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3/08/06 성령강림후 열번째 주

ViaNegaTiva 2023. 8. 2. 17:5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32:22~31 혹은 이사야 55:1~5

  응송 | 시편 17:1~7, 15 혹은 시편 145:8~9, 14~21

2독서 | 로마서 9:1~5

3독서 | 마태복14:13~2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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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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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660, 독일 베를린 가말다컬투어포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다

01

야곱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20년 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신앙 경험을 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식의 체험이나 간증을 듣게 된다면, 형통하고 평탄한 인생길이 열릴 것이라고 부러워할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야곱의 인생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이십년 간, 여전히 그는 라반과 속고 속이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이제는 ‘제 가족'을 지켜내야 한다는 식으로 책임감의 영역  이 확장되었을 뿐,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진 마음에 갇혀 있습니다. 이기심,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서슴치 않는 비열함은, 잘 살아 보겠다는 그의 최선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소멸과 패망이라는 두려움과 싸우며 끝없이 반복되는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다는 점에서 그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멀찌감치 서서 야곱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 마음은 불편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늘 이런 형편에 내몰려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죽임 당하고, 쫓겨나고, 포로로 끌려가고, 패망하는 일의 반복이 그들의 역사였던 겁니다. 배부른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생존하고 살아나는 것, 그것 뿐입니다. 20년 세월이 지난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된 야곱의 모습입니다. 

훌쩍 나이도 들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 많은 재산까지 번듯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빈손으로 떠나왔던 그가 이제는 부자가 되어 금의환양하게 되었으니 그럴 듯해 보입니다. 현대인들이 꿈꾸는 노후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형편은 2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형에 의해 죽임 당할지 모른다던 공포와 두려움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든 재산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강을 건너 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한걸음도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평생토록 추구해왔던 것들도 지금 내면을 짓눌러 오는 공포로부터 자신을 건져주지 못합니다. 극심한 고난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모두 홀로 남은 야곱처럼 얍복강가에 버려지고 맙니다. 홀로 속상하고, 홀로 괴롭고, 죽을 것처럼 무거운 절망도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홀로 죽음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에도, 여전히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갈 겁니다.

 

02

‘홀로 남는다’는 말씀을 단순히 어딘가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본능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나, 명품에 중독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 정도 명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구매력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욕구인 겁니다. 재산, 가족, 심지어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야곱이 강 건너로 떠나보냈던 것들이야 말로 이것만 있으면 살겠다고 붙들던 것들입니다. 제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우리도 이런 것을 의지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벗어나지 못할 만큼 연약합니다. 무엇이라도 가져야 하고, 누구라도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홀로 남게 되는 것은 ‘소외’이며 ‘실패’일 뿐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삶과 행복을 위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은, 비로서 탐욕과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누구라도 한번 야곱처럼 치명적인 절망에 떨어지고나면 그토록 매달리고 집착하던 것들이 정작 중요할 때는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고 움켜쥐던 손을 펼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직면했을 때, 억만금도 쓸모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제 경험으로 지나고 나서야 깨댇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속에서 늘 이런 상황에 내몰려 있었습니다. 1독서 선택본문인 이사야 55장이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유다는 완전히 망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포로로 끌려온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높은 수준의 생활을 보장받았습니다. ‘다니엘'처럼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었고, 나름대로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로민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붕괴되던 그날의 기억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처럼 트라우마로 남아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고 인정을 받아도 늘 마음 한구석이 뻥뚫린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외면하고 일상에 파묻혀 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벨론 땅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포로민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고통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과 결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제국 바벨론 한복판에 있었지만, 유대인들만은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무엇을 가져도 만족감이 없는 ‘홀로’ 남겨지고 버려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예언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03

야곱은 밤이 새도록 자신과 씨름하던 사내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은 그 동안 하나님께서 들어주실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라는 식으로 읽혀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씨름은 하나님께 떼를 쓰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와 싸워 이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바라는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이런 것을 얻고, 저런 것을 이루어 제 운명을 지켜내려고 몸부림치던 지난 20년간의 시간이 반복될 뿐입니다. 도무지 포기할 수 없던 야곱의 씨름은, 결국은 삶에 가장 위급하고 중요한 순간에 정작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무능과 고독속에서 붙잡았던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으며, 더 이상 이대로는 않된다는 벼랑끝에서의 울부짖음이었던 겁니다. 이제 그 인생에 하나님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어찌해서든 하나님과의 관계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함 뿐입니다.

형을 피해 도망하던 ‘벧엘’에서 처음 하나님을 경험했던 이후로, 20년이나 지난 오늘에야 야곱은 얍복강 건너편 ‘브니엘’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만큼 깊어졌다는데 있습니다. 본문의 결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야곱이 구했던 것은 축복이었는데, 돌아온 하나님의 응답은 엉뚱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그가 얻은 것은 ‘이름’하나 뿐입니다. 

고작 이름하나 얻으려고 ‘결국 다리 저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냐?’ 고 묻고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복’을 구하려다 오히려 ‘불행’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하나님께 받은 복 보다는 다리를 저는 삶이 더 불행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런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라는 위태로운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현실과 세상이 더 확실해 보이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주 작고 하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리고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결국은 모두 그런 신세가 되고, 그렇게 죽을 겁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04

3독서 복음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오병이어’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 빌립이 우리 돈 돈 이천만원에 해당하는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요6:7)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돈이 있다고 해도 딱히 이 외딴 곳에서 헐벗은 이들을 먹일 방도가 없습니다. 현실은 터무니 없이 암담했습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어림 잡아도 만명은 훌쩍 넘을 사람들 앞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미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무얼 하시려는 걸까요? 설마 혼자서만 드시겠다는 걸까요? 제자들을 비롯한 곁에 있는 모두가 당황했을 겁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도 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자만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당장이라도 필요와 결핍으로 가득한 내 삶도 풍성하게 채워질 것만 같습니다. 또 그런식으로 믿음으로 매달리라고 채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주어 ‘아멘’이라고 외쳐도, 속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진 않을 겁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었으니 믿어야겠지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조건 믿는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마리가 마술처럼 자꾸만 늘어가는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않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는 인간의 수고 뒤에, 결실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제 힘을 자랑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차별함없이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결실하게 하시는 분이 또한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서 기자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전해주려고 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빈들에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먹었고,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는 누구도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들은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무언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 성서기자가 전하고 싶던 메시지는 이것 뿐입니다.

 

05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은 단순히 ‘이적’과 ‘기적’사건을 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술적인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성서기자의 눈에는 주님 손에 들리워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세상의 박해와 위협에 내몰린 초기 교회 공동체의 운명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자들 뿐만 아니라, 빈들에 모였던 이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권력에 의해 소외되고 멀어진 사람들, 실패하고 망한 하찮은 먹거리, 겨자씨와 누룩처럼 보잘것 없는 인생들입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운동을 열어가시는 주님이 짠해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병이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의 손에 들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초기 교회 공동체의 걸음위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천덕꾸러기 같던 그들이 박해를 피해 곳곳으로 흩어져가면서, 오히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마다 말씀이 흥왕하여 지고, 성들마다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생명의 역사가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던 그들의 걸음위에, 참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 결실로 드러났습니다. ‘오병이어’의 이 이야기는 박해의 현실을 살아가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주님손에 드려진 인생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소망의 근거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 믿으면 뭐가 달라질까요? 예수 믿음이 시련과 환란, 절망과 두려움속에서도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가는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여전히 인생을 걸고 투쟁했던 야곱이 얻은 것이 고작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뿐이라는 것이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지금껏 그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남을 속이고, 경쟁하고, 빼앗으며 치열하게 살아냈던 그였습니다. 그렇게 장자의 복을 가진 사람, 홀로 도망하던 자가 아내와 자식들의 가장이 되고, 삼촌의 재산을 취해서 이 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조차,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은 ‘나’, 무언가를 가진 ‘나’가 되려고만 했습니다. 좋은 직장, 좋은 집, 훌륭한 성도, 명예와 권력을 잃고 고스란히 남게 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야곱은 얍복강 앞에서 비로서 아무것도 걸치거나 덧붙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복이나,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며칠처럼 여기며 찾아 헤매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만나기 위해 20년을 간절하게 기다리셨던 겁니다. 

 

06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이름의 뜻을 알고 보면 이보다 큰 ‘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불러주셨다는 겁니다. 지금껏 스스로를 속이고 빼앗고 경쟁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 알고 있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빚으셨던 본래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겁니다. 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스라엘’의 이름 뜻을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본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입니다. 본래부터, 그리고 이제야 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살아내어 주시는 인생이 된 겁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 창세기 32:31

 

밤이 지세운 투쟁끝에 절뚝 거리며 돌아오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가 걷는 길 위로 아침 해가 솟아 올랐습니다. 밤새도록 그를 두려움과 절망으로 몰아넣던 모든 어둠이 떠나간 겁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둥바둥 악을 쓰며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염려할 이유도, 강요나 억압에 내몰릴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은 비록 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느냐고 손가락질하고 절뚝거리는 인생이라고 수군거려도, 이제부터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의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이스라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라면 누구에게 베풀어주시는 ‘복’,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만 주시는 ‘자녀’되는 ‘복’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오병이어’나, 영원히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상투적으로 읽거나 신앙적 수사 정도로 받아들이고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무언가를 믿게 될 겁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곳에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지난 20년간 하나님은 오직 야곱만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셨듯, 다른 무언가를 덧입고 채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 의존적 삶을 사시라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스라엘’일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그를 그렇게 불러주신 ‘하나님’때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오늘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