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6 사순절 다섯째주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에스겔 37:1-14
응송 | 시편 130
2독서 | 로마서 8:6-11
3독서 | 요한복음 11:1-4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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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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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과 '영광'
1.
다른 시기에 비해 사순절 시작과 함께 삼주째 이어지고 있는 복음서 분량이 상당합니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오늘 말씀은 일관성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도 어렵습니다. 물론 본문의 주된 사건은 간단하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과 주님이 그를 다시 살려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과 행동은 낯설기만 합니다. 사람이 죽게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4b)이라며 잔뜩 늑장을 부리십니다. 뜬금없이 예정에도 없던 유대지방을 들르셨다가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11b)는 한가한 말씀도 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고도 하십니다. 앞뒤가 않맞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부랴부랴 그의 집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으니, 체면이 구겨질 만큼 완전히 헛발질을 치고 말았습니다. 주님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불쑥 튀어나와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말까지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대체 요한은 본문의 사건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2.
복음서 말씀의 배경이 되는 1독서 말씀을 먼저 읽어보면 좀 더 복음서 말씀이 명확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1독서 ‘에스겔'서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본문입니다. ‘마른 뼈의 환상’이야기입니다. 후반부인 37:11~14에 가보면 이 환상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비유'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산산히 깨어진, 숨을 쉬고는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피폐한 상태에 떨어져있었습니다. 비쩍 말라 버린 ‘마른 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랜 절망과 제국 바벨론의 문화와 힘에 동화되어 눈물마져 말라버리고, 영혼이 죽어 버린 형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 마른 뼈처럼 생명력 없이 무너져버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하는 복음서 말씀과 겹쳐지는 장면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게 되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감탄하실 수도 있고, ‘어떻게 하면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망한 것 같은 사업이 다시 일어나고, 깨어진 건강이 회복될 수 있을까’ 부러워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도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혹은 나사로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불편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고 있는 구원 이야기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사건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과거의 어느 민족이나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기록물이 아닙니다. 그 사건과 경험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때때로 이스라엘이 처했던 형편과 처지로 떨어지곤 합니다. 실직을 당하거나 실연을 당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큰 병에 걸리거나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이 아니라 수시로,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생명이 파괴된 ‘마른 뼈’같은 상태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은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마른 뼈’ 이야기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마른 뼈’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그런 마법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전하려고 했던 핵심 메시지는 6, 12, 14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싶으실 겁니다. 그런데 교리와 말씀, 설교를 통해 이런 분이라고 채득한 ‘정보’들 말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사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주시는 찰라를 엿볼 수 있을 뿐, 결코 지식이나 인식적으로도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범주를 초월해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2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8:11) 이 말씀을 실감하고 계십니까? 제국의 포로로 떨어진 형편에서, 마른 뼈처럼 삶의 평안과 생명이 파괴된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신 것을 실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게 쉽지가 않은 겁니다. 별일 없을 때, 그러니까 살아있다거나 살만하다 싶을 때는 누구라도 큰 소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부분 이런 경우에만 통용됩니다. 하지만, 일단 그런 상황에 떨어지면 눈 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히고 두려움에 삶을 지탱하는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3.
이런 형편에 떨어지고 마는 우리에게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이곳, 내 삶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이 실감이 되시나요? 실제로 우리는 늘 형편과 상황과 결과만을 들여다 봅니다. 이것이 없어서 죽을 것 같고, 저것이 없어서 망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빵이 없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말씀’이 없어서 죽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은 사실 삶을 더 풍성하고 편하게 해주는 것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들 일 뿐입니다. 물론 당장 배고플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얻고 누리기 위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고, ‘죽은 자’를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현실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아는 사람이 ‘없음’과 ‘결핍’ 때문에 염려할까요? 하나님께서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겠습니까? 이건 마치 곳간에 먹을 것이 가득한데도 먹을 것을 염려한다는 것처럼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다시한번 묻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4.
복음서 말씀을 다시 봅니다. ‘죽음’이 ‘나사로’를 삼키자 그의 집과 마을은 온통 슬픔으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죽음의 힘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폭력적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죽었던 그였지만, 주님은 마치 살아있는 이를 부르시듯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러자 ‘잠들었던 그를 깨우러 가자’던 말씀이 허투루 던지신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듯, 시체를 덮는 베를 동인채로 나사로가 제 발로 걸어나왔습니다. ‘있으라’ 하시는 말씀에 모든 허무와 없음이 응답하여 창조가 완성되었던 그때의 말씀이 죽음에 사로잡힌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울려퍼졌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모습에 사람들은 압도되었습니다. 절망이 한순간에 희망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요즘도 불치의 병에서 나았다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놀라운 이적과 치유를 간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능력과 경험을 부러워하며 쫓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시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게 멈추어서도, 또 그런 사건에 현혹되어서도 않됩니다. ‘나사로’는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일년 살 것을 십년을 살게 되고 백년이 아니라 천년을 살게 된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에 의해 무너지고 깨어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안에서 소망하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 로마서 8:11
우리는 ‘몸’이라고 하면 단순히 ‘육체’를 뜻하지만, 헬라어에는 ‘몸’을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단백질 덩어리인 ‘사르크스’(σάρξ)와 ‘영혼’과 하나된 온전한 ‘몸’을 뜻하는 ‘소마’(σῶμα)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적어도 ‘영’이 없는 ‘몸’은 ‘사람’일 수 없고, 반대로 ‘몸’이 없는 ‘영혼’만도 ‘사람’일 수 없습니다. ‘소마’는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몸’이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했던 ‘몸’은 바로 ‘소마’입니다. 이 ‘몸’은 영원히 죽음에 간섭받지 않고 배제할 수 있는 ‘충만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된 ‘부활’의 몸 입니다.
그러니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눈에는 주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찬란한 생명의 빛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가는 심연을 알 수 없는 죽음의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만 선명합니다. 죽음의 사나운 아가리에서 당신의 사람을 불러내시고 건져올리시는 그분만 보입니다. 자, 이제 다시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사도 요한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스캔들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다시금 그의 살아남은 ‘부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본문의 핵심이 들어왔나요?
5.
지난 주일 나면서 부터 보지 못했던 맹인을 보며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 요한복음 9:2b
이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9:3b)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주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 11:4
‘하나님의 영광’이란 곧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우리 스스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역사속에 당신을 드러내셔야만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한 고백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는 것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더 많이, 더 화려하게, 세를 과시해서 만족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건 자기 만족일 뿐입니다. 에스겔이 외쳤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고, 살리고, 회복시키신다는 예언이 ‘역사의 주관자’로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다’라는 말씀을 상투적으로 읽으시면 않됩니다. ‘역사’라는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끝까지 가야 알게 되고,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다보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평안이 깨어지고, 악인이 득세하고, 억울함이 가득해 삶이 무의미해질 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쉽다면 구태여 예언자가 목이 터져라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6.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광’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되어 살아내신 삶,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영광’은 언제나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만을 증거하는 겁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야 말로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아는 것은 교리적이고, 신앙적인 정보로 체득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드러내시고, 그 고백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을 하고 계심을 경험하는 것만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경험한다는 것은 약장수들이 떠드는 어떤 비법 같은 것이 아니라, 계시되고 드러나야만 하기에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안에서 한가지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 요한복음 11:40
유대인들처럼 증거나 표징이 있어야 믿거나, 헬라인들처럼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 지혜를 얻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우리 자신의 확신이나 만족 같은 수준의 것일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온 삶을 맡긴 채 십자가로 향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또한 자신들의 인생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걸었던 ‘사도들의 믿음’이며, 사도들의 증언과 가르침에 삶을 일치시키며 걸어왔던 ‘교회의 믿음’입니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망하게 되었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우울함이 밀려 온다고 하여도,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십시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직하게 그 길을 따라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