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6 부활절 둘째주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2:14a, 22-32
응송 | 시편 16
2독서 | 베드로전서 1:3-9
3독서 | 요한복음 20:19-3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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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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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
1
우리는 오늘 부활절 둘째주일 복음서에서 매우 익숙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도마’입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마다 ‘의심많은 도마’, 그래서 ‘믿음 없는 도마’라고 핀잔을 주을 주니, 본디오 빌라도 만큼이나 억울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 것은 ‘도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전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던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다고 ‘도마’만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나머지 제자들과 달리 눈으로 보고, 손가락을 넣고,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세가지 증거를 요구했다는 것 때문에, 그는 언제나 ‘믿음’없는 제자로 불릴 뿐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기 위해서 던졌던 그의 요구는,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감춘 채 덮어놓고 믿겠다고 하는 것 보다는 정직하고 정당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본문이 믿음없는 도마를 핀잔주거나 그러니 우리는 믿음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의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본문안에는 제자 파송(21절)이야기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라는(23절) 어색한 사명 이야기도 끼어 있습니다. 대체 오늘 예수 부활과 제자들, 그리고 의심많은 도마의 이야기안에 담겨있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2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중심 대목은 아마도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향한 주님의 말씀일 겁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29b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보고서야 믿고자하는 도마의 믿음을 사도로서의 수준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본다’가 아니라 ‘믿는다’에 있습니다.
오감(五感)을 통해서만 특히 보는 것만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인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은 방식인 것이 사실입니다. 늘 배신에 익숙하고 믿는 것에 실망해온 탓입니다. 그러니 ‘믿으라’는 것은 마치 나는 법을 잃어버린 타조에게 ‘날아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불편하기도 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믿는 것도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도마’가 대표로 면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결국 제자들 모두가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외 없이 누구나 똑같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나는 믿는 것처럼 으스대고 떠벌린다면 오히려 맹신이고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말씀 사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런식으로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설득당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3
오히려 보지 못했기에 믿는 것이 너무 힘들다 생각하는 우리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2독서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당신들이야 말로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의 말만을 듣고 믿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고 기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벧전 1:8
이것이 참말이라면 이보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또 있을까요? 종말의 때에나 맛볼 것이라 여겼던 구원의 기쁨을 이미 여기에서 얻으며 살게 된다면, 이것이야야 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보지 않고 믿는’이들이 누리게 될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길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주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시던 그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시간적 배경은 ‘주간의 첫날’(19절) 즉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의 오후였습니다. 그날은 예수의 죽음과 스승을 살해한 무리들이 자신들의 생명도 노리고 있다는 암울한 현실앞에 제자들 모두 절망하던 때였습니다. 스승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던 바로 그날 해가 떨어지면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었던 탓에, 그들은 미쳐 도망갈 틈도 없이 허둥지둥 어두운 방안으로 숨어들어야만 했습니다. 꼬박 이틀간 방구석에 갇혀 있다보니 극심한 배고픔과 두려움만 그곳에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제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듯 ‘평화’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을 몰아내면서 제자들 마음에 차오르던 따듯한 온기가 급기야 온 방안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충만해졌습니다. 돈이나 명예, 소유에 길들여지다보면, ‘평화’가 뭔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공포에 떨어진 이들에게 ‘평화’와 ‘안식’ 말고 다른 구원은 없는 겁니다. 건강이 깨어지고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억만금이 위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문제는 지금 이런 형편과 상황에서 ‘평화’를 경험하게 된것을 그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들을 덮어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걸까요? 생각해보면 애당초 주님께서 살해당하시고 죽었다는 것에서 이 공포와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알 수 없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제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벗어나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4
‘여드레’ 뒤에 주님께서 마침 자리를 비웠던 ‘도마’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26절) 성서에서, 특별히 복음서에서 팔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팔일’은 한주간이 끝나고 새로이 맞이하는 주간의 첫날입니다.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는 장면에서 언급되는 ‘팔일’은 칠일에 걸쳐 창조사역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 ‘창조’의 능력과 이어진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야 말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주실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이들이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부활하신 주님이 이루어주시는 새로운 창조라는 것을 ‘도마’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본문 전체가 ‘믿음’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어미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만 하느냐?’고 따져묻던 어리석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설명해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죽은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믿음 없는 우리가 믿고 살아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야 말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내시는 창조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인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복음 20:22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살아있는 자가 되도록 제자들의 믿음을 일으켜내시는 장면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이제야 뜬구름 처럼 막연하게만 보이던 ‘성령’이 손에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어디로부터 오시는 분이신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가 눈에 들어오니, 그 동안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했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성령을 통해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숨’이 트이지 않으니 질식할 것처럼 답답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죽음의 형편에 떨어진 결핍되고 깨어진 심령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숨’을 받는 겁니다.
5
사도들이야 눈으로 보았으니 믿었겠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부활에 인생을 걸고 산다는 것이 아득하게 여겨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써보낸 편지만 보아도 초기 교회안에서도 이런 형편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낙오하고 세상으로 떨어진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을 담고 있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본래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권세와 성공의 신화가 주인 행세하고 있는 냉혹한 땅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교회를 위해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위로와 우리가 바로 보지 않고도 믿으며 사는 이들이 아니냐고 신앙을 격려하려던 겁니다. 그 동안 우리는 무턱대고 믿어서라도 예수 부활을 입증해야한다는 조바심과 부담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부활은 이런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않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20:31
요한은 친절하게도 이 내용을 마지막 한절의 말씀으로 갈무리 해줍니다. 예수 부활의 의미와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고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에 있는 겁니다. 방구석에 숨어든 제자들을 위해, 여전히 핍박하는 세상에 우겨쌈을 당하고 있던 교회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오늘 보지 못한 채 믿어야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야 했던 겁니다.
6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으시고, 믿음을 북돋우셨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 20:21b
이미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으로 보내시려던 제자 파송의 꿈은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깨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참으로 당신의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하늘로부터 끊어진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다시금 하늘에 이어진 사람들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숨통을 틔워주셨습니다. 하늘에 숨구멍이 이어졌으니 더 이상 땅의 일에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이들은 깨어진 세상, 하나님을 잃고 꿈을 잃고 생명이 죽어가는 황폐한 땅에 숨구멍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겁니다.(사도행전 2:32)
증인은 ‘증인’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더욱이 예수 부활의 증인은 예수 부활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증인이면 족합니다. 성공한 사업가나 돈 많은 부자가 될 필요도 없고, 존경받는 목사나 신학 박사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어떤 삶이 주어졌든, 부활의 증인으로 살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겁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 공동체인 ‘교회’가 해야할 일은 한가지 뿐입니다.
7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20:23
그런데 이 말씀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며 말하셨던 주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마태복음 16:19
그러니까 23절의 이 말씀이야 말로 예수 부활의 증인이 해야할 사명, 교회가 해야할 일, 교회만이 감당해야하는 사명의 내용인 셈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고양시키서나,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친목단체나 복지나 사회사업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이런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일은 세상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그런 세상이 되야 합니다. 다만 교회는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죄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는 마치 하늘에 속한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 믿음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하나님앞에 불쌍한 이 세상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이들로 부름을 받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어떤 이교도들의 단순한 종교행위처럼 ‘나 혼자', ‘우리 끼리’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깨어진 세상의 이름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평화를 이루어주실 하나님 앞에 서는 희생의 제사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 부여받은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믿게 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이런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염려하지 않게 될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진 이 ‘숨’이 각 사람 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온 누리 곳곳마다 흘러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죽은 땅이 살아있는 이들의 땅이 될 겁니다. 믿음위에 든든히 서서, 종말에 날에 마침내 드러날 생명의 기쁨에 참여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이 사실을 믿게 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