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3/07/30 성령강림후 아홉번째 주

ViaNegaTiva 2023. 7. 28. 11:4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29:15-28

  응송 | 시편 105:1-11, 45b

2독서 | 로마서 8:26-39

3독서 | 마태복음 13:31-33, 44-52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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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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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감추인 보화

당신의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1

참 좋으신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러분은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해주시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롬 8:18

 

지난주 함께 읽었던 사도바울의 말입니다. 짧은 이 한구절 안에는 그가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처한 삶을 매우 위태롭게 보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역사는 완성되지 않았고,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가 ‘고난’일 수 밖에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린 꽃이라도 한창 쏟아지는 소나기에 고개를 떨구는 한이 있어도, 여전히 태양을 향하는 법입니다. ‘하늘’을 향하며 사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한번 사로잡히고 나면, 현재의 고난에서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습니다. 지구의 인력이 끌어당기듯 거부하지 못한 채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들어가기 쉽상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 더 만만치가 않다고 해야할 형편입니다. ‘영광’이 오고 있음에도,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단순합니다. 장차 올 미래보다는 현재가, 영광보다는 고난이 더 절실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억울한 마음도, 주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에 회의도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자꾸만 반복되다보면, 어느새 신앙은 냉소적으로 변하고, 현실에는 쉽게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현실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가리우고 땅의 가치관, 기대를 강요합니다. 정의, 인애, 자비, 사랑보다는 자신만 보이는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심지어는 생명보다 돈이나 명예를 우선시하는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을 세속적 가치로 환산하려는 이들에게, 천국이나 영생은 이미 죽은 언어 (死語)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인데, 그런 나라가 이미 의미를 잃고 죽은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삶’에 드리워지는 어둠을 걷어낼 도리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2

2독서 서신서인 로마서 8장에서 바울 사도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단호히 외치고 있습니다. ‘죽음, 삶, 천사, 권세자들, 현재일, 장래일, 능력, 높음, 깊음, 그 밖에 어떤 피조물’들까지 총 열가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이런 단어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하고 막연하게 여기고 지나칩니다. 이런 것들은 고대인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생명을 지켜주는 힘과 능력이라고 여겼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현대인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오늘 세상에서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래서 우리 삶과 생명, 평안과 기쁨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소비에 길들여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제일 실감나는 권세는 ‘돈’일 겁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막강합니다. ‘돈’이 사람의 귀함과 천함을 구분짓고,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치료를 거부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힘들이 현실을 위협해 올 때, 누구나 절망과 두려움에 떨어지곤 합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마져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런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이런 문제 자체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욱 제 아무리 이런 것들이 삶을 위협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크게 들어야만 합니다. 사도의 말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들과 끊어져도 상관이 없다는 뜻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실감이 나시나요? 이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보게 되는 것, 맛보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이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지만, ‘죄’에 떨어진 이후로 우리는 이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사고로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도무지 그분의 따듯한 말씀과 한 없이 넓은 품, 평안과 위로, 다함이 없는 사랑, 풍성한 생명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헐벗고, 불안하면서도 지금, 이곳이 진짜인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능력을 공허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늘 저만치 떨어져 ‘그런 것이 가능하겠느냐?' 의심스런 물음만 던집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품에 안겨 살아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교회 잘다니고, 봉사나 헌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전에 기록된 정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빠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도가 말한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영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말씀은 또 무엇인지,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인지 점점 깊은 이해와 앎으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무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3

1독서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야곱 이야기입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야곱은 우여곡절 끝에 ‘하란’ 땅, 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삼촌이라고는 ‘라반’은 ‘야곱’보다 더 현실적이고 계산에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야곱’은 그냥 덧붙여진 ‘혹’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치 노예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밥값은 할 수 있어야 서러운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은 언제나 무거운 짐일 뿐이고, 그 순간 우리 자신은 ‘노예’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야곱의 지친 일상의 의미를 바꾸어버릴 일이 생겼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니 ‘7년이 며칠 같이 느껴졌다’라고 할 만큼 매일을 건져낼 구원의 빛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7년에 7년을 더해 결국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머물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의 아내 ‘라헬’ 때문이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이 억울하고 안타깝고 섭섭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와 소망으로 채워졌던 것은 ‘야곱’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시간이 우리와 달랐을리 없고, 그가 처한 상황이 우리보다 나았을리 없습니다. 삼촌 라반이 야곱을 인정하고 대우해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라헬’을 사랑하게 된 그 순간부터 야곱의 눈에는 그녀만 들어왔고, 모든 것이 ‘사랑’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었습니다. 힘든 일이나 억울함, 섭섭함, 상황이나 처지도 전혀 신경쓰이질 않습니다. 그러고보면 ‘사랑’은 삶을 짓누르는 모든 것을 끊어내는 유일한 길이 틀림 없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면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참으로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를 세상의 시름이나 삶의 무게로부터 건져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가 말했던 그런 대단한 힘과 권세들로부터 참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길 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도, 늘 새롭고 충만하게 해줄 수 있는 것에 빠져드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3독서 복음서 말씀은,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겨자씨’, ‘가루 서말속에 섞인 누룩’, ’밭에 감추어둔 보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 다섯 가지입니다. 지난 주에 읽은 ‘밭에 좋은 씨 뿌리는 사람’에 이어,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천국’의 비유는 우리의 이해와 기대에 쉽게 포착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천국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머리가 허옇고 수염이 긴 산신령 같은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잘생긴 영화배우처럼 그려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모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경험과 생각, 기대의 수준과 한계를 반영하는 겁니다. ‘천국’도 우리가 아는 수준으로만 생각합니다. 온갖 금은 보화가 가득하다거나 ‘선진국’을 뛰어넘는 수준을 생각합니다. 이 땅의 경험과 지식을 더 확장하고 개선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겁니다. 종종 천국을 보고 왔다면서 아주 실감나게 설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이런식의 경험이 옳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정체성은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뵙지 못했고, 바울 사도 또한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습니다. 감추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그 누구도 천국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보여진 틈을 통해 천국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천국은 어떤 곳이라고 가르쳐주고 계실까요?

 

4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오직 ‘보화’생각 뿐이었을 겁니다. 그는 즉시로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러 갔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는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이리 저리, 늘 좋은 진주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겁니다. 그것 찾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겁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발견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좋은 진주를 찾게 된다는 것은 최고의 기쁨이며 복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나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제 소유 모두를 팔았습니다. 만일 밭을 파고보니 기대한 것 만큼 보화가 않나오면 어떻게 할까요? 사고보니 더 좋은 진주를 찾으면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그 몫을 다른 누군가 채어가고 말 겁니다. 이거야 말로 낭패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이들은 모두 천국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단 제 자신의 운명을 던지기고 보면, 자기 자신에 관심이나 염려는 점점 줄어들 수 밖에는 없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화가 감추어진 것이나 좋은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쓸모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보화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진주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큼의 눈이 없다면 땀흘려 수고해야할 밭일 뿐이고, 그저 그런 사치품일 뿐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 둘은 사람들이 볼품없이 생각하고, 쓸모 없다 생각하고, 그런식으로 ‘어떻게' 라고 가벼이 지나치는 것들입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붉게 익어가는 대추 한알에서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 무서리 내린 몇날 밤, 땡볕 두어달, 초승달 몇날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하나님의 의해 점점 확장되고 완성되어가는 나라를 볼 수 있는 이들에게만 겨자씨, 누룩안에서 천국은 발견됩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를 길어올리는 비유의 의미는 뭘까요?

그물을 건져내면 잡으려던 것 뿐만 상품 가치가 없는 작은 것들, 심지어는 먹을 수 없는 것들까지 뒤섞여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그물을 건져내기 전에는, 그물을 풀어헤치기 전에는 어떤 것이 좋은 물고기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읽었던 ‘가라지’비유와 같은 말씀입니다. 천국은 그 날이 오기전까지, 마지막 그날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이 오는 순간, 인류의 걸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삶,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자랑하던 것들, 탐욕과 자기 자랑, 또는 절망과 상처들까지 모든 것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될 겁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지금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겁니다.

 

5

‘천국’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안에도 ‘천국’에 대해 회의적인 분들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금은 보화처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가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나, 여기서 뒤바꿀 수 없던 억울한 삶이 보상을 받는 것 같은 ‘낙원’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맞습니다. 그런 식의 천국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라, 지금은 가리워지고 희미하게 보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되는 곳이며 사건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엉터리 같은 삶, 죽음이 여전히 이를 드러내고 있는 세상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생명, 온전한 사랑이 충만히 임하게 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어떤 나라, 어떤 삶, 어떤 보상이 아니라,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에 온 영혼을 기울여 보십시오. 무더위 속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듯, 성령의 감동이 밀려와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마음과 영혼이 천국에 담기게 될 겁니다. 일단, 그런 나라가 눈에 들어게 되면, 삶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어떻게 해야 땅에서 벗어날까?’ 또는 ‘땅의 절망을 이겨낼까?’라는 물음에서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며 사십시오. 그 소망이 일상을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겁니다. 그 날이 오고 있음에 집중하십시오. 그물안에 이런 것, 저런 것이 뒤섞여 있겠지만, 그물이 가득찰 때까지 어부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 법입니다. 그 날이 오면 그물은 물 밖으로 건져지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아무런 결실도 없는 것 같아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도이 ‘천국’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될 겁니다. 우리안에 함께 하시는 그분으로 인해, 이미 그 기쁨의 날을 오늘에 끌어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