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3/10/29 성령강림후 스물 두 번째 주일

ViaNegaTiva 2023. 10. 27. 19:1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신명기34:1-12 혹은 레위기 19:1-2, 15-18

  응송 | 시편 90:1-6, 13-17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2:1-8

3독서 | 마태복음 22:34-4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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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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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1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만큼 깊어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평상시에 여러분은 어떤 기준을 통해 자신과 타인들의 신앙을 엿보고 계신가요? 신비로운 방언이나, 은사와 같은 능력들, 고매한 인격이나 이루어낸 업적들까지 다양한 기준들을 가지고 계실겁니다. 결국 ‘신앙의 깊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친밀해지고 깊어져간다는 것을 뜻할 겁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한번 바꿔보겠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함의 정도는 어떤 식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람은 ‘말’을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물론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동물들 사이에도 정보를 전달하는 말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의 그것과는 복잡성이나 정도가 비할 바가 아닐 겁니다. ‘말’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너머, 사람과의 사이와 관계를 잇는 다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관계는 이어지지 못하고 깨지기 일쑤입니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록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소통의 단계를 너머 점점 익숙해지고 더 깊어지는 수준이 되면, 그때부터는 ‘말’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한 평생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들리지 않는 말을 듣습니다. 낯빛만 보아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눈물’과 ‘울음’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진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이전에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장면이고, 맛보지 못했던 냄새,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 닿아보지 못했던 깨달음,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건이며, 채워진 적 없는 ‘기쁨’처럼, 보이지 않는 아득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간다는 것은 ‘언어’나 ‘말’의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험해 본적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정보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고, 그러니 굳이 표현해 내려고 애쓰지 않을 수 밖에요.

 

서화가이며 사회운동가였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평생 단 한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던 ‘노자’의 말처럼, 진리란 말로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인 ‘성화’로 나아가는 길도 ‘언어’로는 담아 낼 수 없습니다. ‘말’이 아닌 ‘몸’으로, ‘말’의 성찬이 아닌 하루의 ‘삶’으로만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고, 고백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경험한다는 것도, 그 동안의 우리의 시선과 말을 모두 빼앗기는 사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전의 보던 것이 별볼일 없고, 이전에 듣던 것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만 보려하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예수를 보는 눈이 열리고, 말씀을 듣는 귀가 트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눈을 감게 되고 입을 닫게 됩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은 간절함으로 소란함에서 떠나 마음과 영혼을 예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하는 사건’의 핵심은 ‘말 없음’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제 1독서 구약본문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가나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모세의 여정은 끝이 납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던 그 였지만, 정작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과 책임에 관해서 성경은 서로 다른 두개의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므리바’에서 불신으로 떨어진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로, 바위를 두번이나 쳤던 모세의 불순종과 혈기가 원인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4장은 오히려 이 모든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 때문에 나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기로 하신 그 아름다운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 신명기 4:21

 

신명기 기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가나안’ 입구에서 멈추게 된 모세의 죽음은 억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광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모세’를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했으며(10), 큰 권능을 보이며 놀라운 일을 했던 지도자(12)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아무리 영웅적이고 신실했다고 해도 ‘인물’이나 ‘민족’에게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출애굽기 34:6 

 

지도자 ‘모세’가 죽었고, 그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지도자 모세, 수백만의 민중이 불신으로 떨어지던 그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믿음’의 사람, 위험이 도사리는 가나안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모세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돌아서야 합니다. 게다가 모세의 죽음을 등지고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의 운명을 신명기 기자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울 것이니,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는 땅에서 반드시 곧 멸망할 것입니다.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 신명기 4:26

 

‘모세’가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얻게 될 땅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망할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돌아선 모세야 말로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 다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과 같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운 기준에 따르셔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크게 뜨고 보시고, 귀를 활짝 열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지금 말씀은 ‘모세’가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시간을 가로질러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으로 건너뛰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약의 교회 역사안에서 사도 바울이 언제나 환영받고 존중받았던 ‘리더’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닥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던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는 AD 70년 경 ‘유대-로마 전쟁’ 전까지만 해도,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보니 그들의 신앙안에는 여전히 율법의 ‘행함'과 믿음으로 얻는 ‘의’가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믿음으로’얻게 되는 ‘의로움’만이 ‘구원’의 핵심으로 붙들었습니다. 갈라디아 2장,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장면은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투쟁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타협하지 않던 바울의 강직함 탓에, 그는 유대교와 유대교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안팎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바울을 공격하던 이들은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뵌 적도 없을 뿐더러,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니 이런 공격은 가벼이 넘길 수준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도성을 변증하고 입증해야만 했고, 오늘 서신서 본문도 그런 차원에서 씌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동안 복음을 전할 때,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 속임수(3), 아첨하는 말, 탐욕(5)으로 한적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근거입니다.(8) 대단한 사명감이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문제는 그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거나, 땅끝까지 가겠다’는 분들도 있고, 24시간 365일 예배하며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분들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거룩해 보이고, 교회에 끼친 영향력과 남다른 업적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일 때가 많고, 알고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반대로 별 볼일 없다고 무시하고 은근히 깔보았는데, 알고 보니 더 없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서 부끄러워할 때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는 누가 참된 목자인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아첨을 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과 거짓, 복음을 위함인지 탐욕인지는, 때가 되어 열리는 열매를 통해 어떤 나무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신앙의 결과로 드러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백을 증언해 주실 것(5b)이라는 말이 그런 겁니다. 때가 이르기도 전에 열매나 과실을 맺어보겠다고 애쓰는 것은, 아무리 열심을 다하고 노력해도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2:4b

 

바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의 기쁨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사람 마음을 얻으려고 마음을 쏟고, 노력하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탓에 결실을 얻고 싶어하는 조급함에 내몰리다보면 영낙없이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아첨이나, 탐심, 허망한 일에 떨어질 뿐입니다. 

 

4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복음서 말씀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오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능통하고 박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율법교사 한명을 내세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말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들었습니다. 과연 이 논쟁의 승리자는 누구일까요?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 마태복음 22:46

 

복음서 기자에 따르면, 결국 바리새파 사람들도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예수님 앞에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과 실재 역사는 정반대였습니다. 논쟁의 승리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들에 의해 모함을 당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조차, 예수께서 십자가로 내몰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좇다가 사람의 마음을 잃은 분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얼마나 큰 소리를 쳤을까요? 역시 자신들 외에 하나님 말씀에 정통한 이들은 없다고 으쓱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서 기자가 전한 결론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능력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내셨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 사실을 경험하고 깨닫게된 겁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리스도 사건’앞에서는, 유대인의 의로움도, 로마의 영광도 헛된 것일 뿐이며, 예수의 ‘부활’앞에서는 ‘생명’인 것처럼 행세하던 모든 거짓들은 무너지고 말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통해 으스대던 이들은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수 밖에요.

‘부활’은 말과 이론이 아닌, 충만한 생명의 경험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맛보고 실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경험인 겁니다.

스멀스멀 두려움과 불안이 올라올 때, 마음은 온통 어지럽고 소란스러워질 뿐입니다. 불안과 염려, 무력함과 절망으로 몰아넣는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은 한가지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안에서 행하신 구원 사건에 영혼을 집중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알아가십시오. 불안한 삶, 박해와 고난, 오해와 의심이 가득한 세상을 뚫고 나갈 영적인 힘을 얻는 길은 이것 뿐입니다. 어떤 열매를 맺고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생각일랑 버리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살전2:12) 우리는 이 사실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