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3/11/05 성령강림후 스물 세 번째 주일

ViaNegaTiva 2023. 11. 2. 08:3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여호수아 3:7-17 혹은 미가 3:5~12

  응송 | 시편 107:1-7, 33-37 혹은 시편 43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2:9-13

3독서 | 마태복음 23:1-12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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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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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쟈민 웨스트, ‘Joshua Passing the Jordan'

하나님함께 하신다면 !

 

1

우리는 오늘 폭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시대의 아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곳곳마다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갈등과 분쟁도 멈추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해 매년 마주하게 되는 기후 변화는 더 이상의 환경 파괴를 멈추지 않으면 결국 인류의 종말이 현실이 되고 말 것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소망’보다는 ‘절망’이 더 익숙할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세상은 우리를 향해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곤란한 질문이라고 애써 외면하거나, ‘우리는 괜찮다’는 덧없는 구호만 교회 안에서 외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거창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정작 우리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이 물음은 하루 세끼의 밥, 매서운 겨울을 피할 수 있는 집 한칸,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랑, 그리고 내일에 대한 염려 없이 잠들 수 있는 여유 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에게 만큼은, 삶과 죽음의 선택을 가늠하게 할 만큼 절체절명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처한 상황과 정도만 다를 뿐 우리 안에서도 이 물음은 계속있었습니다. 다만 끊질기게 붙들고 씨름한 적이 없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경우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두려웠던 탓에, 우리는 그럴싸한 믿음으로 절망과 체념을 감추기에 급급했는지도 모릅니다.

 

2

1독서 여호수아서 본문은 그런 차원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의 리더쉽이 ‘모세’로부터 젊은 ‘여호수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과연 그에게 민족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있는지를 입증해야할 부담은 고스란히 여호수아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때마침 자신을 입증해야하는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가나안’ 목전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행렬이 멈추었습니다. 때마침 불어난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던 탓입니다. 본문은 요단강가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전합니다. 어린 아이와 노인들까지 수백만을 이끌고 불어오른 강을 건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낭패입니다. 전임 지도자였던 ‘모세’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이던가, 아니면 쉽게 건널 수 있는 야트막한 곳이라도 찾아내어 인도하지 못한다면, 여호수아의 리더쉽을 의심하는 백성들이 곧장 불평과 불만을 쏟아낼 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전에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이들은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며 ‘요단’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물이 좌우로 갈라졌는데, 이번에는 위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모세와 여호수아의 능력의 차이를 말한다거나, 이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아닌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본문의 핵심이 ‘기적’을 소개하는데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내가 너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고,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 | 여호수아 3:7b

 

오늘 사건은 말그대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서기자가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많이 경험하고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보아왔고, 기대했고, 믿어온 탓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에 길들여지게 되면, 이런 경험을 했고 저런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었다는 자기 만족만 남을 뿐,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는 멀어질 위험이 더 큽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어느 한순간 무력감과 불신으로 떨어지고 마는 우리 자신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다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저런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 되고 마는 셈입니다.

 

3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고, 또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말은,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과 폭력이 이처럼 넘쳐나는 세상안에서 지금도 우리가 살아있고, 온 땅에 생명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과 영혼 뿐만 아니라 삶 가운데 풍성한 ‘생명’이 경험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명’을 경험하고 실감하시나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 따라,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가 결정될 겁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다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 아래에 있으며, 결국 죽음에 삼켜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인간이 결국 죽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지만, 내가 죽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사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잊기도 하고,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영향력을 없는 척할 도리는 없습니다. 애당초 ‘죽음’은 우리가 거절 할수도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그런 죽음안에 있기 때문에 불안, 초조, 조급함, 막연함, 염려, 근심, 절망, 분노, 두려움, 인정받고 성공해서 살아나야 한다는 욕망처럼, ‘죽음’이 가져다주는 증상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어떤 인간도 죽음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증상은 모든 인류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치의 병과도 같습니다. 이런 병에서 고침을 받고 벗어나기 위한 길은, 한가지 뿐입니다. ‘생명’을 찾고, 그 ‘생명’안에 거하는 길 뿐입니다. 어둠은 빛의 결핍일 뿐만 아니라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충분하고 충만한 것처럼, 생명이 있는 한 ‘죽음’과 ‘죽음’이 초래하는 모든 힘은 벗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계시나요? 과연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생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다가 갈라지고 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 생명이 아닌 현상에만 목말라 할 뿐입니다. 

 

4

복음서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자리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을 비난하신 까닭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짊어지운다는 것,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손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 윗자리,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사람들로부터 먼저 인사를 받거나, ‘랍비’라고 불리우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잘난 체 하는 오만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씀을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 마태복음 23:8

 

8절부터 12절까지 그런 이들을 본받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은, 정확히 제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노파심에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말씀안에서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꾸짖음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그러고보니 우리는 한번도 우리 자신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같은 부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다시 읽어보아도 ‘지기도 힘든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제일 위태로운 것은 저와 같은 ‘설교자’라는 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정작 자신은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한 채, 늘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낮아지라, 섬기라, 사랑하라, 복음에 사로잡히라고 말만 하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들을까,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남들에게 보이는 것만을 신경쓰다보니, 정작 자기 자신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께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 목사의 한계이고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하기보다는 말씀안에서 먼저 은혜 받고, 권면하기 전에 그런 말씀을 주신 은혜를 경험하고, 이렇게 살으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살고, 감동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려고 예수 사건에 마음을 묶으려고 애를 쓰고, 그 일을 구하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의 목회는 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씀드리곤 하는 겁니다.

 

5

바울은 이런 저에게 언제나 큰 귀감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도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거짓된 전도자들과 달리, 복음을 전하면서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아첨하는 말을 한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바울의 권위는 늘 도전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찾아와 모함과 훼방을 합니다. 소아시아에서의 그의 목회자로서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마치 내일을 염려해야하는 작은 교회 목회자가 교회 성장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다해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2:12

 

그가 이렇게 힘차게 말할 수 있던 근거는, 그 자신이야 말로 ‘그의 나라와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고,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려면 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성도가 해야할 모든 일은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에게 이 사실은 그만큼 절박하질 않습니다. 제 욕심이나 기대, 바람을 채우는 일이 먼저이고, 세상에 뒤쳐지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남보다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절망할 때도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염려하고, 세상이 끝이라도 난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이미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지고 오셨지만, 우리를 보면 그런 나라는 오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6

여전히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만 한다는 조급함에 떨어질 수도 있고, 낮아지고 섬기는 형편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살고 싶은 마음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죽을 때까지 알게 모르게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위선을 보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우리에겐 따로 없습니다. 마음 먹는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한 겁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애당초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니, 할 수 있는 분께 의존하는 것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삶과 신앙의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면 예수님께 들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싶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에 주목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주님의 말씀이 삶을 이끄는 능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실감할 방법은 없습니다. 믿음은 더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더 놀라운 것을 얻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일에서만 생기는 겁니다. 들려진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는 경험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겁니다.

할 수 있는 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묵상하십시오. 삶 속에서 말씀을 외치시고, 주님께서 말씀을 어떻게 성취해가시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보셔야 합니다. 무언가를 알고 싶고 배우고 싶다면, 그것에 관해 더 많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속절없이 쉽게 무너지던 마음을 성령께서 단단하게 일궈주셨음을 실감하는 날이 올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눈치채는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활짝 열리게 될 겁니다.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리시나요? 사람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