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2/05/01 부활절 제 3 주

ViaNegaTiva 2022. 4. 27. 13:47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사도행전 9:1-6 (7-20)
  •   응송 | 시편 30
  • 2독서 | 요한계시록 5:11-14
  • 3독서 | 요한복음 21:1-1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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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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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faello Sanzio_ 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 1515-1516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1

성령강림절이 올때까지 7주간의 부활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능력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서일과 본문은 매주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곧장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의 부활’, ‘부활한 몸'에 대한 의문이 깊어만 갑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이전의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이라면 그들이 단박에 알아보지 못했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사흘 째되는 날 이른 새벽,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목격했던 마리아도 등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난 주일 읽었던 본문에서도 다락방에 모여들었던 제자들도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고나서야 그들 가운데 찾아오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부활의 그날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도 한참 동안이나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그가 누구이신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에 관해 전해 듣거나, 혹은 먼 발치에서 지나가며 마주했던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동거동락했던 이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요?

 

2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세번째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세번째 만남에서 주님과 마주한 제자들은 베드로, 도마, 갈릴리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명의 제자들 입니다. 나머지 네명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 만남의 장소는 갈리리 호수라 불리는 디베랴 바닷가입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본딴 이곳은, 본래 제자들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여튼 분명한 것은 이들이 얼마전 두번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만치에서 말씀을 건내시는데도 그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 초래된 걸까요? 그나마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는 말을 유심히 듣던 그들 중에 하나가 주님께서 자신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겨우 알아챘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 요한복음 21:14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이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 세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삼’은 ‘충만’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세번이나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표현을 통해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겁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만 알아보았을 뿐, 다음번에는 여지없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

누군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상황을 성경은 매우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주로 ‘어둠’으로 묘사됩니다. 동이 터오기 이전의 무덤이나, 밤이 내려앉은 다락방, 그리고 오늘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둠’이란 늘 허무, 초조함, 불안과 불확실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누구든지 일단 어둠안에 갇히게 되면,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불완전해 집니다.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됨에 따라, 자신이 처한 현실조차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감동과 감격을 흔적없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불현듯 나타나셨던 주님은 그렇게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셨는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습니다. 마치 실감나는 꿈을 꾸다가 일어난 기분입니다. 어쩌면 정말 환상이라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주님을 잃어버렸던 그 막막함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이 불안함과 불확실성에 인생을 건다는 것이 두렵고 무모해 보입니다. 언제까지 무턱대고 기다리고만은 있을 수 없다 싶었고, 베드로 일행은 갈릴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 본래부터 어부였던 그들의 출발지로 돌아온 셈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노리는 이들의 눈에서 멀어지는 것이 상책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물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왔으니 그물을 던지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지고는 있지만 베드로의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물고기가 아닌, 주님을 애타게 찾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 자신들을 찾아오셨던 그 때처럼 다시 한번만이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다 틀렸다는 생각에 서럽기만 합니다. 주님과 처음 만났던 그날도, 주님을 잃어버린 오늘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인생에 찾아오는 허무와 상실감은 깊기만 합니다. 

 

그 순간 주님은 허무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걸음에 맞춰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던 제자들이 서 있던 그곳에도 동이 터오고 있습니다. 이제 빛이 임하기 시작했으니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게 했던 막막한 어둠은 사라질 겁니다. 어둠이 걷혀 자신들 앞에 서계신 주님을 눈으로는 보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눈은 보지 못하는 눈, 눈 뜬 장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안타까운 주님이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물으시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본다는 것과, 알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4

요한은 주님과 제자들의 이 세번째 만남의 장면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 요한복음 21:1a

 

요한은 이 만남의 주체가 제자들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야 말로 전적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기 계시’와 ‘자기 드러냄’의 사건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지 않는 한, 눈을 뜨고 있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지 못하여 믿을 수 없던 주님을 발견하고 내 삶에 함께 계시는 분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알레테이아’가 ‘진리’의 의미라는 것도, 결국은 보이지 않던 주님을 목격해가는 것과 동의어인 셈입니다. ‘영적’이라는 의미도 무언가 신비주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내일’을 내다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이처럼 감추어졌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디베랴'바닷가, 살아내야 한다는 강요에 내몰려 고기잡이 하듯 허무와 싸워야 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빛’이나, ‘눈’이 밝아졌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1독서 본문에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나가고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제야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렇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진 눈,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두워져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탐욕과 죽음에 짓눌린 우리의 눈이 열려지게 될까요? 

 

그러고보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기 이전에 먼저 듣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덤앞에서 헤매이던 마리아는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을 들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들었던 제자들은 못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기 전에 ‘평화하라’는 말씀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바다에서 헛탕만 치던 제자들은 허무 가운데서 ‘얘들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는 말씀에 순응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겁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그 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한 말씀만 있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눈을 가리우던 비늘이라도 벗겨지고 마침내 믿음의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5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분명해집니다. 주님에 의한 ‘회복’입니다. 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사울은 이제야 가리워졌던 것들이 벗겨지고 마땅히 보아야할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응송인 시편 말씀은 깨어진 성전앞에 섰던 공동체의 믿음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절망의 상황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께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30:3)라고 외칩니다. 삶을 관통한 경험이 만들어낸 고백들입니다. 시련앞에서 상황앞에서 무너져내리던 믿음이 회복된 겁니다. 서신서인 요한의 계시록은 하늘에서 이루어질 죽임 당하셨던 어린 양을 향한 경배와 찬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음에도 그분의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살해되었던 그분께서 본래부터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미를 회복하시는 대목입니다. 모두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일들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방문을 통해 두려움, 의심, 불안과 무력감이 떼어 놓았던 제자들과 주님과의 관계와 거리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안에 있는 상처라는 것은 반드시 끄집어내질 때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꺼낸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럽고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어서 자기 스스로는 꺼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꺼내주어야 하는데 그럴때 마다 고통에 더 깊이 속으로 움츠려들기 마련입니다. 오직 기다려주고, 보듬어 주고, 따듯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사랑외에는 상처는 꺼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과의 믿음의 관계에서 깨어진 제자들의 상처를 회복해주시기 위해, 그들을 ‘얘들아’라는 뜻의 ‘파이디아’라고 하는 말로 불러주셨습니다. ‘파이디아’는 ‘유아, 어린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아직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루어가기에는 미숙할 뿐입니다. 주님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그제서야 겨우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감당하기에 그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연약합니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는 이런 미숙하고 어린 사람들은 ‘쓸모 없다’여기고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불러주셨으니 이들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회복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들은 맡기신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신실한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번이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도, 세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다는 부끄러움과 상처로 서러웠던 그를 주님은 여전히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함이었고,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신실함의 자리로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들 모두를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었던 것처럼, 주님을 만나고 나면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사람은 듣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불러내셨던 소명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시름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에 떠밀려 속절없이 비틀거리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당신을 드러내시고 찾아와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6

복음서의 본문은 결국 주님께서 마련하신 생선과 빵의 조반을 함께 나누는 장면에서 끝을 맺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목적이 그까짓 아침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서인가?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한 이 날의 식탁은 우리 모두를 거룩한 성찬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모티브입니다. 주님께서 마련해주시는 식탁은 우리의 음료와 양식이 되시는 주님 자신을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 어둠에 시달리던 제자들이 주님이 마련해 주신 조반을 먹고 나서 희망찬 새 아침을 맞이했듯, 부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식탁을 통해 어수룩하기만 했던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것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우리라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식탁에서 생명의 떡으로 주님을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성장해갈 겁니다. 주님으로 충만해지고 나서야 비로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나를 따르라’는 당신의 사명을 맡겨 주실 겁니다. 

 

‘나를 따르라’라던 처음 주님과 만났던 그 날의 부르심은 주님의 죽으심과, 불안, 막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맡기신 두번째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려는 이들을 찾아와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격려하고, 위로하시며,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셔서 사람을 낚는 주님의 증인으로 성장시켜주실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양식삼아 살아가십시오.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두려워하지 마라시던 주님의 말씀을 곱씹으십시오. 외롭거나 낙심될 때는 ‘고아와 같이 홀로 두지 않겠다’시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불확실하고 무의미한 삶의 무게가 힘겨울 때면, ‘내 양떼를 치고, 먹이라’는 말씀을 씹고 삼켜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하는 말씀의 식탁에서 우리는 어느새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