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0 성령강림후 열 다섯 번째 주일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12:1-14 혹은예레미야 15:15 - 21
응송 | 시편 149
2독서 | 로마서 13:8-14
3독서 | 마태복음 18:15-20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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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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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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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격변하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네 선배들은 누구나 두 가지 선택지를 받가지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인지, 아니면 시대를 받아들이고 타협하고 변절하며 살 것인지 입니다. 해방이 된 이후, ‘목숨’을 걸고 조국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분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역사속에서 잊혀진 대신, 변절했던 친일 세력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한 채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한번 잘 못 꿴 단추는 좀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 왜곡된 역사는 지금도 거짓과 기민이 진실이 되고, 배신과 변절을 선택해도 정의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저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타락한 가치를 고스란히 후대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처럼 비겁하고 비열함에도 대체 무엇이 어떤 이들로 하여금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가게 만들었던 걸까요? 그런 이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의 날이 오고 있음을 내다 보기라도 했던 걸까요? 이 물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도 현실앞에서 ‘대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내실까’와 같은 똑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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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구약 이야기는 먼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재상까지 지냈던 요셉은 죽어서라도 그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제국 애굽을 지키고 작동시켜야 할 훌륭한 노동력 자원이었고, 그러니 애굽 왕 ‘바로’와 그들의 제국이 놓아줄리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신 이후에야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됩니다. 아홉 번째 재앙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바로를 무릎 꿇게 만든 마지막 재앙은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들 모두에게 내린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에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애굽인’들이 아니라, ‘애굽 땅’을 향한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 땅’에 있는 것이라면 무차별적으로 임하는 재앙이었기에,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준비를 시키셨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는 말 그대로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없던 일이 아니라, '나'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것이 전제되는 겁니다. 간단히 유월절 예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유대력으로 한해의 첫 달인 니산 월 열번째 날에 모든 이스라엘은 가정마다 ‘어린 양’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사흘 뒤인 니산 월 십사일 저녁에 미리 준비했던 그 양을 잡아, 피는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잡은 고기는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피를 바르는 이유는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한 표식입니다. 먹을 때도 지켜야할 것이 있는데,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만 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을 예비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날을 영원한 규례로 삼으라고 명령하셨고, 지금도 이스라엘 모든 민족은 매년 니산 월 14일 저녁이되면 양과 빵, 포도주를 마시며 ‘유월절’을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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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는 걸까요? 삼천 오백년 전 ‘유월절’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조상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 명령’으로 믿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월절’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의 피를 바른 곳만 죽음이 피해갔다는 ‘유월절’이야기는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라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과학이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불과 몇년전 ‘유월절’의 사건의 실체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죽음’을 감당할 수 없어 시체들을 폐기하던 끔찍한 광경말입니다. 끝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하루 아침에 도시는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강대국이라 불리우는 나라들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애굽 땅에 마지막 재앙이 내려졌던 그 다음 날 아침도 이와 같았을 겁니다. 그러니 처음 난 모든 것의 떼죽음, 말 그대로 대 제국 ‘애굽’의 현실은 지옥과 같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은 군사력, 경제력같은 제국을 상징하는 것들에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일, 미래와 운명 전체를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음에 사로잡힌 채 그런 힘들을 얻으려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얻고 누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신의 제국 애굽과 신의 화신인 ‘바로’가 처절하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유월절’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이스라엘은 ‘역사’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트리기도 하는 힘은 제국이나 제국의 우상들보다 더 강력한 존재에 의해서라는 역사 너머를 꿰뚫어 보는 통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았던 ‘능력’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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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답변해보십시오. 첫번째는 하나님은 왜 애굽을 치셨을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눈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가시는 방식은 어떤 식으로 비췄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 그러니까 뒤집어 말해서 ‘애굽’을 치신 까닭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어서, 자기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애굽을 진멸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대목들이 훨씬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바로’와 그의 제국인 애굽이 심판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참된 ‘신’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신을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모든 권력과 문명을 거절하시는 배타적인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셔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첫번째 ‘유월절’ 그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제국의 우상은, 이스라엘이 자리잡은 ‘가나안’ 땅에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우상’이라는 것은 애굽 왕 ‘바로’가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모든 시도와 그렇게 만드는 모든 힘이기 때문입니다. ‘절대화’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받지 않고, ‘경쟁’에 내몰리지 않으려는 시도입니다. 인간 문명의 방향은 자신을 신성화하려는 쪽으로만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은 거대한 피라밋을 쌓아 올리고, 미라를 만들어 불사가 되고자 하는 무한 경쟁, 성공신화, 내새끼만 귀하다 여기는 이기주의와 갑질로 이어지는 천박함 뿐입니다. 이런 사회안에는 ‘나’이외 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예처럼 도구와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만 절대화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애굽의 신의 또다른 이름들인 겁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안에도 ‘우상’은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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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몇장의 성경 말씀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를 읽고 있지만, 실제로 사백오십년 간 애굽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보이지 않는 아득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다 끝났다고 체념하고 절망하던 어느 날,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고 애굽을 치셨으며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른 것처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구원’이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찾아오는 ‘우연’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 말하는 ‘우연성’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고유한 능력, 고유한 방식으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요구하고 강화해갑니다. 그러다 결국은 그런 방식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즈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불신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아시다시피 그는 인간의 ‘의’에 천착했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를 쌓아 올리기를 강요하는 율법의 절대적 기준은, 부담감과 죄책감이라는 짐만 짊어지울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을 다 성취하고 지켜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건 당연한 겁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의로움’과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전적인 은총 사건이라는 것과, 이런 고유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유대인들이 꺼리고 이방인들이 미련하게 여기던 예수의 십자가안에서 발견했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 누구도 예상할 수 없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심판이며 구원의 능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로움’을 추구하던 삶의 방향 전체를 바꿀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기대마져 뛰어넘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10절
바울이 말한 ‘사랑’을 휴머니즘이나 동포애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또 다시 ‘사랑’을 흉내내려는 율법주의와 가식으로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방식이며, 임재의 현현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만이 모든 율법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인 겁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온전한 ‘사랑’의 역사안으로 초대를 받았으니 이보다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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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이야기는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라던 지난 주 바울 사도의 이야기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주님의 말씀은 야박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도 해도 듣지 않거든 결국 내치라는 것처럼 들리니, 결국 주님도 한 사람 보다는 공동체를 지키는 편을 선택하시는 것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렇게 읽어서는 곤라합니다. 정작 주님의 말씀을 기록해 전하고 있는 ‘마태’ 자신도 ‘세리’였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은 채 ‘세리’를 더러운 어떤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이라면, 이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입니다.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지운 채, 독립 운동했던 분들을 핍박하고 모욕하는 오늘 어떤 이들의 모습 같아 보입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아마도 처음 주님과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을 겁니다. 유대 동포들이 더러운 죄인, 변절자라고 비난하던 자신을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주셨던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높은 담벼락 밖으로 내몰렸던 자신과 평화를 이루어주셨던 것은 주님 뿐이었습니다. 자, 다시 본문을 읽어볼까요?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 17b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앞에 ‘주님께서 세리였던 ‘나’를 대하셨던 것처럼’이라고 하는 말씀 한구절이 생략되어 있던 겁니다. 주님은 마태 뿐만 아니라, 늘 그런 이들을 찾아가셨고, 그런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책망하고 꾸짖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만 사람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마태 본인이 그 사실의 증인인 셈입니다.
바로 뒤인 18절에는 지난 성령강림후 13주에 읽었던 마태복음 16장 19절의 말씀이 다시한번 언급됩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18b
비로서 땅에서 매고 풀어야 할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하늘’이 아니라, ‘땅’의 일 뿐입니다. 땅에서 마땅히 해야할 일에 눈길 조차 주지 않으면서, ‘하늘’ 운운하던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단박에 하늘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땅’에서 억울하고 속상한 삶에 매인 이들을 풀어주는 것 뿐입니다. 슬프거나 괴롭다고 피해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해서도 않됩니다. 어떻게?라고 묻는 대신, 눈물이 나더라도 가야할 길은 가야만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 20절
그런 이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주님도 그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어느날 마주치는 ’우연’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하늘위에서 ‘필연’으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야 말로 땅에 매인 것을 풀어내고 풀린 것을 매어주는 최선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