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6 성령강림후 마지막 *왕국주일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에스겔 34:11-16, 20-24
응송 | 시편 100 혹은 시편 95:1~7a
2독서 | 에베소서 1:15-23
3독서 | 마태복음 25:31-4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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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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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
# 01
드디어 오늘, 성령강림절기가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은 ‘대림’이라고 하는 하늘로부터 임하게 될 소망을 여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난 삼주간의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은 특히 대림절을 앞둔 교회에게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기대를 북돋는 비유가 등장했습니다. ‘열처녀의 이야기’,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첫머리는 그 동안의 비유가 무엇을 조준하고 있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 마태복음 25:31
말씀은 ‘인자’이신 주님께서 다시오실때 하시는 일이 바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양’과 ‘염소’도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는 사정은 완전히 달라질겁니다. 성경은 다시오실 주님을 ‘심판’하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나라에 합당한 이들이 누구인지 하나 하나 불러내실 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중에 누구도 정작 자신이 ‘양’과 ‘염소’ 중에 어느 편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겁니다.
# 02
게다가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 마태복음 25:46
‘영생’이라던가 ‘영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괜시리 위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 때문일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양’으로 불러주시지 않으신다면, 행여라도 ‘염소’로 부르시게 된다면 낭패가 아닐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양’일까요, 아니면 ‘염소’일까요?
구약 1독서 본문인 ‘에스겔’ 34장 말씀안에도 양이 등장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에스겔’서에는 살진 양과 여윈 양이 구별되고 있는 반면에, 복음서에서는 양과 염소가 비교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윈 양’은 복음서에서는 ‘양’으로, ‘살진 양’은 ‘염소’로 불리우는 이들입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이 둘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주님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는데, 바로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들은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됨, 헐벗음, 병듦, 옥에 갇힘 같은 어려운 상황에 떨어져,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제 힘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곁에 사람이 많다고 해도 이런 식의 낯설은 상황은 각자 짊어져야만 하는 몫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마치 인생 자체가 버려진 것 처럼 외롭고 고독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 봉사나 휴머니즘을 요구하시는 것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님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비로서 종말에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03
주의 재림이라는 상황은 매우 위급하고 절대적인 겁니다. ‘그런 날이 언제나 올까?’ 느긋하게 지내왔다고 해도, 정작 그 날이 목전에 닿았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사는 일 때문이라던 말도,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분명히 ‘작은 자’들을 돌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여력이 없어서 돌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부러 책임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외면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엇든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이 책망받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첫번째 ‘작은 자들’을 돌보았던 그 일이 ‘주님’을 위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작은 이들을 돌보는 그 일은 반드시 ‘주님’을 위한 일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사실을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는 칭찬 받을 만하다고 해도, ‘주의 재림’이라고 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이 둘은 똑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으로 불리운 이들, 그러니까 어려운 형편에 떨어진 사람들을 도왔던 이들도 정작 ‘작은 자들’을 대하는 면에서 보면 같다는 말씀이 불편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어려운 사람들을 보게되면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 겁니다. 한끼 식사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돕는 사람도 있을테고,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주고 마음 다해 돕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끝까지 책임져야할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마지못해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그런 식이라도 선한 일을 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받는 우리 수준이 아니라, ‘주의 재림'이라고 하는 온 우주적 ‘심판’을 염두하고 본문을 읽어야만 합니다.
‘나 자신의 일’이 되기 이전까지는 어려운 상황에 떨어진 이들과 우리는 결코 똑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도, 결국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그들을 돕는다고 해도 자칫 자기 만족이나 가식에 떨어지기 쉽고, 실제로 많은 경우 이런 이들의 곁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이 우리입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여전히 ‘작은 자들’은 ‘작은 자들’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편이 되었든 우리 모두는 ‘작은 자’의 신세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큰 자’나 성공한 인생을 부러워하고, ‘작은 자’나 실패한 인생은 무시하고 깔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에 우리는 언제나 서툴기만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이런 면에서 우리의 운명을 매우 위태롭게 만듭니다. 과연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을 통해 양과 염소를 구별하고 영생과 영벌을 가르시겠다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어떤 편에 서게 될까요?
# 04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삼주간에 걸친 주님의 비유가 주목하는 핵심은 첫머리인 31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 '주님이 오시는 날’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허황된 것처럼 무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역사와 시간을 엿보고 있는지 없는지와 무관하게 다시 오실 주님에 의해 우리 모두 ‘양’과 ‘염소’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작은 자들을 외면한 이들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손을 내밀었으나 마음으로는 외식하던 이들에게도 속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에서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될 것이 뻔합니다. 낭패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더 많이 섬기고 더 열심히 돕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작은 자’들과 ‘큰 자’를 차별하는 가식에 떨어지게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겁니다. ‘너’와 ‘내’가 온전히 한 몸 되는 길은, 구분 자체가 사라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도 덜 가진 사람도 없고, 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가 환상 가운데 보았던 ‘하나님 나라’가 그 답입니다.(이사야 11:1-9) 일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 자신이 ‘양’같은 사람인지 ‘염소’같은 사람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의와 공의,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로 작동되는 하나님의 나라, 그런 세상이 열리게 된다면 다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비어있는 곳곳마다 채우고, 깨어진 삶을 채우고, 부족한 상황을 메꾸게 될 겁니다. 그런 세상이 열리게 되면 사람의 됨됨이나 교양의 정도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땅히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되어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영생과 영벌의 가름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가지고 오실 주님의 재림이라는 사태안에 담겨있는 셈입니다. 그 때를 염두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양’으로 사는 삶을 선택할 것이고,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염소’로 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더 놀라운 것은 이천년전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와 부활과 함께 ‘영벌’과 ‘영생’의 가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보지 못하고 지나왔는지 혹은 못본체 외면했는지와 무관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심판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안에 우리 자신의 운명이 놓여 있다는 것이 와 닿으시나요? 얼마나 열심을 다하고, 성실했으며, 업적을 쌓았는지로는 주님의 말씀 한 구절도, 하나님의 뜻과 의를 한 걸음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작은 자’들과 같은 신세로 떨어지고, 울며 씨를 뿌려야 하는 형편에 내몰릴까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 눈 뜨는 것 뿐입니다.
# 05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에 눈을 떴다면, 이제부터는 누구라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관계 없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믿어야 했고, 세상을 의지했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할까? 지금이 영원할 것처럼 살던 걸음을 멈추고,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2독서인 서신서 말씀안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에게 궁극적으로 주어질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의 천덕꾸러기처럼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조차도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열패감도 큽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듯하고 능력있고 유망한 모임들이 세상에 수 없이 많이 있지만, ‘교회와 같은 일’을 하는 공동체는 없다는 겁니다. 그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후패하고 형편없이 망한 것 같아 보여도, 여전히 단 한가지 사실 때문에 ‘교회’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교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체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해야하는 일, 교회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 에베소서 1:18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며, 그분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말씀을 나누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실 주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온 땅위, 피조세계 전체에 드리워질 ‘영광’을 맛보고, 오늘 이 시대안에서 재현해내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 겁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광은 언제나 ‘그날’에 맞닿아 있습니다. 주의 재림이 없다면 우리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체성은 언제나 ‘내일’을 살아가는 종말론적 공동체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빼면 ‘교회’는 친목 단체나, 사회 봉사기구, 정치집단으로 전락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거친 세상속에서 상처입고 쓰러지고 지치고 때로는 타협하는 비굴함에 떨어질 때도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 06
결핍의 문제, 채움의 문제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얻는 길은, 차고도 넘치는 ‘충만’을 경험하는 것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충만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예수안에서 찾았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그분의 말씀이 언제나 ‘아멘’인 나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충만’인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안에만 있기에, 언제나 우리는 그분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고, 자유할 뿐만 아니라, 넘치는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작고, 비록 우리는 깨어지고,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도 그분 안에만 있을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분의 ‘충만’이 채우지 못하고 덮지 못할 부족함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 이제 우리 운명 전체가 예수님의 운명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삶, 그분의 죽음 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라, 그분의 날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그 날까지 오직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어가는 것에만 마음을 쏟으십시오. 구원을 이루어가는 이 아름다운 여정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충만’이 삶을 채울 겁니다. 물론, 아직도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얼마나 이루어가고 있는지의 차이입니다. 단박에 이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쯤일런지’, 혹은 ‘어떻게'라고 가르쳐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건 온전히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주님께만 속해 있는 배타적인 구원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인생이 부족하고, 결핍되고, 깨어져 보이더라도,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 그분이 우리를 당신과 하나님의 운명 공동체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곧, 아니 세상 모두가 그분에게 주어졌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이 사실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될 겁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아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 에베소서 1:31