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3/08/20 성령강림후 열두 번째주일

ViaNegaTiva 2023. 8. 16. 15:5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45:1-15 혹은 이사야 56:1, 6 - 8

  응송 | 시편 133 

2독서 | 로마서 11:1-2a, 29-32

3독서 | 마태복음 15:(10-20) 21-28

 

# 설교음원

http://naver.me/x6AT24Pl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A5Lrqc7qC8Q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Jesus exorcising the Canaanite Woman's daughter from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 15th century.

 

하나님'선'(善)하시다

 

1.

우리는 지난 주일, ‘요셉’이라고 하는 한 개인에 일어났던 참담했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피붙이인 형제들에 의해 죽음에 내몰렸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방 땅인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곳에서도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슨 이런 인생이 있을까 싶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입니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겨야했지만, 결국 애굽의 ‘재상’이 되었다는 훈훈한 결말로 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쉽게 ‘요셉’에게 감정이입을 하곤 합니다. 아마도 어려움을 극복했던 '요셉'처럼, 자신의 삶에도 그런 날이 찾아올 것이라 바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은 ‘요셉’이 애굽에서 출세했다거나, 인생 역전했다는 식의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결말을 가져다 주셨던 하나님을 믿음으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귀하게 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창세기 45:5b

 

그 동안 참 많이도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고난 가운데 있는 어떤 이들에게 한번쯤 해주었을 법한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런 환란이나 어려움이 내 일이 되고 나 자신이 그런 상황에 떨어져있게 될 때, '요셉'의 이야기는 특별한 어떤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특별한 어떤 일이 될 뿐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는 ‘요셉’의 이야기를 매우 귀하게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요셉이 겪었던 터무니 없던 일들이 바로 자신들이 역사속에서 겪어야만 했던 피눈물나는 민족의 이야기로 여겼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입성 이후 주변 제국들에 의해 민족 전체가 말살 당할 위험을 한 두번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근근히 생명을 부지해오던 북쪽 동포들은 ‘앗수르’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기원전 587년에 이르러서는 근동의 패자 바벨론에 의해 유대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 불리웠던 유대 민족의 운명이 끝장나 버린 겁니다. 하루 아침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요셉의 운명과 똑같습니다. 도무지 이런 삶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비참하고 비루합니다. ‘야웨’ 하나님은 참된 ‘신’일까요? 하나님이 ‘창조주’가 맞다면 ‘우상’을 섬기는 이 민족에 의해 자신들이 이처럼 유린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민족의 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두 번은 몰라도 끊임없이 몰아치는 시련앞에서는 제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패망한 현실의 상황에서도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라는 치열한 신학적 반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납득할 수 없는 고난에 팽게침을 당했지만 끊임없이 하나님께 탄원하던 '욥'처럼 그들은 묻고 또 물었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얻어낸 산물이 바로 오경의 말씀들이고, 오경의 말씀이 담고 있는 핵심이 바로 요셉의 고백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3.

요셉은 자신이 지나왔던 시간을 45:8에서 또 한번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창세기 45:8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 안에는 파란만장하고 치열했던 요셉의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십대 청소년시기부터 시작되었던 환란의 시간들은 끊임없이 요셉의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이런 환란이 찾아온다면 신세한탄에 떨어지거나 자포자기할 만도 한데, '요셉'은 지나온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셨다’는 요셉의 고백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야만 했던 유대민족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요셉은 무엇을 보았길래, 그렇게 고백했을까요? 형제들에 의해 살해위협을 받았을 때,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을 때,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으로 팔렸을때, 모함을 받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런 신앙적 확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표징이나 근거가 있었을까요?

실제로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는 ‘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련’의 한 가운데 있을 때는 ‘영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이건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지금은 다 알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있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뜻하는 대로 인생이 풀리고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질 때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일이 어그러지거나 뒤틀리게 되면 이게 전혀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섭리’를 실감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일 때, 그리고 아직은 나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떨어지지 않을 때 뿐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처럼 보이곤 합니다. 갑작스레 사라지신 것처럼, 언제라도 나를 버릴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 자신에게는 '선'하시지 않다는 '불신'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고, 그 고백을 터삼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면,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선할 것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고난, 역경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의 날들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씀에 ‘아멘’이라고 응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5.

3독서인 복음서 말씀은 마가복음 7장과 평행하는 본문입니다. 귀신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주님께 찾아온 한 여인이 주님앞에 섰습니다. '마가'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했는데, ‘수로보니게’라는 말 자체가 지금의 '시리아'인 ‘수리아’와 ‘페니키아’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수리아 지방에 살던 페니키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상황은 도무지 그 동안 뵈어 왔던 자비롭고 사랑많은 그 주님이 맞으신가?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여인의 간곡한 청에도, 마치 없는 사람 대하듯 면전에서 그녀를 무시한 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곁에 있던 제자들이 겸연쩍었는지 ‘그녀를 안심시켜 보내달라’고 부탁을 드렸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냉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 24b

 

‘너는 내 양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 자식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어미에게 체면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쯤되면 못이기는 척, 그녀의 딸을 고쳐주실 법도 한데, 여전히 이어지는 주님의 답변은 뜨악하기만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 26b

 

‘개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 ‘퀴나리오이’로 말 그대로 ‘개새끼’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의미가 숨겨진 은유적 표현이 아닌 거칠고 무례한 직유적 말씀 그대로입니다. 평상시 아무리 작은 사람, 죄인일지라도 차별함없이 끌어안아주시던 모습과 달리, 단순히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처럼 대하는 무례한 행동에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6.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본문을 좀더 차분하게 읽어봐야만 할 것 같니다. 먼저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대화하고 있는 이들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어떤 이들이 있었을까요? ‘무리들’이라고 했던 제자들과 ‘가나안’ 여인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는 숨어 있는 ‘대화’ 상대가 더 있습니다. 15장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 마태복음 15:1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로 장로들의 유전을 어겼다고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두로와 시돈에 이르렀을 때, 만난 이 여인을 만나신 장면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가나안 여인’과 주고 받으셨던 이 말씀은, 사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시려고 했던 걸까요? 그들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라는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거룩한 것’과 ‘속한 것’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 8 - 9절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지만, 정작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불행한 백성들에게는 정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유대 종교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헛된 교리로 하나님을 ‘선’하지 않은 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했던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진 사회적, 혈통적 한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28b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간청을 받아주셨던 기준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 뿐만 아니라, 제자들 모두 예수님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은 출생이나, 능력, 자격이나 조건과 관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배우게 된 겁니다.

 

7.

‘섭리’를 ‘숙명주의’처럼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식이면, 일제식민 시대가 우리 민족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말도 타당할 뿐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로 팔아넘겼던 ‘유다’의 배신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했던 일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오해입니다. 오히려, 현실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언제 벼랑끝으로 내몰릴지도 모를 벼랑끝 같은 현실에 내몰리다보니,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마치 인생 다 살고 나서야 하는 느긋한 말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어둠속을 해매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 운운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섭리’는 어려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섭리 가운데 있다'는 말은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자들의 팔자좋은 소리일 뿐인 걸까요?

 

우리가 요셉이 고백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려질 내일이 우리 자신에게 '해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길들여지다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하는 영성의 빈곤함에 떨어진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내몰려 있는 현실 뿐만 아니라 문제라고 여겼던 것들이 다 해결되고, 모든 것들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불현듯 찾아오는 허무와 절망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이 절망에 떨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떨어졌을 때는 요셉처럼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인생을 거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평화를 파괴하는 악한 질서와 투쟁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처음을 열고 그문을 닫을 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 한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운명과 우리 자신의 인생 전체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온갖 시련과 불의와 악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오히려 그런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 뿐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삶이 갈리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