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5 성령강림후 스무번째 주일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32:1-14 혹은 이사야45:1 - 7
응송 | 시편 106:1-6, 19-23
2독서 | 빌립보서 4:1-9
3독서 | 마태복음 22:1-14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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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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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
1
오늘 1독서 구약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뜨악한 불신의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온갖 은혜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던졌던 바울의 외침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갈1:6
믿음안에 든든히 서지 못하고, 신앙에 불성실하며, 배신으로 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한심하고, 그런 이들을 믿음의 본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닮아 있는 탓에, 이스라엘의 연약함이 안쓰러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지나고 나면 마실 물이나 먹을 것이 다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른지 운명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이 곳곳마다 도사리고 있는 힘겹고 위태로운 여정을 그들은 계속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위로 올라간다고 했던 지도자 모세는 감감 무소식입니다. 지도자는 실종되었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불안은 어느새 두려움의 광기가 되어 군중을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흉측한 ‘우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는 그들의 외침속에서, 그들이 다른 신을 믿겠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라고 선포한 것을 보아도, 그저 자신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필요로 했던 것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건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엄하게 고발합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십계명 제2계명을 어긴 겁니다.
2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다른 신’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형상화’하는 것에 있는 겁니다. 왜 성경은 이런 것을 하나님을 불신하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리고 왜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유혹에 떨어지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늘상 모든 것을 눈으로 발견하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하다못해 ‘사랑’조차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말’ 보다는 눈에 보이는 ‘예물’이라든가 ‘예식’을 통해, ‘서약’의 확실성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의 본성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놀라운 방식으로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고 스팩타클한 사건과 장면에만 시선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을 그런 방식으로 보고 싶어하고, 그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읽게 되는 수 많은 기적과 구원은 사실 성서기자들의 영적 감수성과 통찰에 의해 포착되고 발견된 사건들일 뿐입니다. 출애굽기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현실만 보고 있지만, ‘모세’만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광야는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어 죽게 생긴 현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로 보였습니다. 쉽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제 곧 추수감사절이 다가옵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11월 19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절을 맞으며 한해의 모든 삶이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은혜라고 말하는 것들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우연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이시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방식로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도 눈으로 보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드러난다면 우리가 불안이나 염려에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바람이 지나고 난 이후에야 ‘바람’이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난 이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을 실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실 생명에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것들은 다 이런 식입니다. 공기나 햇볕은 물론이고, 하루 하루 성장해가는 것도 그렇고 살아 있음이라던가, 영생이나 천국도 성령도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이걸 눈으로 보려고 하니 답답하고 문제가 되는 겁니다.
3
복음서 말씀의 분위기는 1독서 본문과 비교적 비슷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장로들과 바리새파 사람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전해주고 계십니다. 이 비유는 ‘천국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같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혼인 잔치가 아니라, 혼인 잔치를 베푸는 ‘임금’에 있는 겁니다.
임금이 베푼 잔치이니 아무나 초청을 받을리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왕의 초청을 받았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들은 시쿤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을 하러 갔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한 왕이 군대를 보내 자신을 무시한 이들을 진멸했다는 참혹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지난 주일 말씀과 이어져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일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만 다를 뿐, 잔치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에서 동일합니다. 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교 엘리트집단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했다는 차원에서 오늘 임금의 잔치를 거절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이유는 거창한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보면 그 원인은 밭일, 사업, 바쁜 일상들입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다시금 ‘아니, 어떻게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할 수 있고, 예수님을 거절할 수 있는 것’ 답답하게만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결코 쓸모 없거나 작은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런 일들로 가득차 있고, 이런 일들이 결국 우리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일은 쓸모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보다 더 중요한 사건 앞에 있다는 것을 가리키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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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분명 우리들 자신을 위해 주어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읽을 때면 우리의 본능은 나 자신은 이미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초대를 거부했던 이들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려 듭니다.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모습에서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겠다고 부추기거나, 혹시 나도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말씀을 완전히 그릇되게 읽은 겁니다. 애당초 이들은 잔치에 초대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 마 22:10
그러니 나는 저 만큼 부자도 아니고, 어떤 사람처럼 세련되지도 않았고, 신앙생활도 오래하지 않았으며 그닥 선하지 못하다고 주눅들지 마십시오.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가두고 박해하는 임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열심히 살아내야만 하겠다고 조급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성실하게 준비한다거나, 더 열심히, 더 근면히 그리고 더 착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복’은 말 그대로, 잔치에 걸맞는 ‘옷’입니다. 잔치에 부름을 받고 평상시에 입던 옷 대신에 예복으로 갈아 입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했던 걸까요? 이 비유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참여해야할 잔치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잔치에 참여할 것을 초청받았지만 거절했던 사람들이나, 예복을 갖추지 못해 쫓겨난 사람들이나 똑같습니다. 자신들이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이, 누구에 의해 초대받은 것인지, 잔치는 또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임금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참여하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마땅히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왕이 초대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왕의 배타적인 선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이라든지, 절대적인 것은 실종되어버렸습니다. 모든 것들이 해도 그만 않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멀찌감치 계셔서 복을 내려주시고, 위태로울 때 구원하시며, 천국에서 뵈는 분으로 계셔야 합니다. 일상의 선택과 살아가는 일에 ‘~하라'와 ‘~하지 마라’는 순종을 강요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겐 귀찮은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직장도 다니고,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잔치에 가지 않아도 여전히 할 일이 많고 기쁜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잔치에 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된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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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있지만,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전능하시지도 않고, 충만하시지도 않은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시다거나, 부족함이 없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에게 바라시는 것은 물과 공기, 햇볕과 모든 것을 주시는 이유안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서 죽음의 위협에 무너지거나 흔들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업적을 쌓고, 선행을 쌓거나 깨달음이 있어야 닿을 수 있는 이교도들의 천국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와 안식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평화와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며,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지, 왜 그리스도안에만 구원과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실감하지를 못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 공동체라고 하지만, 정작 실질적으로 그 나라가 무엇인지, 어떻게 경험하는 것인지 막연하게 여깁니다. ‘성령’은 어떤 기운이나 현상이 아닌 삼위의 하나님이시라고 알고는 있지만, ‘성령’이 어떤 분인지, 어떤 것이 성령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할 뿐입니다. 막연하니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루해지고 타성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무언가 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관심이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살이는 느긋하게 걸어갈 수 없을 것처럼 대단히 거칠고 매섭기만 합니다. 그러니 잔치의 기쁨과 평화보다는 거기에서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어떻게 잔치에 들어갈 것인지, 어떻게 해야 쫓겨나지 않을 것인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만 일어날 뿐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일도,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고, 그것을 삼키고, 소화해내고 그것을 양분삼아 내 몸이 또 다른 나로 변화되어 가는 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대화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중력을 거스르는 경험도, 어느새 초록의 옷을 벗고 붉게 물들어가는 꽃들을 보는 것도, 맑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나게 되는 일까지도, 피조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일상의 삶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을지,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지, 성령의 숨을 들이마시고 지쳐버린 영혼이 살아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 평화를 누릴 것인지에 우리는 도무지 간절하지도 갈급해하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환산되는 감각과 쾌락에 길들여지다보니, 다함이 없는 사랑안에서 평화를 맛보는 감각을 몽땅 잃어버린 탓입니다. 가치를 모르니 생명을 찾지 않게 되고, 찾지 않으니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으면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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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 사도는 서신서 말씀을 통해 ‘빌립보’교우들에게 딱 한가지 권면을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 빌립보서 4:4
‘항상 기뻐하라’는 그의 말은 기쁘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기뻐하는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개발서 정도로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물론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삶을 증진시키고 대견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는 삶의 위기와 절망앞에서 영혼을 구원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도 감옥에 있는 형편이면서도, 바울 사도가 상심에 떨어져있던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뻐하라’고 단언할 수 있던 근거와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안에서’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 있다는 기쁨 때문에 살았고, 그 기쁨을 얻기 위해 또한 달려갔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분안에, 또한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산위에서 내려왔던 모세는 주님께 받은 돌판을 집어 던질만큼 산밑에서 벌어진 상황에 분노했습니다. 토악질이 날만큼 역겨운 현실이 펼쳐져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이런 상황에,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과분합니다.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영원한 유산으로 주시기 위해 초대하시고 구원해내시고 오늘도 이 지경으로 떨어지고만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원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 상황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종말의 날까지 이 약속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