 죽음은 패망이고 실패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승리이고 생명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여간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지금 미얀마에서 자유를 향한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슬퍼런 군부에 의해 시민들의 생명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군부를 이길 힘이나 능력은 없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옳다고, 이 길이 참된 길이라고, 곧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우린 이런 갈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군부가 장악을 하든 말든 그저 내게 아무일 없기를 원하고, 어쩌면 군부가 약속하는 평안을 바랄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상은 늘 평안과 거창한 번영을 보여줍니다. 로마도 ‘팍스 로마나’를 외치며 자신들의 평화를 자랑했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돈을 많이 벌거나,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것이 제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평화하게 하는 길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로마의 평화는 피정복국가의 피 위에 세워진 잔인한 평화였고, 오늘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가진 자들만의 평화일 뿐임을 외면해서는 않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33b
그러나 이와 달리 예수는 달콤한 환상 대신, 오히려 환란과 핍박을 이야기하십니다. 듣기에 거슬리지만 그의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은 환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눈을 가리워도 그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고 세상을 거스르며 산다는 것도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는 여전히 이런 환란의 길을 걸어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삶에 채여 무너지고, 갑작스레 다가오는 고난 속에 당황하고 놀라고 암담해 합니다. 예수를 믿으며 고난을 가로지르기 보다는 어찌 회피할 수 있을까?에만 찾다가 결국은 세상이 말하는 거짓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반복하고 맙니다.
타인의 피위에 세워진 로마의 평화, 빼앗긴 이들, 소외되고 박탈당해 눈물흘리는 이들의 삶위에 세워진 거짓된 세상의 평화를 거부하고 저항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이 결국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부했던 이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던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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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자신을 향한 마지막 물음앞에 섭니다. 고난과 환란, 역경, 십자가야 말로 주님과 생명을 함께 하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이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이상 ‘걸어 갈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처럼,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이 수모와 멸시와 치욕을 감당해낼 수 있던 이유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고’(7절),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8절), ‘보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9절) 라고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또한 동일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그밤에, 십자가 위에 달리셨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주님을 붙잡는 것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신앙을 붙들고 씨름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따져묻고 싶을 겁니다. 맞습니다. 살려고 하는 우리 본성은 태평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은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어리석음으로 여깁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죽을 만큼이 아니라,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성경은 성도란 예수를 믿을 때 비로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내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않된다’ 여기던 내 기준을 무너트리고 주님께 기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일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바울의 말도 새롭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신앙에 들어선 순간부터 날마다 죽음을 요청받아왔음에도, 다만 자신의 경험, 지식, 욕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라도 살아보자는 본성을 따라 우리는 죽음을 외면해왔습니다.
제 힘으로 살려할 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죽으면 다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무너트리고 깨트리면,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생명과 만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찬가’를 부르며 신앙을 지켜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천지가 무너지고, 삶이 뒤엎어지는 현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이 한주간 만큼은 바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는 사람들이 되어 봅시다. 살아야겠다는 몸부림에 지쳐갈 때, 고난이 닥쳐오고, 황폐한 땅에 내몰리게 되며, 내일은 온통 사라져버린 것 같을 때면 의연히 하늘로 닿으셨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찬미하며 생명을 일구는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영혼을 넉넉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빌 2:5 ~ 11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