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9 부활절 7주 (주의 승천주일)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사도행전 16:16~34
- 응송 | 시편 97
- 2독서 | 요한계시록 22:12~14,16~17, 20~21
- 3독서 | 요한복음 17:20~2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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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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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것들을, 여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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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주의 승천 기념주일’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주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며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제는 정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드님이 되신 겁니다. 계시록은 그렇게 하늘로 오르신 주님의 급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 요한계시록 22:12
2독서인 요한의 계시록 22장 12절의 말씀입니다. 기다리다 못해 우리를 향해 상을 들고 달려오시는 주님의 모습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상을 받을 사람들에게만 이 장면이 기쁨이며, 희망일 수 있다는 겁니다. 대체 무엇때문에 상을 주시는 걸까요? ‘갚아주시기 위함’이라는 대목이 있으니 무언가 ‘보상’을 해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보상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15절에 언급되고 있는 개들, 마술쟁이, 음행하는 이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이들과 달리,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더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 날이 우리의 업적을 평가받는 날에 그친다면, 제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딱히 ‘구원’이란 결국 자기 스스로에게 달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율법주의의 딜레마에 사로잡히고 마는 셈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마주하게 되는 17절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라는 말씀의 선언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자기 구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상’은 우리의 공로나 업적을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주 주시는 은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품어지게 되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절없이 세상에 던져진 채 서러움 당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고, 에덴의 역사 이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만남의 사건을 위해 주님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계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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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사건은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루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과 하나셨다는 것과 그와 같이 주님도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이루기를 바라시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실 때만 비로서 보이는 것들이 있고, 비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주님의 제자, 증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마다 그냥 보내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의 위로와 사랑을 채워주셨고, 믿음을 북돋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증인이 되라고 하실 때에도 오직! 성령을 통해 주시는 권능을 가지고 이루라고 해주셨습니다. 부여하신 사명이 무엇이고,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모든 것은 주님이 준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하나가 될 때, 특별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 요한복음 17:24
우리가 하나님이 주님안에 부어주신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임재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여기에 계신다는 임재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무언가가 내 삶의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주님안에서 일어났다는 것,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면 얻게 되는 유익함은 분명합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니 위로를 얻을 뿐만 아니라, 시련과 고난의 현실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절망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고, 위기와 환란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성도의 능력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의 영광을 엿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세상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7:23)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세상도 주님안에서 한 몸으로 평화하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복음서의 내용은 이처럼 우리가 이미 제자로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과 이루게 된 한 몸은 연약함 투성이인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리를 만나주시고 기꺼이 하나가 되어주신 주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끝자락까지 이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로부터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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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루디아의 집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던 바울이 만나게 되었던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귀신에 들려 점을 치며 살고 있던 여인과 이 여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 끝에 만나게 된 감옥의 간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나름 괜찮은, 그리고 별일 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종이라고는 해도 그녀는 말 그대로 귀신 같은 점사로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런 자신의 능력에 자족하며 살고 있었을 겁니다. 비록 고위층은 아니지만 간수 역시 로마로부터 녹을 먹는 신분으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바울이 그들의 삶에 불쑥 나타났고,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의 주인에게는 그녀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단순히 돈벌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만나고 난 이후 밥 벌이를 잃었으니 그녀는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돈벌이였던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유로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들 때문에 감옥문이 모두 열려버렸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죄수들이 모두 탈출하게 된 겁니다. 바울을 만난 이후로 간수도 하루 아침에 목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귀신들렸던 여인도 그렇고, 간수 역시 그 동안 자신의 삶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무너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위기의 순간에 조금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 믿게 되면, ‘조각된 신상’이나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이들처럼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97:7) 성경이 말하는 우상의 정체가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헛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우리앞에서 ‘신’처럼 군림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유사신’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유사신에 시선을 빼앗기고나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하지 말아야하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눈이 흐려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점을 치던 여인에게 깃들였던 귀신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자신이 귀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녀는 그저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귀신에게 구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귀신에게는 머물게 되는 그릇일 뿐이었고, 주인에게는 돈벌이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귀신까지도 수단으로 부리는 ‘돈’의 힘이 더욱 막강하게 보입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 그녀는 이제 쓸모없는 무언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헛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간수가 누리던 안락함이나 안정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면 인생에 아무일도 없을 것이라 굳게 믿었겠지만, 사단은 느닷없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로마의 체제안에서 굽신거리며 지켜왔던 모든 것이 허무였을 뿐입니다. 죄수들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그는 이제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고, 쓸모를 잃고 난 이후 그는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절망에 내몰렸습니다. 돈만 있으면 산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돈 없으면 살 수 없는 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셈이었고, 귀신을 부리면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귀신이 씌였으니 귀신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을 뿐이이며, 제법 그럴 듯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없으면 살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이들과 정 반대에 서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도록 눈을 가리우는 귀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울’의 형편은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불평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신세이다보니 한심해 보이고, 불쌍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르고 합당한 의의 길을 걸어가다가 사특한 이들의 폭력앞에서 절망으로 떨어져버리는 사람들이나, 성실하게 땀흘리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정직한 걸음이 자신들의 재력이나 힘을 이용해 편법으로 부를 축제하는 이들 앞에서 무너지는 오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현실앞에서 억울하고 화도 나지만 실은 우리도 그런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녀의 주인과 달리 드디어 귀신의 결박에서 자유케 되었고, 이제는 기도의 자리를 찾던 빌립보의 여성도들처럼 주님의 품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신이 쫓겨나간, 그래서 돈벌이를 잃어버린 이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의문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녀를 안쓰럽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게 되었으니 그녀는 복되지 아니한가?라고 답해야하는 우리인데 말입니다. 혹시 세상의 위용이 대단해 보이고 부럽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런 세상을 거스르다가 낭패를 당한 바울이 안쓰러워보이진 않으셨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에 체념하고 절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잡아 죽인 폭력앞에 세상이 모두 굴복하고 체념할 때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죽음으로부터 당신의 아들을 일으키내셨던 그분께서, 오늘도 ‘그리할 수 없다’며 바울과 실라를 짓누르던 감옥앞으로 달려오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묶고 가두던 차꼬나 감옥의 힘이 제 아무리 억세다고 해도 주님께서 땅을 뒤 흔들고 옥문을 열어젖히시면 모두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주님께 잇대어 사는 인생이야 말로 비록 묶여있는 것 같고 사방이 우겨쌈을 당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유합니다. 옥문이 열렸음에도, 바울과 실라는 그곳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한,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 자유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 사도행전 16:30b
바울을 만나고 난뒤 간수의 간절한 바람은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났던 것은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그를 찾아오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 그는 흉악의 결박이 풀려졌고,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한 채 갇혀있던 인생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보다 놀라운 사건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어제까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자, 자색 옷감장수 루디아는 자기집 대문을 활짝 열고 자신의 집으로 바울을 초대했고, 바울을 통해 감옥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난 이후, 간수도 바울에게 자신의 집문을 열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모든 가족이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늘문이 열리고 감옥문이 열리더니, 이들의 마음문도, 기쁨과 감사의 문도 열린 셈입니다. 돈 귀신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권력과 힘이 윽박지르는 세상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놀랍고 기쁜 해방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질 수도 있다는 근거없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곤 합니다. 내일은 어떻게 살 것인지,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될 것인지 막연함과 염려가 주님을 따라나서야 할 우리의 걸음을 끌어당깁니다. 쓸모가 있는지, 돈벌이가 되는지를 사람의 가치로 들이대며 도구와 수단으로 몰아세우는 귀신이 지배하는 세상안에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구원을 얻었으면서도 도무지 이 사실을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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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의 승천기념주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체 부활과 성령강림의 사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주님의 승천’이 성도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오롯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내신 주님께서 마침내 하늘로 오르셔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들리우셨으니 기뻐하십시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또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보고 계시니 불의함 앞에서 두려워할 이유도, 거드름 떠는 이들 앞에서 비굴해질 이유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눈물로 드리는 기도와 찬양의 고백을 들으시면 주님은 그곳이 어디라도 번개처럼 찾아와 주실 겁니다.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저 대기권 멀리 어느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는 제 아무리 높은 하늘도 우리를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을 만큼의 지척의 거리일 뿐입니다.
혹시 말씀이신 주님, 주님의 말씀을 향하는 우리의 눈이 돈이나 명예, 권력같은 헛된 우상들로 인해 흐려져지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쓸모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것인가? 내일은 또 어떻게 살것인지를 무기 삼아 우리를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감옥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이제는 다 끝났다는 좌절이 짓눌러 올 때, 이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보여준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함으로 나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고, 기도함으로 나의 내일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인생을 덮고 있던 감옥의 터가 뒤 흔들리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도록 묶고 있던 차꼬는 풀릴 것이며,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아 보이던 감옥의 문도 주님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