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0160911 성령강림절 17주

ViaNegaTiva 2016. 9. 11. 16:52

2016년 9월 11일


본문 - 예레미야 4:11~12, 22~28      


 https://youtu.be/4pDJ2sBPPN0  = 클릭하시면 예배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절망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사람 살이 그 척박함

불과 몇십년, 아니 몇년전과 비교해보아도 요즈음 참 살만한 세상입니다 기술의 발달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화려하기만 합니다 집에 들어서기전에 냉난방이나 청소, 요리까지 완료된 집도 있고, 사람을 대신해서 운전까지 해주는 자동차에, 설계하기만 하면 뚝딱하고 만들어내는 3D 프린팅 기술까지, 오늘의 시대는 잠깐만 눈을 감아도 시대에 뒤쳐질 듯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살기 좋게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다지도 우리들 마음은 허전하고 공허하기만 할까요 ? 전도를 하다가 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직장도 다녀보고, 자기 사업도 도전해본 청년이었습니다 커피숍을 운영하는 그 청년은 머지않아 제3국으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땅에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파트 한칸 장만해두지 못하였으면, 꿈을 꾸거나,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할 자격도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뻔뻔하고 불의한 이들의 잘사는 모습에 견뎌낼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서글펐습니다 ‘그래도~!’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나아질거야’라는 무책임한 말로 그를 위로해줄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했고, 더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다고 했던 유혹과는 달리, 실상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오늘은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고만 있습니다 삼포세대나 사오정이라는 말이 낯설었던 것이 불과 몇년전인데 ,지금은 오포세대라는 말도 익숙하기만 합니다 이땅의 청년들은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마련을 포기하는 다섯가지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저당잡히는 것이 아닌, 포기를 강요받는 시대입니다

어렵사리 땀흘리며 일해서 내집 하나 장만하려고 하여도 이미 돈이 모일 때쯤이면 턱도 없이 오른 물가에 좌절하게 됩니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변할 것이 없으니 포기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불편하고,더 가난하고, 더 못살던 때에는 포기라는 말보다, 희망이라는 말이 더 살가웠는데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식보다는 몰상식과 패거리 의식이 서로 다른 자신의 뜻과 생각을 세울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그래서 부정의를 지적하는 정의로움이 괜시리 문제를 일으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하는 세상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참아내라고,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이상한 세상입니다 마치 꼬리 없는 여우 마을에 꼬리 달린 정상적인 여우가 이상한 여우 취급을 받는 것 처럼 말입니다  


돈이나 물질을 통해 행복을 채워보려는 시도의 끝은 늘 이런 허무와 포기를 강요받는 결과앞에 우리를 내몰게 됩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고 사람을 대신할 물질이 가치를 덮어버린 결과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도 자신에게 유익함이 없으면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도 내가 키우는 애완동물의 상태가 더 중요한 물상의 시대가 되어버린 탓에 우리는 모두 영혼을 잃어버린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


살아가는 삶의 현주소가 심판의 자리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와 또 불의함과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믿는다면, 오늘의 이 세계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심판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지옥이 아니고, 심판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살아가야할 참 인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채 짐승의 탈을 뒤짚어 쓴 것처럼 약육강식의 허탈한 세상살이에서 발버둥치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인간 삶의 필연적 결말이며, 그러한 삶에 대한 전능자의 심판의 결과가 바로 오늘 고통과 슬픔 허탈과 공허로 얼룩져있는 삶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 그렇게 보면 ‘심판’이란 전능자의 폭력적 위압행위가 아니라, 그 전능자를 포기하고 버린 우리 스스로 자초하는 생명의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은 세상의 멸망, 세상에 불을 키우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악한 행실 (악행)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망조가 들어가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탐욕으로 병들어버린 이 종말로 치닿게 되는 원인은, 평화를 잃어버린 채 전쟁과 기근, 가난과 굶주림, 죽임이 가득하게 된 원인은 우리들의 악한 행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한채 자시의 배를 채우려는 악한 본성과 탐욕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행실이 바로 이 땅을 심판의 땅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으니, 인류의 책임을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종말은 허구가 아닙니다

종말이나 심판의 문제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말과 최후 심판의 개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곁에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현듯 임한, 급박하게 임한 심판에 대한 당혹감과 긴박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심판이 임하여 있는 셈입니다 잘 사는 것 같고, 문명은 점점 발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살아내는 지금의 걸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돌이키지 못한체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이라고 할 수 밖에요

일어날 것같지 않던 것들이 내일이 되었을 때 절망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열심히 살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면서 산다면, 살고 있는 동안은 종말이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그 종말이 현실로 닥쳐와있는 것과 같습니다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죽음이 더 가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인생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건강을 상실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왜 나만있는 고난이냐고 외치게 되는 모든 문제들이 누군가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이 아닌, 실은 종말 앞에 서 있는 모든 인류의 공동운명인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안에는 종말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운명이고, 이 삶의 자리가 심판의 자리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붙잡으려고 하는 것들은 느닷없이 경험되고, 우리를 찾아오는 종말 앞에 무슨 도움이 될수 있을까요 ? 조금만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몸부림은 모두 ‘내일’이라고 하는 종말, 운명의 날에 스스로를 구원해보려는 몸짓들이 아니겠습니까 ? 세상은 또한 그렇게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손짓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몸부림은 하루살이의 몸부림처럼 무력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왕과 지도자들 낙심, 제사장들이 놀라고, 선지자들도 놀랄 것이라고 예레미야가 외칩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권력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실제적 힘입니다 모두들 그 앞에서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종말의 절망앞에서 당황하여 혼비백산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종말앞에 무력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종말앞에서 자신조차 구원해 낼 수 없는 무력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짓된 권력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의 때, 종말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오늘 돈을 벌어두면 내일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내일 내 생명이 종말 앞에 설 때, 돈은 무력한, 아니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어색한 이들이 대목에 끼어있습니다 왕이나 지도자들은 그렇다고 해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요 ?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이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아닙니까 ? 그런데 그들도 혼비백산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

종말의 심판주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그러니까 심판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심판은 놀랄만한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믿음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시험준비를 꾸준히 해온 학생이라면 갑자기 잡히는 시험일에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시험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학생은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예레미야가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당황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거짓된 종교인들이 이런 날, 즉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또한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사실은 믿고 있지 않았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다가 패망했던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다 !!!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지 않아야할 것을 믿는 어리석음이 바로 종말속에 자신을 내몰아 버린 셈입니다


교회도 종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종교의 모습을 정확히 빗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말과 심판의 날을 이야기하면서도 지금은 그 심판이 없다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부끄러움 없이 탐욕에 취해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정확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고, 또한 정확히 이런 심판, 종말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제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범죄하고도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는 뻔뻔한 모습이 우리안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

여성도와 불륜을 저지르고도, 헌금을 횡령하고도 버젓이 강단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는 목사가 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중직을 맡고도 사기나 범죄를 업처럼 저지르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입니다 이것이 중직을 맡고 있는 특정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 개개인의 우리 일상속에서 얼마나 많은 기만과 속임이 있습니까 ? 말씀을 듣고도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에 타는 가슴으로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하나님앞에 고개를 떨구지도 않고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


이런 일은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절망의 날이 올 것을,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권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불의를 반드시 심판하실, 세상의 악을, 죄와 사망을, 또한 불의에 편승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레미야가 고발하고 있는 유다의 패망, 하나님의 종말의 날의 묘사는 바로 그 심판을 경험하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을 믿지 않는 것과 동의어임을 기억해야합니다


종말에 눈감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세상

30-31절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 고통이 들리지 않는가 ?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소리와 같은 시온의 딸들의 외침과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

실은 우리가 모두 이 비명에 귀를 막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타락하고, 부폐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분명히 믿으며 살고 있다면, 우리의 삶에 거짓이 스며들 여지는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며 불의할 수 없고, 세상을 공의로움으로부터 빗나가도록 방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시대의 고통이 들리지 않습니다 불의가 정의를 뒤 엎고, 공의가 땅에 떨어져, 연약한 자들의 신음과 피맺힌 절규가 끊이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좀더 편안하게 살 것인가 ? 남들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가 ? 부유하게 살 수 있는가 ? 나의 왕국을 세우고 지탱해 갈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탐욕의 삶입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 굳은 마음이 되어버린채 말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기독교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우리가 세상의 편승하며 살고 있으면서, 눈물을 듣지 못하는 굳은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이 땅은 배고픈 이들, 상처받은 이들, 억울한 이들, 아파하는 이들, 목숨을 위협받는 이들의 눈물이 넘쳐나는 심판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절망속에 꽃피우는 구원

지금부터 대략 25~600백년 전에 예레미야가 적고 있는 본문을 읽고 또 읽어보면 절망입니다 세상은 정의나 공의, 사랑고 자비, 인애와 생명을 향한 최소한의 인간다움 마져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만 돌아갈 수 있을까? 암담하기만 합니다 모두다 문제라고 하는데 시원스레 답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체 이 전능자의 심판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불의를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구원하고 변론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그런데 본문속에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폭풍우치는 짙은 어둠속에 한줄기 빛이 임하는 것처럼, 진흙탕속에서 청아하게 피어난 연꽃처럼 소망말입니다

1절을 읽어볼까요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이 심판으로부터, 이 종말의 참담한 현실에서 구원을 향해 돌아오라고 외치는 처절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어떤 강한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진흙탕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는 그 목소리 말입니다 


진실, 정의, 공의가 사람들의 살아냄 속에 피어나는 구원의 나라, 생명이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나라로 건져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선언되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이 초대에 응하여 종말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삶에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하며 종교적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라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여호와께 속하는 길, 종말과 심판으로부터 구원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삶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

할례란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백성으로서의 증거’의식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증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할례란, 삶의 할례란 ? 세상속에 살고는 있지만,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 답게, 온통 거짓과 속임과 탐욕을 붙잡으라고 세상이 가르치고 내 몰고 있는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거스르고, 주님이 걸어가셨던 자기 희생의 십자가의 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실, 정의, 공의를 삶에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마음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이렇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는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공포로 다가오는 종말과 심판속에서도 구원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