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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7 주일 설교 - 사람 죽이는 편견, 살리는 사랑

ViaNegaTiva 2016. 7. 17. 15:57

2016/ 07/ 17 성령강림후 9번째 주일


본문 - 마태복음 15:21 ~ 28   "죽이는 편견, 살리는 사랑"


https://youtu.be/NjI-lgkctL0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1 

지난 한주간도 우리 사는 세상은 죄 많은 사람들 살아가는 땅임을 입증하려는 듯,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테러로 수십명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는 참담한 일도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제라고 불리우는 싸드(THADD)를 어느 곳에 배치할 것이냐를 두고 갈등하더니, 소통없는 주먹구구식 결정으로 인해 지역의 주민들이 거센 저항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 모두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임은 분명합니다  두 사건 모두 기본적으로 사람을, 제 나라 국민을 무시하고 깔보는 결과로 생긴 길들입니다

그런데 더 황당하고, 더 맥이 풀리고, 말 그대로 어이 없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과 관련한 사건입니다 

처음 기사를 들었을 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마하니 이런 수준까지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의식수준이 병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기획관이 했던 말은 뉴스를 통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민중은 개, 돼지이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만 한다,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먹고 죽은 아이를 내 자식 일처럼 생각할 수 없다라는 그의 말은 어의없음의 정도를 지나쳐, 인간안에 꿈틀대고 있는 끔직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말 한마디 가지고 너무 심하다 생각이 드시나요 ? 그럴 수 없습니다 말은 세상을 향하여 드러내는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담는 그릇이며, 그 말이 세상을 향하고 있으니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듣는 이의 몫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소위 1% 의식이라고 불리우는 병든 생각들이 비단 나 기획관 같은 몇명의 사람들안에만 있는 것일까요 ?

그를 비난하는 우리들도 사실은 부정적인 모습이든, 긍정적인 모습이든 간에 이런 식의 틀에 익숙해 있거나,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소극적 책임은 없을까요 ?


2

지하철을 타면 간간히 외국인들을 보게 됩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멋들어져 보이는 서양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과, 아프리카나 동남아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서로 다른 공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차별과 편견입니다 백인들은 우리보다 우월하다, 유색인종은, 특히나 흑인이나 제3세계인들은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식의 삐뚫어지고 왜곡된 인간상입니다

외국인들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나 기획관처럼, 신분이나, 권력, 사회적 지위, 재력등을 이유와 근거로 하는 차별도 여전합니다 어디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차별입니다

아이들 중에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빌라나 연립에 사는 아이들이 친구할 수 없는 오늘이 우리들 살아가는 민낯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차별과 편견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려는 것, 다시 말해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나’를 강하게 인식하는 ‘자존감’이라던가, ‘자기애’가 심한 사람일 수록, 타인에 대한 부정과 차별은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선의 색이 진하고 굵을 수록 경계는 더 뚜렷해지는 법입니다

문제는 내가 차별과 편견의 피해자가 된다는 가정에서 우리들의 반응, 불쾌함, 분노, 억울함과 달리, 일단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 나는 좀더 낫다는 생각이 스며든 이후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은 은근한 으스댐, 자만심, 경멸등 가해자로서의, 모습에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3

성경을 읽다보면 그 내용의 난해함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있습니다 문화를 모르고, 언어를 몰라서 생기는 난해함도 그렇지만, 특히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중에 납득하기 어렵고,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발견했을 때는 더 난처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안에도 이런 난처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가버나움을 떠나 시돈과 두로로 향하시던 주님 앞에 여인 한명이 나타납니다 그는 가나안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몹시 고통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딸의 치유와 회복을 소망하며 주님께 나아온 그에게, 주님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냥 냉담한 수준이 아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주님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낯설은 모습이 보입니다 이 이방인 여인에게 주님은 차갑고, 냉담함을 너머서 모욕감까지 주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켜냈던 이 여인은 결국 딸의 귀신들림이 나음을 입은 은혜를 입는다는 내용입니다



4

일단 가나안 여인을 바라보는 제3자로서의 객관적인 자리에 서 있을 뿐인데도 우리 마음은 편치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사랑하고 믿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또 그 분앞에서 우리도 가나안 여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기만 합니다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대체 사랑의 주님이, 원수되었던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 가나안 이방인, 그것도 여인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주고 고압적인 모습으로 대하셨는지 말입니다 어떻게… 짐작이 되시나요 ?


이 장면을 잘 이해하려면 본문의 앞 단락을 유념해서 보아야만 합니다 이 앞에 있던 사건은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벌였던 정결법에 관한 논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받은 율법을 해석해 모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결례와 관련한 논쟁에서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한 정결례를 지키지 않는다며 비난했고, 주님은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한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편견을 강력하게 나무라십니다 (3절)

그리고 나서 바로 시작되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본문의 단어를 주의깊게 살펴야합니다 


21절은 주님이 거기서 나가셔서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거기라고 씌인 곳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논쟁벌이시던 가버나움입니다 그곳을 나오신 주님이 곧장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신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걸음과 행보를 통해 무언가를 보이시려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

두로와 시돈은 당시 유대법에 의하여 매우 불결하게 여겨지던 장소였습니다 정결례로 인해 갈등하시던 주님이 그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시려고 작정하신 셈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가나안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여인이라는 말은 이방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나안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다 쳐죽이라고까지 말씀하셨던 이들이 아닙니까 ?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달라 애원하지만 23절에 비춰진 주님의 모습은 냉혹하기만 합니다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딸의 아픔과 고통으로 부르짖는 여인을 본체 만체 들은체 만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시는 모습이 너무 낯설게만 보입니다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 바로 이전에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자비를 구하며 부르짖는 이 여인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신 것일까요?, 아니면 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시려고 짐짓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었을까요 ?


마침내 입을 여신 주님의 말씀은 매섭습니다 24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한 마디로 이방인인 당신을 만나러 온 것 아니니 그만 하라는 말씀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 여인의 반응과 그 반응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당혹하게 됩니다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여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기서 절하다라는 말을 마태는 ‘프로쉐퀴네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여인이 주님 앞에 엎드려 계속 절하고 또 절하였다는 뜻입니다 처절한 모습입니다 딸을 살려보겠다는 어미의 처절함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끝내 이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마십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인의 입장에서 본문을 읽으니 섬뜩하고 견딜수 없는 모욕감마져 느껴집니다 여러분이시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자리에 엎드려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5

마태는 마침내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하시며 딸아이가 나았다는 말로 상황을 원만하게 정리해나갑니다 하지만 원만한 결과 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괜시리 빈정이 상하고 주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가진 수모를 당하고 모욕을 경험하는 자리에서도 이 악물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가며 비굴하게 엎드려있어야만 믿음이 증명되는 것인가? 라고 말이 목젖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대체 왜 마태복음에는 이 장면이 이렇게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요 ? 이 장면을 잘 이해하려면 복음서가 기록된 연유와 과정을 선 이해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들어있는 마가복음 7장의 내용을 유대교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기록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교 전반에 흐르고 있던 선민의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셨으며, 예수님도 유대인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라는 가치관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자비를 이끌어 내기 위해 이방인인 여인이 이 정도의 수모는 감수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태공동체의 의식이나 정서에 결코 공감할 수 없습니다

본래 이 땅의 주인은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땅에 1200년전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밀고 들어온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그 땅 주인들이었던 가나안 사람들을 개라고 부르며 무시해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개’라고 부르신 것은 그 당시 전통에 따라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표현을 꼬집어서 하신 말씀이신 셈입니다 전통을 붙들고 살고 있는 그들이 들으라고 하신 표현인 셈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여인을 ‘개’라고 부르시는 한편 마음속으로

‘너희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들먹이며 끊임없는 우월감에 젖어 있는 반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지독한 편견과 폭력과 무시와 괄시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고 찔림을 받으라 너희들이 질병처럼 가지고 있는 그 편견과 배타성에도 분노와 적대감이 아닌, 오로지 딸을 낫게 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의 성숙한 믿음을 보라’ 하시고 계시지는 않았을까요 ?

이제 보니 본문의 장면은 주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이미 이 여인안에 사사로이 상처받거나 분노하지 않을 만큼의 성숙한 영성이 담겨 있음을 알고 계셨기에 그 이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편견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식적인지를 고발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또한 유대인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민족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6

사람은 자신과 달리하는 사람에게 배려보다는 배타성과 적대감을 배설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종교가 만든 울타리 안에도, 교파의 담장안에도 갇혀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혹시 누군가를 향하여 편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 아니, 내가 갇고 있는 생각은 편견이 아닌, 정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끼 ?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뜻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계십니까 ? 그것은 주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배타적인 마음이 드십니까 ?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으로서의 편견과 의인인 척하는 우월감이라는 차별을 무너트리시고 우리를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은 주님의 마음과 같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