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2/09/25 성령강림후 16주

ViaNegaTiva 2022. 9. 22. 10:04

성서일과본문

1독서 | 예레미야 32:1-3a, 6-15 (혹은) 아모스 6:1a, 4~7

  응송 | 시편 91:1-6, 14-16

2독서 | 디모데전서 6:6-19

3독서 | 누가복음 16:19-3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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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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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 바실리 수리 코프

 

'구렁'을 메워가는 사람들

1.

지난주에 이어 오늘 복음서 말씀에도, 재물과 관련한 비유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빈번하고 중요한 영역이 ‘돈’이나 ‘재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정의는 심각하게 왜곡되고 일그러져있습니다. ‘부유함’이라고 하면 오직 ‘돈’을 통만 생각하다보니 온통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매몰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운 시선으로 ‘부자’들을 바라보면서도, 비교적 교회는 돈이나 돈에 집착하는 이들을 꺼려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근검’이나 ‘절약’ ‘금욕’에 대한 신앙의 부담은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한 사람’은 천국간다는 왜곡된 생각을 초래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은 모든 경제활동을 거부할 수 없는 한 자본주의 가치와 질서안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금욕생활을 해서 구원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렇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만일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고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부유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족장들, 갑절의 복을 받은 욥이나, 왕이었던 다윗 같은 사람들도 다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매우 곤란한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본문을 읽을 때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부자’를 쉽게 비난하지만, 사실 ‘부자’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갈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이냐 ?는 겁니다. 실재로 거지였던 나사로의 삶이라는 것은 부자의 집앞에서 평생을 가난하게 아파하며 살다가 숨을 거둔 것이 전부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비유’라는 사실을 염두해야 합니다. 특별한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빗댄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꼭 전하려고 했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동안 누가복음 15장과 16장 사이의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부자’에 빗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부자에게 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부자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2

비유 속에 극명히 비교되고 있는 두 사람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입니다. 재미난 것은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뜻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와 달리 부자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음을 주목할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여튼 본문에는 부자가 어떻게 ‘부’를 축적하게 되었는지의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혹여 그가 재산을 모으고 축적한 과정에 지옥에 갈 만한 문제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말 그대로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오늘도 ‘부’를 행복이나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개들과 경쟁하며 부자의 잔치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마져 땅에 떨어져 버린 비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일이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이 둘이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부자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부자가 되고 ‘가난’은 고스란히 대물림되는 것처럼, 기울어져 시작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삶은 죽음이 이른 다음에야 ‘평등’해진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문을 하지만, 곁에서 죽어간 나사로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의 순간마져 나사로의 인생은 소외되고 버려진 불쌍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줄곧 죽음도 평등하다 말하는 삶을 차별과 소외로 내몰고 성공한 죽음, 실패한 죽음으로 정의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니 지금껏 우리 주변에는 태어난 삶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서글픈 ‘나사로’들의 눈물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저 여기, 그들의 죽음의 자리까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억울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아무도 볼 수 없던, 부자와 나사로가 직면하게 될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었던 겁니다. 말씀에 따르면, 이 땅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살던 부자는 ‘지옥’(하데스)으로, 가진 것은 ‘고통’뿐이었던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마치 생전의 대문 하나 사이를 두고 다가갈 수 없던 부자와 나사로의 사이가 죽음을 통해 고스란히 뒤집혀진 겁니다. 이 둘이 머물게 된 곳은 마주보고 있지만 큰 구덩이가 있어서 서로에게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은 다시는 번복될 수 없습니다. 고생만 하던 ‘나사로’에게 해뜰날이 왔다는 통쾌함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의 세상에도 여전히 오늘처럼 거지와 부자처럼, 서로가 닿을 수 없는 간극과 차별이 존재한는 사실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줄곧 ‘지옥’이나 ‘천국’에 대한 설명이나 가이드로 소개될 때가 많지만, 우리말 ‘지옥’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데스’는 구약 시대에 사용된 ‘스올’처럼 그저 산 사람은 누구도 알 지도 못하고 닿을 수도 없는 ‘죽음 너머’를 뜻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불지옥’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사용된 ‘지옥’, 이라던가 ‘천국’은 그저 그들이 죽었고,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죽음’ 너머 하나님의 판단으로 넘겨졌다는 의미로만 해석하면 그만입니다.

 

3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지난주일 말씀에서 주인이 청지기에게 재산을 맡겼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을 도로 찾으시는 순간이 온다는 것,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이전에 우리가 붙들어 왔던 모든 것들이 뒤집어지는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중요한 물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이런 반전을 초래하게 되었던 걸까요? 안쓰러운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나사로’가 죽음을 넘어설 때 천사들의 영접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만한 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부자가 어떤 잘못이나 악행을 저질러 지옥에 가게 되었는지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애당초 그가 유산을 상속받았는지, 재산을 잘 굴렸는지 아니면 도둑질이라도 했던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굳이 본문안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를 꼽는다면 이 땅에서 잔치를 벌이며 살았다는 것 뿐입니다.

 

물론 그는 나사로를 더럽다고 혐오스러워하거나 귀찮다고 타박하거나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극심한 고통속에 버려진 나사로를 도운 일도 없습니다. 단순히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사로’를 무관심의 대상으로 여기고, ‘없는 것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는 사실이야 말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대체 이런 생각이나 태도가 지옥에 가야 할 만큼 큰 죄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정의하는 ‘죄’를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죄’는 윤리, 도덕의 문제들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고 배신하는 것을 ‘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된 인간의 시선은 늘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눈에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의 벗은 모습만 들어왔던 것과 같습니다.

생전의 부자의 모습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늘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잔치를 벌이는 시간으로 채워져있습니다. ‘부자’였다는 것이나 ‘잔치’를 벌이며 살았다는 것은, 부유함에 빠져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삶을 소비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돈이 가지는 마력입니다. 그 힘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마력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돈’과 ‘재물’입니다. 돈의 마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돈을 통해서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들게 되고, 결국 끝없는 소비와 쾌락에 집착한 채 살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감각이 무뎌지게 되니, 더 많이 소비해야 하고, 자꾸만 더 자극적인 쾌락이 필요하게 됩니다. 돈이 많으면 많아서, 없으면 없는대로 돈에 사로잡혀 살아갈 뿐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에 떨어지고 마는 겁니다. 주님께서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자기 몰입, 자기 집중,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결국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죄’입니다.

죄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질 않는데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 올리가 없습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어떤 상태, 어떤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있는지 무관심하고, 무감각 할 뿐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단절되고 세상 모든 것과도 단절된 고립된 인생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의 문제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던 시선을 돌이키는 것은 ‘죽음’이 짓눌러 오거나, 성령에 의한 급진적인 개혁이 있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참으로 기적같은 일입니다. 늘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고, 비싼 값을 치루고 나서야 후회하는 연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줄 알지만, 우리는 늘 이 걸음을 반복할 뿐입니다.

 

4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이 비유는 특별한 대상들, 즉 ‘바리새인’들을 향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왜 계속해서 재물에 관한 비유로 바리새인들을 고발하셨던 걸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당시 유대사회의 유력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부자’거나 부유했던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15:14) ‘돈’은 비유속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우상입니다. 그러니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부자의 이야기는 곧장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늘 자기 자신을 신앙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백성다움을 해석하는 권위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 동안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병들어서, 귀신들려서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지옥에 들어갈 죄인들로 만들어왔던 그들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이행하고, 자비와 인애를 베풀며 스스로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은 뒷전에 놓고, 늘 자기 자신이라는 ‘성채’에 갇혀 담장 밖에 있는 ‘나사로’들을 조롱하고 정죄하며 살아왔던 겁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다보면 결국 믿음을 잃고(10), 하나님을 향한 소망도 잃으며(17), 참된 ‘생명'마져 놓치게 됩니다.(19) 그래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딤전 6:10) 그 동안 우리는 어떤 경우에, 또 무엇을 위할 때 돈을 사랑했습니까? 누군가를 돕기 위해 돈을 사랑하고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떨어지는 것은 늘 ‘나’자신을 위한 경우일 뿐입니다. 앞서 나누었던 ‘부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돈’이나 ‘재물’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자기 자신에 매몰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끝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극심한 가난’도 극단적으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와 같이 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돈’을 향한 집착,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자기 몰입에 있어서는 동등하게 평가합니다. ‘비유'대로라면 ‘지옥’을 향해 가는 동일한 길위에 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경제적 타락상을 고발하고 있는 1독서 아모스서도 ‘돈’에 대한 탐욕이 개인의 신앙 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라도 집어 삼키고 타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런면에서 구약본문은 사회, 서신서는 교회 공동체와 ‘돈’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결국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종교성을 덧입혀도 결국은 재물을 대하고 있는 태도를 보면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경외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인 겁니다.

 

5

오늘 말씀은 갈수록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해줍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의 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 ‘나사로’야 말로 자신에게 천국을 여는 열쇠와도 같은 존재였음을 모른채, 외면해 왔습니다. 유독 부자가 인격이 좋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유함,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누구라도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죽음 이후의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빈부 격차의 구렁을 자꾸만 벌려가거나 그런 흐름에 편승하는 걸음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파 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 만큼, 죽음 이후 직면하게 될 지옥과 천국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큰 구렁텅이’는 깊어질 겁니다. 비록 천국과 지옥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땅에서 너와 나의 경계 사이에 놓여진 구렁을 메우는 손길을 통해, 죽음 이후 우리를 갈라 놓게 될 구렁도 메워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 눅 16:9

 

지난 주일 함께 읽었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을 우리는 엄중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야만 합니다. 돈의 마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그 동안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이 이것 한가지 뿐이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위해 돈이나 재물을 숭상하지 않는 것도, 쌓아두거나 절약하는 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오직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마땅한 곳에 선한 도구로 소비하는 ‘구제’와 ‘자선’을 통해서만 자기 몰입으로 몰아세우는 돈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돈의 질서, 자본의 질서가 통용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조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했을니까요?(딤전 6:12a)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염려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나 할 일입니다. 본문에서 부자와 달리 ‘나사로’가 천사들에 손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구제를 한 것도, 정의를 위해 싸우거나, 복음을 전하느라 박해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믿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슬피울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을 뿐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그의 이름대로 하나님이 그를 붙드셨을 뿐입니다. 천국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가르침 그대로 입니다. 이 땅에서는 돕는 이도, 위로 하는 이도, 귀하 여기거나, 거들떠 보는 이도 없던 그를 하나님은 위로해주셨습니다.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해주시고, 사회적 약자들이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씀을 허투루 듣거나 가벼이 여기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을 들춰내고 거슬리는 말씀일수록 더 눈을 크게 뜨고 단단히 붙잡을 일입니다. 돈의 마력과 탐욕에 휘둘리지 않도록 힘써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트리기 위해 재물의 신이 세상안에 만들어 놓은 구렁을 메꾸기 위해, 믿음으로 이 싸움을 싸워내라고 파송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돈이나 건강, 환경이나 의지할 곳 없어도, 우리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실 주님이 계시니 삶은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주님, 우리의 동행이 되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