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9 성령강림후 14주
성서일과
- 1독서 | 아가 2:8 ~ 13 혹은 신명기 4:1 ~ 2, 6 ~ 9
- 응송 | 시편 45:1 ~ 2, 6 ~ 9 혹은 15편
- 2독서 | 야고보서 1:17 ~ 27
- 3독서 | 마가복음 7:1 ~ 8, 14 ~ 15, 21 ~ 23
설교음원
http://naver.me/GfaIdt5E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PO6vnhi_do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동상이몽 (同床異夢) 과 '거룩'
#
1독서 신명기 말씀에는 가나안 목전에서 백성들을 향했던 모세의 설교가 담겨있습니다. 분명 모세가 전하였던 이 말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안에는 모세 자신의 회고와 부탁,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씀이 혼재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가 모세 개인의 말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 말씀일까요?
요즘도 사이비 교주들이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를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게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내 마음의 감동이나 자의적인 해석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는 어찌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잘 오해하곤 합니다. 사실상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는 우리가 입으로 내는 소리와 같은 것을 말이나 언어의 방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처럼 발성 기관을 통과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꾸만 입이 있고, 귀가 있고, 어린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긴 수염이 넉넉해 보이는 어르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은, ‘말씀’은 없는 것을 있도록 존재하게 해주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고 붙들고 있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능력,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근거를 뜻합니다.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어느날 봄 꽃이 어떤 힘에 의해 생명을 틔우는지 알지 못하고, 제 힘으로는 별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나 박쥐같은 작은 생물이 내는 소리 조차 들을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생각이 얼마나 아득한 차이를 뜻하는지 우리는 가늠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머리로 이해한 말씀이 가슴으로 믿어지는 것도, 믿음을 통해 말씀이 삶에서 역사되는 것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일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시고, 만물을 통해 사는 길을 가르쳐주시지만 여전히 우리는 땅을 기어다니는 뱀의 길을 따르고 맙니다. 끝없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
오늘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평상시에도 자신들이 읽고, 듣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르치시던 주님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책잡을 만한 꼬투리 하나를 잡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의 전통을 어기고 손도 씻지 않은채 빵을 먹었던 겁니다. 자녀가 잘 못을 하면 그 부모가 비난을 받게 되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비난을 예수님이 뒤집어 쓰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율법에 대한 전통의 해석을 어기고 부정을 범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는 그들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인 문제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의 뿌리는 본래 십계명입니다. 이것이 점차 오경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다가 훗날에는 예언서와 함께 구약성경 전체를 아울러 ‘옛 가르침’인 율법이라 지칭하게 된 겁니다. (마 7:12)
이스라엘의 삶을 규정하고 지키는 작동원리였던 율법의 가르침은 613개, 하라는 강제명령이 248개, 하지마라는 금지명령은 365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가나안 정착 이후 사람살이가 복잡해지면서 그것만으로 인간 관계 모두를 규율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말씀을 곧장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라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장로들이 모여 율법에 대한 세부항목을 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자꾸만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방법’에만 천착하다보니, 어느새 자꾸만 삶의 자유는 구속을 받게 되고, 오히려 해석의 권위가 말씀처럼 여겨지기에 이르게 된 겁니다. 덩달아 해석의 기준을 제시해주던 장로들이나 율법학자의 권위도 높아집니다. 마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여긴다거나, 그런 목사 자신이 마치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비난을 이렇게 받아 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8)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장로들이 전해준 전통과 해석만 내세우는 어리석은 신앙을 꼬집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한 걸음에서 우리는 참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해석해주고, 잘 차려내어준 식탁을 꿀꺽 삼키려는데만 익숙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요즘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씨름보다는 유명세있는 이들의 설교를 찾아다니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모습입니다. 말씀의 본래 의미를 읽어낼 눈 조차 잃어버린 채, 말씀과 상관없는 왜곡되거나 타협하는 삶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의 관계성인 신앙이 제 자신의 삶이 되지 않고, 종교로 떨어진 형국입니다.
그들이 문제 삼았던 ‘손을 씻는다’는 것은 ‘거룩’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해석된 실천적 방법일 뿐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래의 의미 뿐만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
유대인 전통은 모든 것을 ‘부정’, ‘정함’, ‘거룩’ 이라는 세가지로 구분합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책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 기록의 목적은,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백성으로서 지키며 살아가야하는 ‘법’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란 ‘부정’함은 ‘정함’으로, ‘정함’은 ‘거룩’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룩하게 살라’하면 족할 것을 굳이 그렇게 ‘부정함’의 기준을 세세하게 구분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부정함’을 정의하실 때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뒤에는 반드시 ‘정’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율법의 목적이란 ‘너는 부정하다’, ‘저것은 부정하다’ 선을 긋고 혐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언제나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나 자신’의 부정함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이후에야 비로서 ‘거룩함’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볼 수 있어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통한 우리의 신앙적 책임입니다.
무엇이 부정이 정함이 되고, 정함이 거룩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성소에 필요한 집기들 뿐만 아니라, 성소에서 헌신해야하는 제사장들에게라도 거룩한 기름인 ‘관유’를 부어 구별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정한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 닿으면 거룩해 진다는 것과, 거룩하게 구별된 것만이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늘 실수라도 ‘부정’한 것에 닿지 않으려 전전긍긍 할 뿐입니다. 무엇을 가려먹고, 어떤 사람을 차별함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손쉬운 방삭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무엇인가를 지켜내거나, 또 무엇인가를 금하는 방식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거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거룩'은, 언제나 '하나님께 이어져 있음'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
2독서인 야고보서는 오직 믿음(Sola fidei), 오직 은혜(Sola Gratia)를 화두로 삼았던 종교개혁 당시 루터에 의해 지푸라기 같은 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행동’이나 ‘실천’을 말하고 있는 '야고보서'가 ‘자기업적’이나, ‘자기의’를 강조한다고 여겨진 탓입니다. 그럼에도 야고보서는 정경의 자리를 잃지 않았고, 오늘도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떻게 신앙을 삶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잠언’으로,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인애와 자비가 구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잊지 않도록 외치는 신약의 아모스서로서 읽혀지기도 합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6)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고 있느냐?’ 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실천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들어서는 곤란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실천’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교회’였다는 사실이 전제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는 이들이라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자비와 사랑이 드러날 수 밖에는 없음에도, 그렇지 않다면 지금 네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이어져있는 것일 수 없다는 폭탄 같은 말씀인 겁니다. 그러니 사도가 전하고 있는 말씀의 핵심은 ‘거룩’하신 주님께 이어져있으라는 겁니다.
아름다운 생명과 사랑을 지키고 꽃피우고 열매맺으며, 정결함을 너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은 율법과 계명,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이 주시는 길에 서는 이가 ‘거룩’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해야할 일,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직 끊임없이 그리스도안에 머물며 참다운 정결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5
정결과 순수함, 거룩함이라는 것은 절차나 수단, 방법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거룩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 내 마음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습니까? 때로는 자신의 영혼 뿐만 아니라 타자를 해치고 그들의 영혼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가져다 주는 것만 마음에 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정하게 하고, 주님으로 거룩하게 바꾸지 않으면서, 무엇을 먹어서, 어떤 방식으로, 다른 무엇을 거룩하게 하겠다는 말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기만이고 외식함일 뿐입니다.
성도가 언제나 주님께 잇대어 마음과 영혼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주님께서 쓰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쓰시고자 함일까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 5:8)
정결함과 거룩함은 결국 ‘나’자신이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함이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비난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구실로 ‘거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룩’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며 거룩의 지향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허물을 보려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있는 눈 뜬 소경들일 뿐입니다.
#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늘 전통이 부정하다 정한 이들을 외면해왔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들을 혐오했습니다. 강도만나 피흘리는 이를 피해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문둥병 걸린 이에게 손을 대셨고,
아픈 이들의 상처를 싸매주셨으며,
귀신들린 거친 이들을 당신의 품안에 품어주셨습니다.
모두 부정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정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 인해 부정하다 여겨지는 모든 이들이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이야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힘쓰며, 살아야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타인을 정죄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져있든, 상처가 나있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가지고 ‘거룩하신 주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거룩하신 주님께만 이어져
주님과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부정함’을 ‘정함’으로, ‘정함’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회복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거룩한 당신의 몸, 당신의 교회가 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성도'는 주님께 이어져 온전한 주님의 몸이 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