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2/09/04 성령강림후 13주 (*창조절)

ViaNegaTiva 2022. 8. 31. 10:35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예레미야 18:1-11 ( 선택 신명기 30:15~20 )

  응송 | 시편 139:1-6, 13-18

2독서 | 빌레몬서 1-21

3독서 | 누가복음 14:25-3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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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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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선택' 앞에서

 

1

인생은 수 없이 많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선택으로부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중차대한 선택의 문제도 선택의 몫입니다. 지나온 삶에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것도, 또 한편으로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도 어떤 ‘선택’을 했느냐 또는 할 수 있느냐에 닿고 있다고 보면, 결국 성공적인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바르고 합당한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되었든지 선택하였다는 결과를 되돌릴 수 없고, 그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일 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 내 선택을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 자체를 피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저마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 왔고, 앞으로 또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 나갈까요? 과연 바르고 합당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후회나 아쉬움 따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성서일과 말씀은 이런 선택의 문제 앞에 서있는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1독서 선택본문인 ‘신명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산다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순종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살아간다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비교적 익숙한 말씀입니다. 신앙적 선택의 길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입장들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깨어지고 뒤틀려버려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런 신앙관은 ‘오늘’의 결과를 과거의 내 선택에 대한 결론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신앙관을 ‘인과응보’적 신앙관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내 탓’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삶의 책임은 자신에게로 귀결됩니다. 아픔과 고통 뿐만 아니라 삶을 구원해 내는 것도 나 자신일 뿐입니다. 이런 조급한 결론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한 사람의 인생안에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며, 설명하거나 정의내리기 어려운 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어라도 명백하고 분명한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때 ‘신명기’의 말씀은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지의 가능성과는 관계없이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어주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되는 걸까요?

 

2

사실 본문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첫머리인 15절에 담겨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얻게 되는 ‘복’의 실체는 ‘생명’과 ‘번영’이고, 믿지 않을 때 삶에 초래되는 결과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으로 언제나 누구에게나 옳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이나 ‘죽음’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적 신앙해석을 어려워한 이유는, 일상에서 ‘생명’이나 ‘죽음’이 그닥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숨어 있다보니 ‘생명은 오직 하나님 소유’라거나, 생명을 얻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이 잘 들리지 않고, 뜬 구름 같이 여겨질 뿐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조금더 구체적이겠군요. 여러분께서 살아있다고 실감할 때는 언제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먹고, 마시고,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할 수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답하실 겁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런 것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 현상’ 일 뿐,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움직이고 생각하고 숨을 쉰다는 것도 모두 그런 현상일 뿐입니다. 절대 만능처럼 여겨지는 의학이나 과학도 모두 ‘생명’의 현상을 정의할 수 있을 뿐,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는 철저하게 무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또한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어느날 느닷없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될 때나, 겨우 ‘생명현상’이 아닌 ‘생명’에 대해 어림짐작 할 수 있게 됩니다. 보이지 않던, 그러나 주어져있던 생명이 조금씩 사그러져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생명이 간절해 집니다. 그 동안 ‘행복’을 추구한다거나 세상이 요구하는 ‘성공’에 이르려고 조바심내었던 것들이 실은, 살아있음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들이었을 뿐, 그것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늘 바쁘고, 뭔가를 이루고 해내야한다는 무거운 ‘과잉’에 내몰려 ‘생명’아닌 것에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기며 살아온 탓입니다. 자본의 시대, 소비 문화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여간해서는 들리지 않는 말씀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 더욱 우리가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묻고 답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아찔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여하튼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어질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 본문은 ‘토기장이’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이 사실을 단순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토기장이 손에 들려있는 흙 한덩어리처럼, 이스라엘의 운명도 토기장이신 하나님 손에 들려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믿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운명과 내일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말씀 보다는, 돈이나 세상이 생명을 주관하고 있다고 믿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씀’보다는, 돈이 있어야 더 만족을 얻고 평안하다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운명을 제국이 아니라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 맡길 것인지의 선택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레미야만은 민족의 운명이 제국이 아닌, 하나님께 모든 운명이 담겨 있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우리라고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3

2독서인 서신서에도 ‘선택’의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울,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안에 속해 있던 노예였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은 교우가 빌레몬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이 아닌 바울의 곁에 있습니다. 정확한 연유와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는 주인인 빌레몬 집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탈주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18절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잘 못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거든 갚아주겠다’고 한 대목을 보면 돌이킬 수 없는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당시에 주인에게서 탈주한 노예의 운명이란 죽음을 각오해야할 형편입니다. 이런 궁박한 상황에 있던 오네시모가 왜 ‘바울’에게로 피하는 선택을 했을까요? 빌레몬의 집에 방문했던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이 지금의 상황에서 오네시모가 목숨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전해 들은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닌, ‘사랑받는 믿음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첫번째 선택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수감생활을 도울 수 있도록 둘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택한 겁니다. 대신에 빌레몬이 자비와 긍휼,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함께 자란 성도라라는 사실에 근거해, 그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신앙이 담보가 되고, 믿음이 보증이 되는 흐뭇한 모습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네시모의 선택이 뒤 따릅니다. 사실 바울 사도가 친서를 써주었다고는 하지만 빌레몬이 용서해줄 것인지의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는 편지를 들고 돌아가던지,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숨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게 될 빌레몬도 선택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바울의 요청대로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거나 그렇지 않을 선택 말입니다. 결국 그는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었고, 오네시모는 후일 도미티아누스 박해때 순교자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하지만 모범적인 신앙인이라고 해도, 빌레몬이 자신에게 큰 피해를 주고 탈주한 노예를 용서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를 용서하라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도의 요구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마땅하고 옳으니 여러분을 억울하고 힘들게 한 이들을 무조건 용서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아멘’으로 따르실 수 있을까요?

 

4

복음서에는 ‘선택’에 대한 더욱 노골적인 예수님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처음 몇몇 제자들과 함께 시작했던 길이 이제는 꽤나 그럴듯해 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들 모두 주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저마다 주님을 따르는 이유도 다르고, 기대하는 바도 다릅니다. 주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 태반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려면 조금이라도 더 세를 얻고 사람을 얻는 것이 유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그런데 산통을 다 깨트려버린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무리들에게 던진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26절

 

대체 이게 무슨 뜬금 없는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액면 그대로 자신을 따르려면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 형제까지 다 미워해야한다는 겁니다. 마치 요즘 사이비 종교단체 교주들이나 할 법한 말씀입니다. 사람을 불러 모으고 읏샤읏샤해도 부족할 형편에 이건 자신에게 몰려든 이들을 내쫓으시려는 걸까요? 뒤편에 서 있던 제자들 마음만 타들어갈 뿐입니다. 주님은 정말 요즘으로 치면 목회에 있어서는 빵점입니다. 분명 십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부모를 미워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요?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미워하다’라는 헬라어 ‘미세오’(μισέω)라는 단어를, 실재로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아람어’로 읽으면 ‘덜 사랑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평행본문인 마태복음에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10:37)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여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바로 부모, 아내, 자식, 형제, 제 목숨, 그리소 소유인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찔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선 부자 청년처럼 우리 마음도 근심에 쌓이고, 슬퍼집니다. 우리로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자신이 없습니다.

 

5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주님보다 덜 사랑해야하는 것들’ 때문에 아쉬워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덜 사랑해야하는 것들은 ‘더 사랑해야하는 것’, 더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번째, 이제 우리에게 ‘더 사랑’할 ‘선택’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전까지 모르던, 잊고 있던, 갖지 못하던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리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대신 선택 앞에서는 누구라도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것을 선택하는 순간, 저것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얼마나 유익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는 사실만 남게 될 뿐입니다. 손해보는 선택을 할 것인지, 조금이라도 나음이 있는 선택을 할 것인지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부름을 받는 것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것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도 모두 전혀 새로운 나라, 전혀 새로운 가치를 위해, 자신을 규정해온 모든 것들과의 단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합니다. 시대가 이렇고, 세상이 이런대도 주님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모든 것보다,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것인지, 다시 말해 이런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망대를 쌓는 이의 비유나,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하는 임금의 비유는 세상을 따르는 것, 생명이 아닌 생명 현상에 삶을 거는 것과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곰곰히 따져보라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뒤를 따르던 군중들처럼 그저 남들이 교회에 다니니까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세련된 종교적 삶을 살아보려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주님은 내 인생을 걸고 따를 만한 진리의 길이신지, 돈이나 명예나 형편이나 세상이 아니라, 내 인생과 운명이 주님께 달려있다고 그에게 삶을 걸 수 있는 것인지,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선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주님을 믿을 것인지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제 몫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을 택한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는 겁니다. 그 좋은 것은 바로 영생이신 주님 자신입니다. 군중들과 제자는 학생과 제자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제자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오직 예수께 묻고, 예수께만 듣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6

그 근거를 서신서 말씀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대의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을 그대가 깨달아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6절

 

바울은 오네시모를 맡기면서 먼저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 하나님의 시선에서 본다면,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애당초 더 나은 사람, 더 착한 사람이나, 더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대나 나,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예수 생명’입니다. 나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해 무한히 용납받고 있다는 이 사실을 실감하고 믿을 수 있다면, 빌레몬 뿐만 아니라 우리도 어렵지 않게 선택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기준은 ‘율법준수’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기준일 뿐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나 우리가 더 사랑하던 것들은 ‘일시적’이지만 십자가의 은총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무력’합니다. 스스로 누군가를 용서한다거나, 기꺼이 다른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도 없을 만큼 연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땅히 덜 사랑할 것들을 덜 사랑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실천으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곧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의롭다 여겨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시는 은혜를 느끼고, 이 모든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니 감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 예레미야 18:8

( *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_ 개역개정 )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똑같은 선택을 하십니다. 주님을 향해 돌이키기만 한다면, 재앙이 정해진 우리일지라도 기꺼이 뜻을 돌이키셔서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늘 이런 선택을 하시는 분,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그 일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대가로 치루시고, 기꺼이 손해를 보는 ‘선택’을 작정하신 분이 우리가 믿는 주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를 받았으니,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주님의 구원입니까?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삶입니까? 은혜입니까? 업적입니까? 화려한 생명 현상을 쫓으며 살겠습니까? 참된 생명에 잇대어 살겠습니까? 주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_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