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4 성령강림후 제1주 * 삼위일체주일
성서일과 독서 본문
# 1독서 | 창세기 1:1-2:4a
# 응송 | 시편 8편
# 2독서 | 고린도후서 13:11-13
# 3독서 | 마태복음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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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1
안식후 첫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로 인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이 제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은 두려움과 상심 때문에 뿔뿔히 흩어졌던 제자들 사이로 삽시간에 전해졌고,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갈릴리의 한 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그곳으로 가시겠다고 하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분을 뵐 수 없다는 절망에서 벗어난 덕분인지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17b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를 떠안은 것처럼 마음 한켠이 무겁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턱대고 믿어보겠다는 의욕이나, 좀 믿어보라는 강요만으로 믿어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누구도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타박할 수는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짧은 이 한 문장안에는 초기 교회 공동체가 처해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타박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세상은 가혹했습니다. 사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세상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표현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해야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비틀거리는 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걸음 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우리는 어떤 편에 설 수 있을까요?
2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 18b
의심에 떨어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시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 뿐’이라거나, ‘조금만 더 때를 기다리자'고 하시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솔직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당신께서 그냥 권세도 아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유대교와 로마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모여들고,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끼리 모여서 아무리 ‘승리’를 선포하고 자축해도, 세상은 꿈쩍도 없습니다. 이것이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교회 공동체가 직면했던 현실이고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우주적 선언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어보이는 똑같은 형편에 처해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이 말씀이 믿어졌다면 그렇게 세상에서 낙망하거나 그런 세상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인간 구원의 길로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부활’도 믿기가 어려운데, 눈에 보이는 ‘십자가’의 절망 너머 예수님만이 건너실 수 있던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숨겨지고 하나님을 믿을 때만 드러나는 배타적이고 은폐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게 되면, 누구라도 ‘신앙의 위기’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3
‘십자가’안에는 세상에 가리워져있는 하나님의 신비, 즉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담겨있습니다. 어제를 모르면서 오늘을 말하고 ‘역사’를 부정하면서 ‘내일’을 운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통치나 구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실증적 증거가 없으면 쉽게 ‘그런 것은 없다’고 정의내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못본 것 뿐이고 우리는 모르는 것 뿐입니다. 사실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전까지는 아는 척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것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방식’, 혹은 ‘은폐된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인정과 겸손만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하나님이 계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아는 지식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고, 경험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에서 작동되는 방식에 길들여진 탓에 우리 눈에는 여전히 들어오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지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시며, 어떻게 우리 가운데 찾아와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충분한 길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우리 세계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예수 사건’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11:15)
4
이천년 교회 역사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이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그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발견하고 믿어온 해답이 주님의 말씀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 19~20a
여기에서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세례를 베풀때나 기도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언급하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계시지만 늘 ‘한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하시고 그 관계성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니,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언제나 ‘하나의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의 기도에 성부와 성령은 기꺼이 응답해 주심으로, 예수님의 사람들과도 기꺼이 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과의 일치성,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하나의 운명공동체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이신 성부와 한 몸으로 일치될 수 있습니까? 성부가 창조와 종말의 완성자시라는 사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대하는 겁니다. 창조와 종말은 시작과 끝, 즉 하나님께 ‘역사’가 달려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세상의 악과, 우리의 무력함이 전부인 현실이 아니라, 창조의 문을 여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믿는 겁니다.
아들과의 일치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겁니다. 부활신앙은 나는 망해도 하나님은 망하지 않으시고,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운명을 거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성령과의 일치는 무엇을 통해 이룰 수 있을까요? 지난 주일에도 나누었지만, 성령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언가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어떤 현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생명’에 예민해지고 ‘생명’을 살리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5
교회는 늘 ‘부흥’을 꿈꿔왔습니다. 2천년 교회의 지향이며, 하나님 나라의 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회성장’은 하나님과의 일치성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부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교회성장’에 천착하는 분들은, 교회가 성장해야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선교나 전도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제 자신의 탐욕을 감추려는 변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겨자씨 한알을 말씀하셨는데, 아름드리 ‘백향목’에만 시선을 돌리고 예수님은 낮아지라고 하시는데 영향력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이건 유대교와 로마의 제국주의가 추구하던 방식이며,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던 마귀의 방식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런 것이 없음이 커보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눈으로 응답하는 이들에게만 알려진 은폐되고 가려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현실과 하나님 나라, 세속의 성공과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갈등과 유혹속에 처해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성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던 겁니다. 예수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초청에 응답하고 참여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인 겁니다.
6
1독서 본문인 창세기 안에는 하나님께만 생명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이 좋았다는 두개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발견했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는 예수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고, 서신서 말씀에서 보듯 창조의 역사에 함께 하셨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축복의 근거로 믿어왔습니다.
창조기사안에 하나님은 ‘있으라’와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있으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좋았더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대 사회에서는 ‘해’와 ‘달’이나 ‘별’들은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세속의 권력자들은 다 그런 신들이나, 신들의 화신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절대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앞에서는 입도 뻥긋할 수 없고, 시키는대로 노예처럼 복종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선언합니다. 권력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피조물’일 뿐이라는 선언이며, 이제 ‘하나님 형상’을 지음받은 인간 위에는 ‘하나님’뿐이시라는 인간 해방의 선언인 겁니다.
비록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나고, 태풍과 지진이 몰아쳐도, ‘있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생명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형편도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의지안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저주와 원망과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복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았더라’하셨으니, 하나님과 한몸인 우리에게 ‘좋은 날,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있으라’와 ‘좋았더라’는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은 ‘빛’을 통해 드러납니다. 창조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동의가 필요없던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떨어진 순간, ‘창조’가 드러났고 비로서 만물이 창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아무도 볼 수 없으니, 있어도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비추기 시작하고 어둠이 물러가는 순간, 비로서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든 없음의 힘을 가로막고 ‘있으라’ 하시고 모든 좋지 않은 것들을 ‘좋았더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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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부활’은 보이지 않고 참혹한 ‘십자가’만 보일 수 있습니다. 세속의 찬란함과 위용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것처럼 어둠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둠속에 있을 때는 섣불리 길을 찾아 나서지 않고, ‘빛’에 집중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시리 돌부리에 채일 수도 있고, 자칫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류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이 찾아왔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의 참 빛입니다. 그 빛을 통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남겨진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신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함께 사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살겠다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그의 운명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래야 다시 사는 그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밤이 오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밤이 오듯, 다시금 어둠이 길을 가리우고, 염려와 불안과 의심으로 우리를 몰아세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한몸 공동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