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2/08/21 성령강림후 11주

ViaNegaTiva 2022. 8. 19. 12:01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예레미야 1:4-10 혹은 이사야 58:9b ~ 14

응송 | 시편 71:1-6 혹은 103:1~8

2독서 | 히브리서 12:18-29

3독서 | 누가복음 13:10-17

 

설교음원

http://naver.me/F6JSM1lY = '클릭'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FEEuyiDrulE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James Tissot_ 'The Woman with an Infirmity of Eighteen Years, 1886-1896'

 

'오늘'해야만 하는 '일'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기에, 주어진 때에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는 말은 특히나 우리 시대 성공한 사람들의 ‘금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좋다’는 정 반대의 말도 하곤 합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었는데, 정해진 시간안에 목적을 이루어내야만 하는 그만큼 피곤한 현대인들의 삶에서 터져나온 말인 것을 알고나니 안쓰럽기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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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가 ‘오늘’ 해야만 하는 일들은 무엇일까요? 꼭 ‘오늘’해야만 하고, ‘오늘’이 아니면 않되는 일들 말입니다. 하나씩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워가다 비로서 남기게 될 그 일이 정말 ‘오늘’해야만 했던 중요한 것일지에 대해서도 자신은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간절했던 것들이,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다’는 질문앞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좀처럼 애를 쓰고 비교적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았음에도, 쌓이는 것은 아쉽고, 서러운 일 뿐이었던 이유도 따지고보면 모두 중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두죽박죽인 까닭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중요한 일을 오늘까지 미루어오고, 그닥 중요하지 않은 일에 허둥거려 왔을까요? 여러분의 매일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 둘 수 있는 여유로 채워져있습니까? 아니면 꼭 해야할 일을 놓쳐 버린 아쉬움으로 채워져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말씀을 통해 이 물음에 답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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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인 예레미야 1장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그의 마음은 편해 보이질 않습니다. 스스로를 어린 아이라고 말하며 엄살을 부립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감당할 그릇이 않된다는 하소연입니다. 겸손해 보이지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잘 아시는 분은 없으니 그의 겸양은 하나님은 늘 최선의 선택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않는 불신앙인 셈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냉큼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요나는 부르심을 뿌리친 채 다시스로 도망을 쳤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실때까지 부르심을 거절하고 회피하려고 핑계를 댔습니다. 

사실 이것은 죄로 인해 마땅히 기뻐해야할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이 부담이 되고 마음에 불편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워져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세상이 그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을 기미는 조금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그러니 이 다음에 언젠가는 몰라도, ‘오늘’ 만큼은 이런 시대 만큼은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싶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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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이사야서 56장부터 66장까지는 제3이사야로 분류됩니다. 바벨론 포로 중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선택본문인 이사야 58장은 제3 이사야의 한 대목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던 이들에게, 꿈에도 그리던 그 땅에서 그들은 오히려 실망과 좌절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소망을 품고 돌아온 길이지만 사회 지도층들은 부패해있고 그들이 직면한 현실의 삶은 피폐하기만 합니다. 이런 형편에 내몰리게 되면 사람들은 옳은 길, 소망을 이루며 가야 할 마땅히 가야할 길, 부조리를 개혁하는 길 보다는 그저 자기 자신의 안위와 보신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현실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좌절과 패배감 때문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나 이사야는 두려움앞에서 마땅히 선택해야할 ‘오늘’의 몫을 포기하고 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둔한 입에 당신의 말씀을 직접 넣어주시겠다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해서는 믿음을 지키며 살기만 한다면 무너진 성읍일지라도 주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님이 직접 약속해 주셨으니, 한번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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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처했던 상황에서도 응송인 시편 78편의 기자는 전혀 다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온 맘을 다해 '주님께로만 피하겠노라’는 고백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지금 그가 처해있는 환경과 삶의 정황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거나 피할 곳도 없습니다. 4절의 언급하고 있는 악한 사람들과 잔인한 폭력배들의 손에서 달라는 그의 바램은, 그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주님외에는 피할 곳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지만 그런 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이런 현실에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의지하겠다’는 그의 간구가 바로 그런 결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안쓰러울 정도로 전심을 다해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야 말로 주님께로 돌이켜야 할 때이며, 주님의 품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곳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다음이 아닌, 바로 ‘오늘’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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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말씀은 ‘오늘’해야만 할 일을 미루려고만 하는 무지와 두려움에 쌓인 우리와 달리 ‘오늘’을 향해 달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여인 하나를 만나셨습니다. 18년간이나 허리가 굽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의 병을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병든 여인이 회당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이 먼저 그녀를 보셨고 자신의 곁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보고 계셨음이 틀림 없습니다. 부러 보려고 하지 않으면 타인의 형편과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멈추어야만 하는데 그저 제 갈 길이 바쁜 인생에서 누군가의 삶을 보기 위해서 멈추는 것은,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18년간 그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지나쳐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지나치시지 않고, 멈추었고, 한참을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셨습니다. 늘 저 혼자 고통과 아픔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행여 넘어질까, 얼마나 아플까, 다시 못일어나면 어쩌나 주님께서 ‘나도 그렇게 지켜보고 계시고 있구나!’싶으니 한결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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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치유’는 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구차한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랜 질병의 원인이 무엇때문이었는지를 추궁하시거나, 죄 때문이라고 타박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이야 말로 그녀가 듣고 싶었던 유일한 말씀이었고, 주님도 이 말씀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발로 구원의 빛을 향해 나아올 수 없던 그녀가 비로서 오랜 절망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었고, 오랜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회당에 잔뜩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회당장이 볼멘 소리를 냅니다. 

 

일을 해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고.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 누가복음 13:14b

 

사실 회당장은 지금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 때문에 잔뜩 화가 나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만을 최우선시 했던 그에게는 18년 고통속에서 신음하던 여인이 나음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 보다는, 제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말씀을 어겼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더 불쾌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그녀 뿐만 아니라 병고침을 얻기 위해 안식일에 회당에 몰려든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 첫번째 입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지 못하도록 치료행위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18년이나 걷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병세가 위중한 것은 아닙니다. 모여든 군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발로 회당까지 나올 정도면 당장에 급박한 병은 아닐테니, 굳이 안식일을 어기지 말고 다음날부터 고치라는 회당장의 요구는 오히려 합리적이고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율법도 지키고, 병든 이들도 고칠 수 있으니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을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회당에서 병든 그녀를 고치셨던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일부러 안식일을 택해 회당을 찾으셨고, 그녀를 고침으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셨던 겁니다. 그 동안 수 없이 많은 날, 회당장은 이곳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을 선포했을 겁니다. 그곳에 몰려든 경건한 이들도 그 말씀을 들으며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라고 찬양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회당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대신해주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는 곳이며, 말씀이신 주님을 향한 경외와 예배의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이 다음에 언젠가’라는 말로 미뤄둘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그곳에서부터 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애와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강론되던 바로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딸이 사람들로부터 자비와 인애로부터 소외당하였고, 하나님을 본받아 베풀어야 했던 인애와 자비는 늘 ‘내일’로 미뤄도 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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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늘 주님앞에서 나음을 입었던 그 여인이 회당장의 딸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그가, 자기 가족에게도 ‘기다리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회당장의 모습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타인의 위급한 순간보다 제 손톱을 파고드는 가시에 호들갑을 떨고, 내가 아닌 ‘너’의 고통은 ‘내일’로 미루려는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이 있다면, 내몰리는 이들의 아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내 성공의 기쁨에 취해, 낙망하는 이의 아픔을 나몰라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생명’과 ‘자유’에 목말라하는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살려내는 일에는 효용성이나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있을 수 없고, ‘내일’이라는 미룸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법보다 구원과 해방과 치유, 사랑의 법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본질이며 우선되어야 마땅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은 선뜻 누구하나 나서서 못하던 율법의 금기를 깨트리셨던 겁니다. 그것이 주님께 맡겨진 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오늘’하셔야만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통해 비로서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오늘’ 우리의 사랑이 곧장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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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율법을 지켜내는 것과, 병들고 고통당하는 이를 구해주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중한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같은 선택의 자리가 주어진다면 어떤 것부터 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받자마자 응답하시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답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살려내야 할 대상에는 타자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누구에게라도 가장 중요한 일은 입고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살려내는 일인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타인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에 무관심하고,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과 삶을 구원해 내는 일은 자꾸만 뒤로 미루는 걸까요?

‘안식일 법’을 지켜내야한다고 외치는 회당장의 열심이야 말로 ‘율법주의’입니다. 분명 ‘율법’이란 구원하시고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주어진 것인데, 자꾸만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잊고, 지켜내야할 율법만 쫓는 일에 쉽게 빠져듭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어려움이나 역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다 못해 평안히 쉬고, 휴식을 얻기 위해서도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이 만큼 지켜내고, 해냈다는 ‘업적’이나 ‘공로’에 만족하는 ‘자기 의’로 작동하는 세상에 익숙해진 탓입니다. 늘 ‘무엇인가를 해내야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히다 보니 참으로 해야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열심입니다. 지금 당장해야 할일은 뒤로 미루고, 느긋해도 될 일에 목숨을 겁니다. 사랑은 경험하고 누리고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마져도 기도, 헌신, 섬김, 봉사와 같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이루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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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리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로 상징되는 시내산의 옛 언약으로 비유합니다. 옛 언약은 모세 조차도 두려워서 떨린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21절) ‘자기의’를 입증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늘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길입니다. 열심을 다하는 신앙에도 불구하고 혹시 구원받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새 언약, ‘시내산’과 비교되는 ‘시온산’의 ‘복음’입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열심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 그래서 전적인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복음’은 늘 ‘자기의’를 구원으로 삼으려고 하는 우리와 싸웁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구원의 길이 옳음을 입증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날이 오면 우리가 쌓아올리는 바벨탑을 남김없이 뒤흔들고 깨트리고 태워 결국 흔들리지 않는 것만 남게 하실 겁니다.(27절) 불타 없어질 것들, 그닥 중요하지 않고, 본질이 아니고, 잊혀질 것들에 매달린 탓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그런 모든 억누르고 사로잡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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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18년간 굳어진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한 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려 살던 가련한 여인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늘’하셔야 했던 일입니다. 주님은 늘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셨고, 당신에게 주어진 ‘오늘’하실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복음’은 늘 이 같은 깨달음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핑계대지 말고, 바로 오늘! 구속하고 억누르는 땅이 아닌, 구원하시는 주님의 나라를 지향하며 살라는 겁니다.

여전히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주님의 부르심, 주님 나라를 향한 초대를 받게 되면 불안해 합니다. 언제 낭떨어지로 떨어질지 몰라 버둥거리며 삶을 지키고 있었는데, 자칫 엉망이 될지 모른다는 이상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결코 불안이나 염려, 패망으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는 길이 그곳에 있으니 마땅히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의 초대를 받은 이후, 가치관이 바뀌고 이전에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라 여기며 살던 것들이 온통 뒤죽박죽 되는 것 같다면 허둥대지 마십시오. 태풍이 몰아치고 대양을 뒤 흔들어야 맑아지는 법입니다. 삶이 뒤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보여도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요동치 않는 나라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고, 주님은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이 사실을 믿으며 사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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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중 누구도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루의 평화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큰 소리를 치는 세상도, 스스로의 힘을 다하는 열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망하는 것 같고, 눈물이 나고, 서러워도 주님께 잇대어 있는 이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요동치 않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처럼, 구원을 지켜내려고, 잘 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억누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억지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보화’가 그곳에 담겨 있기에 오늘도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생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담겨 있으며, 오늘을 넉넉히 건져내는 길이 또한 그분안에 있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는 겁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돈은 그 일을 위해 버는 겁니다. 또한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이어져 영혼을 살리고 회복시키며 튼실하게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밥은 못 먹게 되더라도 링거라도 꼽으면 살 수 있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 이어져 내 영혼이 잘 됨이 범사가 잘 됨보다 우선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십시오. ‘오늘’ 말씀앞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깨어나십시오. ‘오늘’이 아닌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일이어도 족하다’는 무책임한 영적 나태의 꿈으로부터 깨어나십시오. 주님안에 담겨있는 구원을 발견해내십시오. 하나님만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을 경험하십시오. 강요와 억압과 속임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기 위해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요동치 않는 하나님 나라에 삶을 세워가십시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반드시 ‘오늘’해야하는 일은 그것 뿐입니다. ‘오늘’이야 말로 주님과 함께 하는 ‘선물’로 주어진 구원의 날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