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3 성령강림후 열네 번째 주일
#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출애굽기 3:1-15 혹은 예레미야 15:15~21
응송 | 시편 105:1-6, 23-26, 45c 혹은 시편 26:1~8
2독서 | 로마서 12:9-21
3독서 | 마태복음 16:21-28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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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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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로, 물러가라 (ὀπίσω μου)
1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을 만날 때 사람들의 얼굴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퍼집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친절하고 마음을 상하게 만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손해를 끼치는 이들을 어쩌다가라도 마주하게 된다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도 마음이 불편한 것 까지는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성도’의 도리를 이야기하면서, 원수 갚음의 문제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악’을 ‘선’으로 갚아주는 것은 우리 본성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한번 큰 맘먹고 ‘선’으로 대하려고 해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상대방을 보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같아 마음이 이만 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을 ‘선’으로 갚거나,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누구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자신을 훈련한다고, 해도 결국은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2
1독서 선택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원전 626년 터무니 없는 폭력적인 역사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대제국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그의 가슴은 미어지고, 눈은 눈물로 가득찼습니다. 그의 외침을 듣고 있노라면 억울함과 답답함, 안타까움에 숨이 막힐 것만 같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시니, 저를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십시오.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진노를 오래 참으시다가 그만, 저를 잡혀 죽게 하시는 일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 때문에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아 주십시오.’ | 예레미야 15:15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 예레미야 15:18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보냄을 받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 백성이 이렇게 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들에 의해 민족이 찢겨지는 이런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이 불신과 불의함으로 떨어진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심판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지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홀로 괴롭습니다. 이런 포악한 현실앞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운명을 건다는 것은 그런 상황에 떨어지지 않고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식의 말씀은 늘상 ‘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닌, ‘악’에 의해 박해받고 고난과 환란에 떨어진 이들에게만 요구됩니다. ‘악’을 행한 이들은 늘 그대로입니다. ‘왜 우리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억울함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리고 그때, 더큰 ‘악’으로 ‘악’을 갚아주라는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3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걸었고, 이를 기화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1903년 조선에 첫발을 내딛고 13년이 되던 해,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과 성도들 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이것이 한국 최초 부흥운동인 원산집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 역사의 기억 때문인지, 어떻게 해서든 ‘말씀대로 살아보자’, ‘믿음대로 살아보자’고 열심운동, 경건훈련, 갱신과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몇주년이라는 표어를 걸고 각성운동, 부흥운동이 연례 행사처럼 치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개혁과 갱신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란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걸까요?
우리는 여전히 ‘복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회사 안에서 일어났던 개혁이나 부흥운동은 누군가 혹은 교단이나 교회가 주체가 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하자’거나 ‘~하지 말자’는 식의 행동주의도, ‘더 좋은 성도’가 되자거나,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자’는 식의 구호도 아니었습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났던 개혁과 부흥은 언제나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말씀’이 무엇인가? ‘구원’은 무엇이고, ‘믿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고 하는 치열한 신학적 투쟁으로 내몰았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덮어 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 사도의 고백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바르게 읽고 깨닫는 것,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근거를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고 하는 본질적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능력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4
과연, 오늘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입만 열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리고, 하나같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관해서,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뿐,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만 합니다. 종말에 드러날 하나님의 나라인 생명, 정의, 평화에는 심드렁하지만, 치유나 축복, 성공에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인류의 지식 모두를 담아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맛보았던 기쁨이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비할 수 없으며,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 나라’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안에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꿈만 같은 나라이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날마다 더 새롭고, 날마다 더 기쁘고, 날마다 더 희망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노화된 피부가 벗겨나가고 여린 살이 돋아나듯, ‘살아있음’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새로움’이야 말로 ‘생명’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생명’되시는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다보면 영적 세계를 들여다 보는 눈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해도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물론, 새로움을 잃어버린 곳에 남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을 절대화하는 일 뿐입니다.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은 사라지고, 어떻게 지키고 얼마나 잘해 낼 것인지와 같은 ‘규율’과 ‘규범’만 남게 되는 겁니다. 늘 똑같고, 달라질 것이 없고, 새로움이 없고, 가슴 뛰는 기쁨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세련된 신앙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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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라’, ‘~하지 마라’는 식의 규범윤리는 결국 언제나 ‘거룩해라’, ‘성도다워져라’, ‘주일 성수해라’는 식으로 표출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왜?라고 이유도 모른채, 덮어놓고 지켜내야한다는 조급함에 내몰릴 뿐입니다. 예배의 희열, 기도의 감격은 먼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자 이제, 앞서 던졌던 물음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바울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악’에 의해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선’을 행함으로 함께 기뻐하는 성도의 삶 말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가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늘 이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삶의 방향을 정한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재림의 날 마주하게 될, 주의 나라와 주의 뜻을 위하여 인생을 걸며 살아가는 이들, 삶의 방향 자체가 전도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가지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을 만큼 주님의 나라를 향해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그럴 만큼 주님을 충만하게 경험하고는 있는 걸까요? 주님으로 인해 압도되어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악에게 지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선을 행할까?라는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대단히 신앙적으로 들리지만, 여전히 ‘내가 어떻게?’라고 하는 ‘나의 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놓친채 말입니다. 이건 마치 수영을 하기 위해 먼저 ‘물’이라는 것이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뜨게 하는 것임을 몸으로 경험하기 전에, 물장구치는 훈련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앞에 계신 주님이 누구이신지, 나는 그분앞에 어떤 존재인와 같은 ‘주님과의 관계성’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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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 인정받았던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바로 다음 순간 사도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 사탄이라고 불리우는 자리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이 베드로의 실족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넘어졌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예수를 따르는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도 넘어졌으니 우리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 ‘과연 내게 믿음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형편없는 상황으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늠름했지만 내일은 어둠앞에서 주눅들고, 악에게 무너지는 것이 우리 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중욯나 것은, 실족한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태복음 16:23b
‘베드로’는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하지만, 헬라어 ‘오피소 무’라고 하는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어디로든 꺼지라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의 뒤편’으로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뒤편’이야 말로 ‘베드로’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씀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오피소 무’는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고 하셨던 말씀과 바로 그 말씀과 동일합니다. (마4:19) 그러니 지금 이 말씀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시켜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비로서 예수 따름의 공동체가 있어야 하는 곳이 ‘예수님의 뒤’이고, 그것이야 말로 예수를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 거창하게 준비하고, 해내고, 이루고, 이끌고, 모시고 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주님 앞에 서고 보면, 서슬퍼런 죽음만 보이는 ‘십자가’는 피해가야 하고 ‘영광’을 얻기 위해 ‘자기 업적’, ‘자기의’를 쌓아야 한다는 유혹에는 쉽게 떨어집니다. 베드로가 넘어졌던 ‘사람의 일’에 사로잡히고 만 겁니다. 하지만, 앞서 가신 주님은 오롯이 ‘십자가’를 향하실 수 있었습니다. 앞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죽음도 헤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따르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뒤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위치가 뒤바뀌는 순간 곧장 길을 잃고 천길 밑으로 떨어지고 말겁니다. 물론 고통, 환란, 어려움, 시험과 연단이 일어나길 부러 바랄 사람은 없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멈춘다면 ‘사람의 일’이 되고 맙니다. 우리 눈에는 여전히 ‘악’을 ‘선’으로 이겨내는 길, ‘죄’와 ‘죽음’을 ‘생명’으로 이겨내는 길은 보이지 않고, 그렇게 해낼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모든 어둠과 악,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을 무너트리며 ‘생명’을 일구어내신 ‘주님’을 따르며 가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해도,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주님 오실 길을 그럴듯하게 준비할 능력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능력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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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더 큰 ‘악’으로 갚아주어야만 하는 본능의 덫에서 벗어나,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넉넉하고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는 길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1독서 출애굽기 본문은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40년간 미디안 광야를 헤매이던 모세는 어느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연 발화는 건조하고 무더운 광야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불은 붙었지만 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유심히 살펴보기 위해 떨기나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 출애굽기 3:4a
바로 그 때, 고향집 싸리문 열고 들어오는 자식 발걸음 소리에 뛰쳐나가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아 나오고 있는 모세를 찾아 강림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뒤’에 머무는 것과 같은 곳에 서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만 보며 따르는 관계성안에 들어갈 때, 비로서 우리는 모세에게 주셨던 ‘구원’의 이름과 만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 출애굽기 3: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