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2/12/18 대림 넷째주

ViaNegaTiva 2022. 12. 16. 19:33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7:10-16

  응송 | 시편 80:1-7, 17-19

2독서 | 로마서 1:1-7

3독서 | 마태복음 1:18 ~ 2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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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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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Martini (1333), <수태고지> 템페라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예수' _ '임마누엘'  사건

 

# 01

대림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초의 불빛안에 담은 우리의 기다림이, 참 빛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세상을 밝히는 소망의 빛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옛 사람들은 붉게 물드는 노을이나, 함박눈을 바라보면서도 대림의 소망을 일구어냈고, 주름 가득한 얼굴이지만 거칠고 힘겨운 형편에도 주눅들지 않은 채 웃음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그리고 올해는 더욱 성탄절이나, 대림절의 기쁨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말씀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희망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분명 이전의 어느 때 보다 배부르고 살만해졌을 텐데, 오히려 시대의 징조와 때를 분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으니 우리야 말로 이전의 세대보다 더 불행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구주 강림의 소식을 기쁨으로 여기며 대림의 기간을 지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분명히 함께 말씀을 읽고 들었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고 소망도 되지 않으니 속상해 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말씀이 대체 믿을 만한 것인가?’라거나 ‘이런 말씀을 듣고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라고 불퉁거릴 수만은 없습니다. 메시지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메시지가 아닌, 메시지를 듣는 우리 자신에 대해 질문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경험’이나 ‘메시아 소망’이란 것은 세상 만민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니 ‘보편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배타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구주 강림, 예수 탄생의 소식이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겁니다. 

 

# 02

오늘 복음서 말씀은, ‘수태고지’(受胎告知)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고지'의 내용은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마리아나 요셉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기쁘고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과연,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의심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한편에서는 문자대로 믿는 분들을 향해 맹신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편에 서 계신가요? 어느 편이 되었든 놓치고 있는 핵심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천사의 ‘수태고지’ 사건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두 본문에도 내용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천사가 요셉을 찾아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누가는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물론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 모두에게 찾아갔을 수도 있고, 그중에 중요하다 여긴 장면만 마태와 누가가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마가나 요한은 왜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걸까요? 사실 성서기자들은 ‘십자가’와 ‘부활’과는 달리, ‘처녀 잉태’라는 사건 자체를 ‘예수 사건'의 핵심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천사가 전한 ‘수태고지’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마태복음 1:23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야 말로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 탄생’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지금껏 역사속에 숨어 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일까요? ‘바람’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지 '바람 자체’는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지가 흔들릴 때처럼 흔적을 통해 바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 혹은 또 어딘가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셨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과연 어떤 일을 하시는가?’ 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것만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신지 않계신지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 03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천사가 전한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복음 1:21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셨고,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죄와 죽음에 빠져 있다고 정의합니다. 삶이 헛헛하고, 애쓰고 수고함이 오히려 서러움과 아픔만을 초래하는 이유도, 아무리 많은 것을 채워도 자꾸만 허무해지고 불안에 빠지는 것도, 모두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죽음에 짓눌린 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마치 나 자신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왔고,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채 살다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건 우리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상황에 놓여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실재로 모든 인류는 노예처럼 죽음의 힘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어서 누구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힘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이 바로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은,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모든 힘과 권세들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건져내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생명과 삶, 일상을 파괴하는 것들일까요? ‘죽음’의 힘이란 무엇이냐는 겁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실재로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어떤 문제 때문에 위축되고 있는지, 삶이 무엇 때문에 자꾸만 비굴해 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건강을 잃는 것, 관계가 끊어지거나, 갑작스레 사고를 경험하게 되는 것들, 직장에서 해고 당하거나, 노후를 걱정해야하는 염려에 내몰리게 되는 것 모두다 ‘죄의 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단순히 이런 식의 재난이나 위험을 피해가거나 경험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재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이나 불행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동일하게 열려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의로운 자였던 욥이 당했던 재난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믿음이 있으니, 기도를 많이 했으니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겁니다. 

성경은 ‘죄’를 훨씬 근원적인 힘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보다는 제것이 아닌 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이나 ‘탐욕’이야 말로 생명을 갉아먹고 고갈시키면서 ‘불행’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방식으로 죽음이나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 0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똑같이 죽음앞에 서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그때만 스스로를 채워내라고 강요하는 ‘죄’의 힘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다고 으스댈 이유도 없고, 반대로 그런 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좌절하지도 않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우리 안에 없으니, 우리는 모두 똑같은 운명입니다. 죄와 죽음은 오히려 그것을 자꾸만 감추려 합니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게 만들고, 다른 것으로 삶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이런 형편에 떨어져있는 우리에게 천사가 전하는 구원의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는 이전에 하나님을 전했던 선지자들과 다르고, 무엇을 근거로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고, 죄가 아닌 생명을 이루게 해주실 수 있다는 걸까요? 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은 2독서인 로마서 1:1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종인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거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인생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의탁하며 살고 있다는 고백인 겁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이신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가 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것과 (3) 성령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4)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가 우리와 똑같은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복음서 말씀도 ‘처녀 잉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삶의 조건에 둘러쌓여 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분의 삶의 결론이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죽음앞에서는 소유나 사회적 신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모두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소멸하게 하는 폭력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이라고 외칩니다. 처녀 잉태 처럼 놀라운 ‘기적’이라서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은 기적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의 사건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우리가 참여하는데 '그 어떤 조건도 붙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자격을 갖춘다거나,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고,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행위인 ‘구원’에 대한 신뢰만 있으면 됩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야 말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었기에 그들은 황제 숭배와 로마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당당함이야 말로 죽음의 힘에 눌리지 않고 구원받은 이들만 선택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 05

따지고보면 여전히 징표나 증거가 없으면 믿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만족할 수 있어야 하고, 내 기대가 채워져야만 인정하려드는 우리들의 고집세고 삐뚫어진 마음 때문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고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지는 전혀 고려하질 않습니다. 스스로를 만족시켜야만 불신과 염려를 멈추려드는 그런 마음을 ‘탐욕’이라고 하는 겁니다. 1독서인 이사야 7장에 등장하는 유다의 12대 왕 ‘아하스’가 그런 탐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왕이었던 그의 아들 ‘히스기야’와 달리, ‘유다’ 왕국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였다’ (열왕기하 16:2)는 말로 소개합니다. ‘다윗’과 같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제 마음안에서 내몰아버린 후, 오히려 그의 빈 마음에 찾아든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한번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해 오던 때에도, 하나님이 아닌 강대국 ‘앗수르’를 믿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섬기던 우상 숭배에 미쳐, 심지어 제 자식까지 제물로 바칠 만큼(역대하 2:3)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의 결국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다시 말해 ‘너와 함께 하시겠다’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들리지가 않습니다. 두려움에 내몰린 그의 불신의 벽이 두껍기만 합니다. 오죽했으면 징표를 구하면 ‘징조’라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 이사야 7:12b

 

겉으로만 보면 감히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이 신앙적으로 보이고, 하나님께 징조를 구해보라고 전하고 있는 이사야가 불신앙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재로 그는 하나님을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무조건 앗수르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마음과 생각안에는 다른 계획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유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마땅히 채워야할 것은 버리고, 반대로 제 뜻대로만 하려는 탐욕을 마음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 올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설교나 말씀과 달리 실재로는 제 생각과 뜻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당시 유다의 현실은 다급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혼돈에 처해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열강속에 둘러싸인 약소국으로서는 균형을 잃고 한번 삐끗하는 순간 운명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하스가 최선의 외교적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이사야의 말은 현실감 없이 열광주의나 맹신주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들리기가 쉽습니다. 과연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요셉’은 아하스나 우리와 전혀 다르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 마태복음 1:24

 

그는 제 뜻대로 하려는 ‘생각’을 마음에 채우지 않았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은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를 잠들게 하신 이후에 천사를 보내셨던 것은, 헛된 생각을 멈추게 하시려는 ‘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잠에서 깬 이후에도, 그는 두려움에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던 자신의 생각을 비워내고, ‘아멘’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채웠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해야할까요? 누가의 복음서를 보니 그의 아내 ‘마리아’ 또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응답으로, 천사가 전한 주님 말씀을 자신의 인생에 채워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메시아로 오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머무실 최고의 ‘집’을 지었던 겁니다.

 

# 06

‘아하스’ 는 결국 제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소유한 탓에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림의 소식을 기쁨으로 믿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패배주의에 짜부라지고, 세상의 유혹과 기만에 물들어 있는 왜곡된 우리 자신의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아 희망의 소식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동정녀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이제 모든 것은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동의 여부와 관계 없이 권세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동의나 불신에 관계 없이 온 땅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걸었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예수님의 종으로 자신의 인생을 걸었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걸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 믿음에 삶을 걸고 살아가라는 복음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치 않는 희망의 빛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 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 로마서 1:7b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